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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범대순
"기계시"와 "백지시"의 미학
김성곤 (문학평론가·서울대 교수)
1 범대순 시인은 내가 대학시절에 배운 은사이시다. 영문과에 다니던 1968년 가을학기, 키가 큰 젊은 전임강사 한 분이 부임해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범대순 시인이었다.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고, 조지훈의 추천으로 시단에 데뷔했으며, 3년 전 처녀시집 《흑인고수 루이의 북》(1965)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은 시인이라는 것, 그리고 원탁시 동인의 창립 대표라는 것이 우리가 들은 이야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영미시론>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그 때 막 쓰신 <頭蓋骨>이라는 시를 들고 오셔서 읽어주신 후, 우리들의 소감을 물으셨다.
사랑을 다시 찾아갔던 사람의 뜻을 그대로 서가 한 칸에 달래어 앉히다
계절의 유리문 안에 어이없이 장미의 줄기를 물고 섰는
나의 앞서 또 누구였던가 우스운 세월을 사색한 빈 그릇
그 아가리에 아침 저녁 물을 갈면 장미는 어느 꽃항아리 위에서보다 더욱 아름답다 ― <頭蓋骨> 전문
위의 시는 참으로 좋았고, 또 돌이켜보건대, 선생님께서도 그 시를 몹시도 아끼고 계셨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직 철없고 패기만만하던 내가 어찌 그런 분위기를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래서 당시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와 백낙청의 <시민문학론>에 심취해있었던 나는 그만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선생님의 시는 혹시 너무 소시민적이 아닌지요"라고 말해버린 것이다. 그러자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시며, "그렇게 생각하나? 하지만 소시민적인 데서 좋은 시가 나올 수도 있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범대순 시인이 사실은 소시민 의식과는 거리가 먼 <기계시> 시론의 주창자인 것을 알게된 것은 바로 그 뒤의 일이었다. 스티븐 스펜더와 자신의 시 <불도저>(1956)를 예로 들며 선생님은 당시 대학신문에 <기계시론>이라는 글을 발표하셨는데, 지금은 경제학 교수가 된 박동운이란 상대 대학원생이 시와 기계는 반대 개념이 아니냐는 반론을 편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불도오자>만큼 불도저의 은유를 탁월하게 제시한 시를 보지 못했다.
다이너마이트 폭발의 5월 아침은 쾌청(快晴) 아카시아 꽃 향기(香氣) 그 미풍(微風)의 언덕 아래 황소 한 마리 입장식(入場式)이 투우사보다 오만하다.
처음에는 여왕처럼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다가 스스로 울린 청명한 나팔에 기구(祈求)는 비둘기 꼬리 쳐들고 뿔을 세우면 홍수(洪水)처럼 신음이 밀려 이윽고 바위 돌뚝이 무너지고
그것은 희열 사뭇 미친 폭포(瀑布)같은 것 짐승소리 지르며 목이고 가슴이고 물며 뜯긴 신부(新婦)의 남쪽 그 뜨거운 나라 사내의 이빨 같은 것 ― <불도오자>에서
<불도오자>는 범대순 시인이 고려대 학부시절에 쓴 시이다. 전후(戰後)의 암울함과 서서히 시작되는 산업화 속에서 기계문명의 폐해를 우려하는 시들이 나오고 있을 때인데, 범대순 시인은 오히려 기계의 역동적인 힘을 찬양해서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1975년에 쓴 <기계시론>에서도 시인은 과학문명과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달이나 꽃이나 바람이나 산이나 이런 소재 밖에는 노래할 수 없는 사람은 현대의 병신"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내가 문리대 교지에 발표한 <행군>이라는 시를 선생님께서 극구 칭찬해주신 것도, 아마 총대를 맨 군인들의 힘찬 행군을 노래한 그 작품이 기계시와 비슷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계에 대한 찬양의 이면에는 범대순의 초기시가 함축하고 있는 사회의식―곧 역사의 진보에 대한 낙관적 신념―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시인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듯이, 1930년대 좌파 영국 시인들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초기 시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사회의식은 두 번째 시집인 《戀歌 I II 其他》(1971)에서도 계속된다. 범대순 시인이 민주주의를 불도저에 비유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젊은 시절에 받았던 4·19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4월을 노래한 시가 여러 편 들어 있는 《戀歌 I II 其他》(1971)에서 그는 4월의 의미를 뛰어난 장인의 솜씨로 형상화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아내는 지금도 옛날의 빛깔을 두려워하고 있다 아내보다 먼저 만났던 것이었는데 나는 결국 여자를 택하고 말았었다
생활이란 대고 사느니보다 더한 관계가 아닌지 하나 四월이 오면 아내의 마음도 나의 마음도 옛날의 그 빛 일에 가득하여 아내는 혹 어떤 재회가 없는가하고 나의 가슴 속 방을 뒤지고 하지만 X광선은 옛날의 희미한 흔적을 드러내 보일 뿐 항상 만족스런 대답을 주고 한다
이제 아내 간 자식도 생기고 애정도 생기고 설혹 이 四월에 그 불을 만난다 하더라도 가슴을 벌리고 피를 덥힐 용기는 없다
당신 지금도 그 불놀이 생각하지요 하면서 四월이 오면 꼭 나의 가슴에 진한 광선을 들이대며 나의 애정의 선사를 지우려하는 아내에게
나의 역사는 당신 것이요 당신 것이요 하고 행사처럼 다시 고백하며 이 四월의 가려움을 가만히 달래보는 것이다 ― <四월> 전문
범대순 시인의 특징 중 하나는 뛰어난 리듬 감각이다. <불도오자>도 그렇고 <四월>도 그렇지만, 범대순 시인의 시는 언제나 리드미컬하게 읽히면서도 무거운 주제로 진한 감동을 준다. 특히 초기 시들의 리듬 감각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 시인의 역량을 가늠하게 해준다. 대학원 시절에 기억에 남는 것은, 이어령 교수가 주간으로 있던 《문학사상》으로부터 스티븐 스펜더의 시 50편을 번역 소개해달라는 청탁을 받은 범대순 교수와 같이 작품을 고르던 일, 그리고 친분이 두터우시던 고려대 교수 김종길 시인에게 인사를 시켜주시던 일 등이다. 또 영어로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생기면 선생님은 늘 나를 부르셔서 일을 시키시고는 했다. 그러다가 1978년 내가 플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으로 떠나게 되자, 선생님께서는 사모님과 함께 나오셔서 송별연까지 베풀어주실 정도로 자상하셨다. 1981년 내가 버펄로 소재 뉴욕주립대에서의 공부를 마쳐가고 있을 즈음, 범대순 시인은 마침 오하이오주 데니슨대학에 와 계셨다. 그 때 우리 집에 오신 선생님을 나이아가라 폭포에 모시고 갔는데, 웅장한 폭포를 보시는 순간 시인답게, "이건 경치가 아니라 사건일세, 그래."하시는 것이었다. 버펄로에 체류하시는 동안 나는 투사시의 대표시인이자 뉴욕주립대 교수인 로버트 크릴리와의 만남을 주선해 드렸고, 두 시인의 대화는 나중에 <동아일보>에 게재되었다. 범대순 시인과 맺은 사제지간의 인연은 처음 강의실에서 만난 지 3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선생님께서는 1990년 케임브릿지 대학에, 그리고 1995년 에모리대학에 일년씩 가 계시는 동안에도 늘 잊지 않고 소식을 보내주셨고, 금년 가을에는 내가 실무위원장 일을 맡았던 대산문화재단 주최 '서울 국제문학포럼'에도 먼길을 마다 않으시고 올라오셔서 참석해주셨다. 금년에 고희를 맞으시는 데도 여전히 정력적인 시작과 독창적인 시론으로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고 계시는 범대순 시인은 내 기억 속에 언제나 《흑인 고수 루이의 북》과 《戀歌 I II 其他》의 시인으로 남아 있다.
2 범대순 시인의 시 세계를 가장 잘 요약해주는 말은 바로 시인이 1987년에 상재한 평론집의 제목인 "백지와 기계의 시학"일 것이다. 초기에 그는 기계가 상징하는 역사와 문명의 다이나믹한 힘과 에너지를 믿었다. 마치 "흑인 고수 루이의 북" 소리처럼, 기계의 울림과 리듬은 병사들을 앞으로 전진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시인의 불도저는 마치 니체의 초인처럼 강력한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 보기 드물게 역동적인 시 <불도오자>에서 기계와 예술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충적인 것으로 제시되며, 기계는 시의 주제로 그리고 인간정신의 꽃으로 승화된다. 그러나 70년대 중반, 모두가 사회적 관심에 충일되어 있을 때, 범대순 시인은 돌연 사회의식을 접고 탈정치적인 "백지시"를 주창했다. 그가 말하는 백지시는 새뮤얼 베케트의 "침묵의 문학"과는 궤를 달리한다. 베케트가 언어의 재현능력과 힘에 대한 회의로 인해 점점 침묵으로 빠져 들어간 데 반해, 백지시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표현과 창조의 새로운 장(場)이며, 잡다한 산문시대에 대한 도전이고, 무한한 언어와 계시를 담는 빈 그릇이 된다. 그래서 1974년 《현대시학》에 시인은 텅 빈 공간인 백지를 작품으로 발표하면서 자기 이름을 써넣어 고유한 저작권을 주장했다. 백지는 또한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고리를 연결해주는 공간이다. 그래서 백지에서 차츰 극도로 절제된 언어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시인은 그것을 절구(絶句)시라 불렀다. 그것은 또한 언어의 "아름다운 가난"이었다. 시인이 1991년에 펴낸 시집의 제목 《아름다운 가난》은 바로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범대순 시인은 8행 8음보 20음절로 이루어진 간결한 형태의 시 322편을 써서 《아름다운 가난》과 《세기말 길들이기》(1997)라는 두 권의 시집으로 엮었다.
남쪽 나라 먼
불타는 땅끝
저무는 全集
아 起承轉結 ― <절구시선 3>
산만한 언어의 시대에 과묵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서구문화가 편만한 시대에 동양인의 숨결을 발견하는 절구시들은 결국 그에게 제20회 시인협회상을 가져다주었다. 범대순 시인의 시 세계에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경험은 서양문화와 동양문화에 대한 그의 성찰이다. 시집 《기승전결》과 《이방에서 노자를 읽다》는 바로 그러한 동서문화에 대한 비교 성찰의 소산이다. 미국의 한적한 시골에서 체류하는 동안, 마을의 공동묘지를 방문한 시인은 서양의 절대고독 속에서 홀연 동양의 원리인 "기승전결"의 의미를 깨닫는다. 이 세상 만물에는 기승전결이 있으며, 기승전결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원리이고 사상이며 생명이라는 깨달음이 영감처럼 떠오르면서, 이후 시인은 3년여에 걸쳐 기승전결의 원리에 입각한 300여 편의 시를 쓴다. 1993년에 나온 시집 《기승전결》은 바로 그러한 깨달음의 소산이다.
사월의 어느 일요일을 미국의 공동묘지에서 보낸다 수선화며 튜울립들과 나란히 사는 리챠드며 존스 그리고 윌리암스 등의 평범한 이름들 주인도 짖는 것도 교회에 갔는지 조용하고 다만 먼 나라 이교도가 한 사람 빈 그들의 집을 기웃거리고 있을 뿐. ............................... 담장도 없고, 흑백도 없고, 빈부도 없고 추방도 영어도 사향도 없고 그리고 괴로운 주말도 여기엔 없어서 좋구나.
다음 날이던가 콜럼비아가 귀환한다고 들끓고 있었을 때, 나도 그들 사이에 끼어 까닭도 없이 밀리고 있었지만 그러나 나의 마음은 다수운 일요일 없는 자들과의 대화와 꽃들과 같이 사는 묘지에서의 화려하였던 사월의 허무로 가득하였다. ― <美國의 공동묘지> 에서
1986년에 나온 《異邦에서 老子를 읽다》 역시 서구사회의 동양인이 겪은 이질적 문화의 갈등에서 나온 경험의 기록이다. <異邦에서 老子를 읽다>는 다음과 같이 끝나고 있다.
老子를 읽다가 쓰러져서 꿈을 꾼다. 꿈속에 세 사람이 앉아 있는데 하나는 미국의 老子요 또 하나는 老子의 미국 그리고 남은 하나가 벙어리인데 웬일로 분을 이기지 못해 그는 불처럼 가슴이 타고 있었다. ― <異邦에서 老子를 읽다> 에서
미국에서 노자(老子)를 영어로 읽으면서, 그리고 동양사상까지도 영어라는 매체를 통해서 파악해야만 하는 현대의 상황 속에서 동양에서 서양으로 간 시인은 그만 말을 잃고 벙어리가 된다. 마치 밀턴의 《실락원》에서 타락 직후 아담이 잠시동안 실어증에 걸리듯, 시인 역시 우주의 언어를 잃고 형이상학적 실어증에 걸린 것이다. 서구에서의 그러한 경험과, 시인으로서의 고고함은 범대순 시인으로 하여금 '열림'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 대안으로 '트임'의 미학을 주장하게 만든다. 시인이 보는 서양적인 개념인 '열림'은 순결의 상실과 필연적인 저속화를 수반한다. 그래서 그는 동양적 개념인 '트임'을 주창한다. 우리의 인식이 트이고 깨이면, 문은 저절로 그리고 적당히 열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트임과 깨임이 없이 문만 열어놓는다면, 문화의 저급화와 통속화는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품격이 없는 서양문화에 문을 활짝 여는 것과, 비록 문은 많이 열어놓지 않아도 트인 마음으로 포용하는 것은 그 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1998년에 나온 평론집 《트임의 미학》은 바로 그러한 신념에서 쓰여진 흥미 있는 책이다. 이 책에 실린 시인의 서구문명 비판이나 동양인 영문학자 한계론은 혹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소중한 지혜와 혜안을 제공해주고 있다. 시인의 말대로, 외국문학자도 결국은 우리 것으로 회귀해야하며, 자국문화와 외국문화 사이의 완충을 위해 창작을 겸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범대순 시인은 시론이 있는 시인이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시를 위한 시론을, 또는 자신의 시론을 위한 시를 써온 보기 드문 시인이자 평론가이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실험과 새로운 도전 속에 시를 써왔으며, 그런 면에서 자신이 창조한 이미지인 "불도저"와도 같고 "흑인 고수 루이"와도 같다. 범대순 시인이 주창한 새로운 형태의 시들인 "기계시"와 "백지시"와 "절구시"는 우리 시단에 신선한 충격이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독창적이고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 □ (2000년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