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최동호

어두운 지상을 정화하는 지고한 영혼의 시

─ 최동호의 시 세계

문흥술

인간과 자연이 일체가 되고, 내면의 순수 영혼으로부터 발산되는 빛이 지상의 어둠을 밝히면서 나아갈 좌표를 지시하던 시대는 사라졌다. 인간의 자연 지배에 의한 자본주의의 물질적 풍요로움이 구가되면서 인간은 서서히 기계화·사물화되기 시작하더니, 이제 정보사회로 깊숙이 진입하면서 정보 메커니즘의 한 코드 기호로 전락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정보 메커니즘에 도취되어, 집안에서 편리하게 컴퓨터 하나로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는 이 시대야말로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행복을 제공해준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정보 메커니즘의 거대한 유폐망 속에 하나의 코드 기호로 전락해버린 비인간화된 인간,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전율할 상황에서 인간이 진정 인간다운 삶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시란 노곤한 식곤증에 빠져 나른하게 잠들려 하는 인간의 정신을 일깨우며 사물화되는 인간의 의식을 바로잡아 준다. 기계의 부속품으로 또는 일의 노예로 전락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인간의 인간다움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시이다. 기계의 차가움이나 시멘트벽의 비정함을 느낄 때 우리는 인간의 비인간화를 거부하고 시의 필요성을 새롭게 인식한다.1)

시인 최동호는 “물량주의에 의해 인간이 인간다움을 훼손” 당하는 시대에 있어서 인간다움을 되찾고, “파편화되고 왜곡된 삶”에서 “창의성을 촉발하고 전체로서 인간의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해 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간의 인간다움을 깨닫게 해주는 시’는 무엇인가?

세기말적 혼돈의 와중에 있는 지금 포스트 모던 시대의 쓰레기들을, 그리고 리얼리즘 시대의 경직된 논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소모되는 시의 쓰레기더미가 높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방황이 클수록 혼돈이 크다.2)

시인은 80년대를 지배하던 리얼리즘 시의 전체주의적 논리를 거부한 자리에서, 그리고 90년대 시단을 강타한 해체시를 ‘시정신과 시의 소멸’이라 비판하는 자리에서 출발한다. 시인은 한국시가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라는 시 장르의 본래적 의미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다는 판단 아래, “기계보다는 인간을 강조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자연과 문명이 하나의 전체로서 조화되는 생성적 세계관”을 지향함으로써, 90년대 한국시에서 큰 줄기를 형성하게 되는 정신주의 시의 태동을 선도한다. 시인이 주장하는 ‘인간의 인간다움을 깨닫게 해 주는 시’는 이 정신주의 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정신주의는 무엇인가?

시인은 두 번째 시집 《딱따구리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에서 우리에게 하나의 화두를 던지고 있다. ‘달마는 왜 동쪽으로 왔는가’가 그것이다.

붉은 살덩어리

어린애가 막 울고 있는데

달마는 왜 동쪽으로 오는가

구름은 산 아래를 굽어보고

빗방울 길을 따라 바다로 흘러간다

오고 갈 것이 본래 없는데

어린애는 왜 목이 붓도록 울고

눈썹 짙은 달마는

왜 먼길을 찾아왔는가

잔잔한 강물이

마음 그림자를 비춰주니

하늘에서 떨어진 둥근 달덩이

물 속으로 들어가 소리가 없다.

저잣거리를 헤매이던 사람들

하늘에서 달덩이 찾으려 하나,

창창한 별들만 어둠 깊이 박히고,

그림자 없는 길을 걸어간다

너 가는 곳이 어디냐

뜰 앞의 잣나무!

제자리를 지키리라.

달빛을 쓸어내니

캄캄한 어둠을 머금었던 하늘이

새벽 빛을 푸른 산에 내뱉는다.

─ <새벽 빛> 전문

달마는 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는가? 동쪽은 어떤 곳인가? 동쪽은 붉은 살덩어리 어린애가 울고 있고, 하늘의 둥근 달덩이가 물 속으로 사라졌으며, 그림자 없는 길로 압축되는 어둠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동쪽을 정보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세속적 현실로 보자.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영혼의 빛이 사라진 채, 나아갈 방향을 상실한 코드 기호화된 인간과 자연만이 난무하는 암흑 천지의 세계이다. 그 세계에 태어나 울고 있는 붉은 살덩이 어린애는 우리 시대의 암흑에 절망한 이들의 울부짖음일 것이며, 물 속으로 사라진 달덩이는 현실에서 추방된 순수 영혼과 자연일 것이다. 달마는 사라진 달덩이를 되살리기 위해, 어둠을 몰아내고 새벽빛을 회복하기 위해, 울고 있는 어린애를 달래기 위해 동쪽으로 온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의 의식이 달마로 표상되는 선의 세계, 곧 세속적 현실에서 추방된 순수 영혼과 자연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이들의 회복을 강렬히 욕망하는데, 그렇다면 시인이 꿈꾸는 동쪽의 바람직한 모습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과 사물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 있는 세계이다. 말하자면, “구름은 산 아래를 굽어보고/ 빗방울 길을 따라 바다로 흘러”가는 세계, “뜰 앞의 잣나무”가 “제자리를 지키”는 세계이다. 원래, 세계는 인간과 자연, 영혼과 육체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곳으로,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아늑한 공간이었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모든 사물은 본래의 모습에서 일탈되어 인공적으로 재가공되기 시작한다.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와 상품에 의한 인간 소외가 진행되면서 세계는 대립과 배제의 논리가 지배하는 황폐한 공간으로 변질된다. 인간과 사물이 본래의 모습 그대로 본래의 자리에 있으면서 ‘오고 갈 것이 없는’ 균형상태는 파괴되고 세계는 이제 어둠이 지배하는 불모지로 전락한다. 시인은 이처럼 불구의 현실을 원래의 조화로운 상태로 변혁시키기 위해 달마로 표상되는 선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현실로부터 초월하여 탈속의 선적 세계만을 추구하는 것일까?

(……)

동쪽으로만 가는 자는

서쪽 길을 잃으리니

세속을 버린다고, 정녕

그대는 가야 할 길도 잊었구나

(……)

─ <세속의 길> 부분

시인은 세속적 현실인 동쪽만을 지향하거나, 반대로 그런 세속을 버리고 탈속의 선적 세계만을 지향하는 것을 부정한다. 흔히, 정신주의를 두고 현실의 문제를 외면한 채, “산속으로 들어간 초월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을 가한다. 그러나 시인이 지향하는 정신주의는 그런 탈속적이거나 은자적인 것이 아니다.

시대의 변화가 가속화될수록 세속주의의 범람이 유행처럼 번진다. 절제 없는 세속주의나, 세속 없는 정신주의는 모두 불행하다. 가짜 정신주의의 발호도 두렵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너무 깊게 세속주의에 탐닉해 있는 것은 아닐까. 스크린의 화려함과 꿀의 달콤함을 누가 모를까. 가상현실 속에서는 현실이 가짜와 같다.3)

정신주의는 ‘절제 없는 세속주의’도, ‘세속 없는 정신주의’도 거부한다. 정신주의는 황폐한 세속적 현실의 길을 걸어가면서 ‘스크린의 화려함과 꿀의 달콤함’으로 언명되는 정보사회의 모순을 간파하고, 그것을 비판하면서 “인간과 자연과 문명이 하나의 전체로서 조화되는 생성적 세계”를 지향한다.

(……)

푸른 숲을 바라보며 나는 왜 그가

미소짓는가를 물어보지 않았다.

흰 구름이 두어 송이 하늘꽃처럼 피어

무심하게 지상을 굽어보고

숲과 바위와 능선들이

둥글고 큰 하늘의 눈동자 열어

모든 것이 제 모양으로 비치는

명징한 세계 안에 내가 있었다.

한낮의 태양이 머물다 간 바위에 기대어

더 높은 곳을 향해 눈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소리쳐 보았다. 진정

지고한 영혼이여,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왜 그러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우리들의 주위에 퍼져 있던 서늘한 빛은

끓어오르던 마음을 다둑이듯

울퉁불퉁한 계곡의 돌멩이들을 끌어당겨

둥글고 아름답게 감싸고 있었다.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는 물길을 흘려 보내고

겹겹한 어둠 위로 솟아오른 여름 道峰,

정정한 나무 그림자들과 함께

어둡고 차가운 길에서 山頂을 우러러보며

나는 지상의 길을 찾아 힘차게 살고 싶었다.

─ <여름 道峰에서> 부분

시인은 여름 도봉산에 올라 세속 도시를 굽어보면서 ‘둥글고 큰 하늘의 눈동자’를 열어 본다. 그곳은 모든 것이 오염되지 않은 채 ‘제 모양’으로 있는 ‘명징한 세계’이다. 시인은 명징한 세계 속에 들어간다. 아니 명징한 세계를 자신의 영혼 속에 일체시킨다. 그 순간 ‘지상’ 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지고한 영혼’의 존재를 깨닫고, 그 영혼과의 합일을 강렬히 욕망한다. ‘명징한 세계’와 ‘지고한 영혼’은 세속도시의 지배논리에 함몰된 우리가 잊고 있는,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되찾아야 할 지고지순한 정신적 가치이다. 시인은 그러한 ‘가장 높은 정신’을 자신의 영혼 속에 품고 그 정신을 상승시켜 나아감으로써, 정보 메커니즘에 의해 훼손된 ‘지상의 길’을 ‘지고한 영혼’으로 치유하려 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신주의는 정보 메커니즘이 가공할 속도로 모든 것을 잠식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반드시 되찾아야 할 ‘지고한 영혼’의 세계를 지향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하나의 코드 기호로 전락해버린 우리들 심성을 깨우쳐 주고,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주고 있다. 정신주의가 지향하는 ‘지고한 영혼’의 세계는 궁극적으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정신과 육체가 구분 없이 서로 조화롭게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 공간은 하늘과 땅, 대우주와 소우주가 원환을 이루면서 서로에게 길잡이 역할을 하는 곳이며, 물질적 가치가 지배하게 되는 근대 이후 상실된 공간이자, 인류가 반드시 회복해야 할 선험적 고향이다. 그곳은 모든 것을 코드 기호로 전락시키는 ‘지금 이곳’의 가시적인 영역에는 부재하지만, 그 내부 혹은 비가시적인 영역에는 엄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가 정보 사회의 모순을 치열하게 비판할 때 얼마든지 현현하는 현실적 가능태이다. 나아가 그곳은 “인간과 자연과 문명이 하나의 전체로서 조화”를 이루는 다가올 21세기의 새로운 공간이며, “20세기를 지배한 서구적인 이성적 합리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동양적 정신주의’의 세계이다.

시인 스스로 정신주의를 “종전의 서구적 이성의 패러다임에 근거한 시학이 아니라 부분과 전체를 분리하거나 단절하지 않고 하나의 도로 아우르는 시학”4)으로 규정한 바 있다. 곧 정신주의는 시인이 서양사상뿐만 아니라 동양사상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을 바탕으로 양자를 지양하여 도달한 사유체계이다. 시인은 동양사상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노자》, 《장자》, 《寒山詩》, 《文心雕龍》과 선불교에서 통용되는 사유체계에 기초하여, 일본의 대표적 하이꾸 시인 바쇼, 한국의 한용운, 정지용, 김달진의 시적 특수성을 고찰하면서 그 속에 내재된 사상적 보편성을 검토하면서 이 체계에 도달한 것이다.

인간과 자연,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계는 세속적 현실에는 부재한다. 모든 것이 상품화되고 코드 기호화된 현실에 부재하는 그런 세계를 회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만물일여(萬物一如)의 자연사상5)이다.

이것은 “소나무에 관한 것은 소나무에게 배우고 대나무에 관한 것은 대나무에게 배우는” 것이다. 곧 “사물의 본성과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만 그 사물의 본상이 나타나며 다시 그 인간의 본상도 표현된다”는 것이다. “유전하는 자연에서 그 이법을 깨닫고 하나가 될 때 인간은 고금에 통하는 시의 길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성과 일체가 될 때 인간의 본상도 표현된다는 만물일여의 자연사상에 기초하여 인간과 자연이 하나되는 세계를 지향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사물의 본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그것과 일체가 되느냐 하는 것이다. 흔히 코드 기호화되지 않은 자연물, 곧 오지(奧地)로 여겨지는 산과 강을 찾아가 그 본성을 찾으려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정보 사회는 자연과 인간의 무의식마저 통제한다는 제임슨(F. Jameson)의 지적처럼, 우리 시대에 정보 메커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일한 방법은 정보 메커니즘으로 덧칠된 표면을 뚫고 들어가 그 속에 내재된 사물의 본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시인은 다음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사물의 본성과 일체가 된다. 먼저, 세속적 현실에서 사라진 지고한 영혼과 순수 자연에 대한 강렬한 지향의식을 시인의 마음속에 잉태하는 것이다.

(……)

작은 글자들을 따라가

머나먼 산간 계곡의

싱그러운 바람 소리를 들었다.

돌 건물 한 모퉁이에서

모래알이 부서지고

가끔 書冊에서 고개를 내민 글자들이

丁丁한 겨울 나무 속의

벌레처럼 꿈틀거릴 때

딱딱한 부리가 가슴을 쳤다.

햇살 푸르게 되살아나는

구정 연휴 첫날,

딱따구리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흰 눈 머리에 함께 쓴 白雲과 道峰이

서로를 비추며 빙긋이 마주보고 서 있었다.

─ <딱따구리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부분

구정 연휴 첫날 시인은 대학 연구실에 있다. 모두가 명절 분위기로 들떠있을 때, 시인은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고요하고 적막한 연구실에 앉아 “도시락을 비우고/천천히 찬 물”을 마신 후, 책을 읽는다. 시인은 책에 몰입하면서 책의 글자들로부터 ‘머나먼 산간 계곡의 싱그러운 바람 소리’를 듣는다. 그러면서 시인은 연구실 사방의 돌벽이 허물어지는 장면을 목도한다. 그 순간, 번요한 도시 속의 밀폐된 연구실은 ‘글자들이 丁丁한 겨울 나무 속의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깊은 산 속으로 질적 변화를 겪는다.

딱따구리는 무엇인가? 마치 “伐木丁丁이랬거니 아람도리 큰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맹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옴즉도 하이”(<長壽山1>)라는 정지용의 시에서처럼, 나무를 찍는 도끼 소리가 쩡쩡 울릴 정도로 고요한 겨울 산에서 시인은 눈 덮인 겨울산들이 서로 미소짓는 것을 보고, 산간계곡의 싱그러운 바람 소리를 듣고 있다. 딱따구리는 그런 세계에 대한 마음의 강렬한 지향이 응결된 시적 상징이다. 그러니까 딱따구리는 현실에서 사라진 지고한 영혼과 순수 자연의 표상물이다. 시인은 그런 딱따구리를 마음속에 간직한 채, 현실에서 사라진 것을 언제 어디에서든지 강렬히 지향하는 것이다. 그런 지향성을 내포할 때, 두 번째 방법에 도달할 수 있다. 그것은 정보 메커니즘에 오염된 사물의 가시적 측면을 뚫고 들어가, 그 속에 내재해 있는 오염되지 않은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는 시선을 획득하는 것이다.

밝은 봄날 햇빛 속의 오솔길을 걸어가면

어린아이 손톱같이 작은

연록의 이파리들이 나에게 속삭인다.

어둠으로부터 빠져나오려는

작은 울림들은 나이테를 따라

안에서 밖으로 열고 나오는

새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귀기울여 들어보면 밖에서

안으로 숨어들었던 햇살들의 작은 반향들이

겨울 나무 두꺼운 껍질을 뚫고 나와

물기 반짝이는

햇살과 조용조용 이야기한다.

귀를 간질이는 쟁쟁한 소리들, 바람을 일으키는

물결처럼 하나의 둥근 세계를 만든다.

팔랑거리며 밖에서 안으로

넘나드는 작은 소리들의 숨결이

나의 가슴을 신선한 바람으로 가득 채우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열어 발걸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

─ <좀벌레와 함께 오솔길을> 부분

시인은 딱따구리를 마음속에 간직한 채, 세속에 찌든 나무를 본다. 그러나 이제 시인에게서 그 나무는 더 이상 정보 메커니즘에 오염된 나무가 아니다. 시인은 나무의 껍질을 뚫고 나무의 안에 들어간다. 안은 오염되지 않았다. 사물 본래의 모습 그대로이다. 시인은 나무 밖에서 찾을 수 없던 나무의 본질을 나무 안에서 파악하고 그것과 일체가 된다. 나무 안에서 볼 때, 밖에서 오염되어 있던 햇살들은 나무 안에서 정화된 후 껍질을 뚫고 나가 하나의 둥근 세계를 만든다. 오염되지 않는 나무 안의 햇살들이 만드는 둥근 세계야말로 세속에서 사라진 세계, 곧 인간과 자연,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이 공존하는 세계일 것이다. 시인은 청정한 생명이 넘쳐흐르는 그 세계의 숨결과 일체가 되면서 ‘가슴을 신선한 바람으로 가득 채우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열어 발걸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경지, 곧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속의 딱따구리에 대한 강렬한 지향, 그것에 의한 사물의 본질 포착을 통해 시인은 현실에서 언제든지 우리 시대에 사라진 숭고한 영혼과 순수한 자연의 숨결을 느끼고, 그것과 일체가 됨으로써 불모의 현실을 맑고 푸른 생명이 넘쳐흐르는 세계로 정화시켜 나간다. 이제 ‘인간의 인간다움을 일깨워 주는 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 계절 내내, 산을 오를 때도,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도, 산책을 할 때도, 심지어 한산시(寒山詩)를 읽고, 녹차를 마시고, 일본어 발음 연습을 할 때도 물아일여의 경지에 도달한다. 시인은 그 세계를 시로 쓰고, 그런 시를 통해 비인간화된 우리들이 진정 인간다움 삶을 영위하기 위해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다음 시에서, 하찮은 나뭇잎에서도 따뜻한 영혼의 숨결을 느끼는 시인의 섬세한 감수성과 치열한 시정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 먹어 반짝이는 훈훈한 바람’의 향기를 맡으면서, 메말라 있는 우리들 심성의 깊은 지층으로부터 지고한 영혼과 청정한 자연이 어우러진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서서히, 그러면서 강렬히 피어오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디로부터 오는 이

無量한 부드러움의 손바닥인가

물오른 나뭇가지에서

피어나려는 나뭇잎들이

물 먹어 반짝이는 훈훈한 바람에

작은 가슴을 벌리고 있다.

─ <봄바람> 전문

시인의 약력을 살펴보자. 1948년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하여 고려대학교에서 시문학을 전공하고 지금 모교의 교수로 재직 중인 시인은 많은 저서를 출간하였다. 시집으로는 《아침책상》, 《딱따구리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시론집으로는 《현대시의 정신사》, 《불확정시대의 문학》, 《한국현대시의 의식현상학적 연구》, 《평정의 시학을 위하여》, 《삶의 진실과 시적 상상》, 《하나의 도에 이르는 시학》, 《시 읽기의 즐거움》, 편저로는 《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현대시 창작법》, 《남북한현대문학사》, 역서로는 《헤겔 시학》, 《문심 조룡》 등이 있다. 이들 저서를 통괄하는 시적 사유체계는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방대하다. 그러나 이들 저서들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하면, 시인이 한국시의 활로 타개를 위해 서양과 동양의 사상을 깊이 있게 천착하면서, 한국시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시의 시대정신에 대하여 얼마나 치열한 탐색을 행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시인은 정신주의 시의 또 다른 한 특징으로 지행합일의 실천사상6)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시와 시인의 삶이 일체되는 것이다. 시인은 이를 일본의 하이꾸 시인 바쇼의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바쇼의 시는 그가 “청한 궁핍을 견디며 밤늦게 대야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거나 죽음을 예감하면서 거친 겨울 들판을 헤매는 자신의 영혼을 노래”한 것이라 보고, 서구의 이론처럼 시와 시인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와 인격을 동등한 것으로 파악하고 시를 공부하는 것과 인격함양이 동일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곧 정신주의는 인간과 자연의 합일, 시와 시인의 일치를 통해 “인간의 전인적 완성을 이상으로 하는 시의 독자적 보편성을 확보”7)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이 자신의 시론집인 《하나의 도에 이르는 시학》에서, “혁명가로서 3·1 운동을 주도했던 한용운은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을 ‘기루어’ 하면서 님만 님이 아니라고 시를 쓰고” 또 그런 삶을 실천했다고 평가하는 것이나, “동양적 정신의 구경”을 탐구한 정지용의 산수시는 “정신주의가 도달한 최상의 시적 언어”에 해당된다고 평가하는 것이나, 김달진은 “노장적 무위자연”의 시심을 일관되게 실천함으로써 “진정한 것,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의 세계라 할 수 있는 “劫外의 하늘”에까지 나아간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모두 시인이 지향하는 시 세계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상실된 지고한 영혼과 순수 자연을 지향하는 시인의 삶은 어떠한가? 대학 시절 시인에게서 나는 문학을 배웠다. 문학연구를 하는 제자의 입장에서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는 한 장면이 있다. 늦은 밤 친구들과 학교에서 노닐다가 하숙집으로 귀가하는 도중, 바바리 코트를 입고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귀가하는 스승의 모습이다. 그 모습은 학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내게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밤늦도록 책과 씨름하다 지친 몸으로 돌아가는 스승의 모습을 본 이후, 나 역시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시인은 언뜻 겉으로 보면 찬바람이 쌩쌩 돌 정도로 매섭고 차갑다. 시인에게서는 흐트러진 모습을 찾기 힘들다. 매사에 빈 틈 없고 정확하다. 대학 시설 시인의 강의 시간은 공포의 시간이었다. 그 날 강의 내용에 대한 사전의 공부 없이 강의를 듣다간 영락없이 혼이 나게 마련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학생들을 훑어보면서 핵심적인 내용을 질문하면 우리들은 식은땀을 뻘뻘 흘릴 뿐이었다. 그 때 그 당시에는 그렇게 공포에 떨던 강의 시간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로 돌아가 더욱 열심히 시인의 강의를 다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시인과 함께 가끔 등산을 가곤 한다. 작년 시인과 함께 도봉산에 간 적이 있다. 시인은 사진기를 들고 와서 제자의 모습을 열심히 찍은 후 필름과 사진을 넘겨주었다. 그러면서 앞으로 책을 낼 때는 이 사진을 사용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출간한 두 번째 평론집에 실린 사진이 인민군 전사와 같다고 하면서.

차가움 속에 있는 무량한 부드러움! 그것이 제자로서 느끼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다. 시 <등불과 꽃-아내에게>를 보면 “등불과 꽃을 피우는 마음 아픈/인간이 산다”라는 시구가 있다. 전적으로 나는 동의한다. 겉으로는 엄격하지만, 시인의 가슴속에는 가족과 제자와 시와 문학에 대한 사랑의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고, 또 그 꽃이 활짝 만개해 있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나태해지면 매섭게 다그치면서, 힘들어할 때 마음속으로는 따뜻하게 감싸안아 주고, 신춘문예나 잡지로 등단을 하면 꼭 축하의 술을 사주는 스승.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밝고 올바른 길만을 걸어가는 학자. 시에 대한 절대적 애정을 바탕으로 한국시의 운명을 타개하기 위해 치열한 고투를 벌이는 시인이자 비평가. 그래서 시인을 대할 때마다 나는 항상 경외롭다. 그렇지만 그런 시인을 모시게 된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가 상품화되고 수단화되어 가는 지금, 인간과 자연이 합일되고 시와 시인이 일체가 되면서 전인적 인격완성으로 나아가려는 시를 지향하고 그런 시론을 체계화하는 시인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한국시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컴퓨토피아라 할 수 있는 새로운 세기가 다가오고 있다. 시심이 메말라갈 수밖에 없는 새로운 세기에 점점 왜소해지고 훤소해지는 한국시가 그 운명 타개를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의 단서를 시인의 정신주의 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시 세계가 더욱 질적 깊이를 확보하면서 한국시에 한 거대한 발자취를 남길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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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동호, 《시 읽기의 즐거움》,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9. p. 8.)

2) 최동호, 《딱따구리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민음사, 1995. p. 111.

3) 위의 책, p. 117.

4) 최동호, 《하나의 도에 이르는 시학》,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7. p. 10.

5) 위의 책, pp. 11∼27.

6) 위의 책, p. 71.

7) 위의 책, p. 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