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커버스토리 / 조정권
歌人을 향한 춤추는 진혼곡
장경기
그는 가장 높은 정신을 보았다 스위치를 누르자, CD플레이어의 검은 패널 속에서는 인디케이터의 불빛이 파랗게 빛났다. 그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의 대리석의 얼굴 위로 눈꺼풀이 덮이면서, 세상은 그로부터 밀려나고, 오직 깊은 저역의 음만이 그의 내면 속을 흐르기 시작한다. 구스타프 말러 심포니 2번 C 마이너 <부활 RESURRECTION>, 음은 허무와 죽음의 막막한 허공을 열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를 섬광처럼 꿰뚫으며 질주해오는 짜라투스트라, 이어 투명한 빛살로 허공을 더욱 비워지게 하는 왕유와 이백, 맹호연, 그것은 서양정신과 동양정신이 서로 충돌하면서 빚어내는 휘황한 정신적 광휘로움이었다. 그 쩡쩡한 부딪침 속에서 투명하게 얼어붙는 공기, 열리는 광활한 정적. 그러나 다음 순간, 격렬히 파도치면서 그의 폐부를 찔러오는, 그 숨막힐 것 같은 깊은 저역의 음. 그렇게 무겁고 격렬하게 허공 속을 출렁이며 얼마나 긴 동안을 아래로 아래로 그는 가라앉았던가. 어느덧 투명함으로 침전된 그의 안으로 음은 이제 죽은 듯이 조용히 흐른다. 심포니 9번 마지막 악장. 폭포처럼 격렬했던 음은 동양적인 관조의 세계, 그 깊고 투명한 허공을 그의 앞에 열어보인다. 희디흰 빛살만이 충만한 투명한 정적의 공허, 광활한 백지! 그는 보았다. 그 백지 속에 희디희게 얼어붙은 폭포, 깎아지른 벼랑, 만년설의 쩡쩡한 얼음산 ……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天上의 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1)
그의 예술혼이 뜨거운 얼음칼날로 번득이며, 허공 속을 가파르게 치닫는 동안, 그를 에워싸던 콘크리트 담벼락, 책, 오디오 그리고 그의 몸조차 그의 밖으로 밀려났다. 그는 하늘을 찌르는 벼랑의 날카로운 산봉들이 도도히 치솟아 있는 얼음산 속을 홀로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 깨울 수 없는 태허의 고요에 잠재해 있는 함성과 끓어오르는 광대한 울부짓음, 일찍이 대자연은 그러한 함성과 울부짖음 속에서 스스로의 형상을 얻었던 것이리라.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태초의 원형을 그 내부에 간직한 채로,쩡쩡 햇살이 벼랑에 부딪쳐 튕겨나갔다. 그렇다.
한 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 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 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處所에 뿌려진 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 누르지 않는다면.2)
위대한 정신의 문은 닫히고, 쇳덩이 같은 어둠만 그의 저 깊숙이까지 뒤흔들며 진동하게 했던, 투명한 얼음 속의 참숯불덩이같이 응결된 견고한 정신 에너지. 그 위대한 정신에 감전되어 그는 희디흰 백지 속을 얼마나 가파르게 올랐던가. 그러나 그의 눈꺼풀을 더듬는 스산한 아침 햇살에 깨어난 그에게, 지난 밤의 그 벅찬 혼의 울림은 아득한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주변에 책상, 오디오기계 등 매끄러운 일상의 느낌들이 자신을 무감각하게 방치해두고 있었다. 큰 딸 채린이가 간밤의 꿈을 씻어내기 위해 화장실로 눈을 비비며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간간이 작은 딸 혜린이를 깨우는 아내의 피곤함이 베인 목소리! 아내도 밤을 새운 것일까? 아동문학가에 방송작가 일까지 겸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리라. 무심코 들여다본 책상 위의 희디흰 백지에는, 단어들이 가파른 절벽에서 추락한 주검들처럼 검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정신이 탈색되어버린, 백색 사막의 뼛조각들처럼……. 백지에 반사된 신경질적인 빛살만이 망막을 헤집고 들어와 그 백색의 허공을 그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무엇이 내 안에서 그리도 격렬하게 일어났다가 다시 침전되어 버린 것일까.’이런 의문에 사로잡힌 채, 그는 어느덧 동숭동 대극장 앞을 지나고 있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오늘도 그의 한낮의 육신이 거할 근무처인 것이다. 물먹은 솜뭉치처럼 쿨렁쿨렁한 일상, 무기력한 망막함이 다시 자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지금은 쇳덩어리 같은 사방의 어둠. 밀려오는 쇳덩어리 같은 어둠. 壓殺되는 쇳덩어리와 쇳덩어리의 침묵. 한밤내 무력한 출혈. 누가 이 한밤중 쇳덩어리 속에 피와 신경을 통해놓을 것인가. 누가 이 한밤중 쇳속에 깃든 천근 침묵을 깨우며 應戰하겠는가. 누가 이 한밤중 땅속 깊은 鑛石의 혈관을 터뜨려 우리들의 어둠 속에다 낭자히 수혈해놓겠는가.3)
위대한 정신의 섬광이 사라져버린 그의 내면 속 무겁게 짓누르는 쇳덩이 같은 어둠.
위대한 정신이여 한 번만 더 오라 몸은 신열이 솟았다. 앓는 정신에 몸마저 괴롭다. 창문 밖에는 철면피의 아파트 건물들이 검은 절벽처럼 벽을 두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무심코 CD플레이어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다시 한번 눌러 껐다. 고요의 정적 속! 정신은 유난히 투명했다. 투명한 정신의 불꽃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감은 채 망막 속의 잔영을 응시하는 그의 내면에서는, 지난 며칠간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그 어떤 느낌의 실체를 찾아서 투명한 불꽃이 가파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 턱이 굳센 꽃들이 딛고 있는 땅덩어리 같은 힘, 그곳에서 고통이 나를 움트게 하고 나를 내딛게 한 것인가. 위대한 정신이여 오라. 영혼 속으로 방문하라, 두드리라. 지금 저 광막한 大地에서 북을 두드리는 강철 같은 打鐘, 저 소리들이 귀를 단단히 하고 무르팍을 곧추세우게 하였는가. …… 위대한 정신이여, 다시 오라,더 가까이 더 가까이 저 大地의 북소리 속에서 내 피를 푸르게 튀게 하라. 거기서 내가 듣던 꽃들의 은밀한 打鐘,영혼의 마지막 날 하얀 성찬. 한 잎 한 잎 내 근심을 벗기어 주는 빗방울보다도 가볍고 작은 손들의 打鐘. 위대한 정신이여 한 번만 더 오라. 돌밭에 발굽을 찍으면서 달려가버린 내 푸른 말잔등을 한 번만 더 혼신의 힘으로 난타하게 해달라. 난타하게 해달라.4)
그러나, 그의 초침은 여전히 황막한 들판에서 녹슬어가고 있었다. ‘위대한 정신이여 한 번만 더 오라. 오라.’ 지상에 낮게 엎드려 있는 그가, 갈구하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쇳덩어리 속에 갇힌 囚人이었다. 언젠가 갈대밭을 헤치고 강물 위로 띄웠던 소쿠리가 신의 문간으로 무사히 도착하기만을 바라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쇳덩이의 어둠 속에서 순간순간 졸며 잠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안타까워했다. 더욱 깊은 잠 속으로 추락하는 자신을 …… 오! 누군가 결빙의 지팡이로 후려쳐주기만을 갈구했다.
맑게 깨어 있는 정신의 빙벽을, 한 시대의 짜라투스트라들을. 자신에게 강한 새싹을 뿜어내는 死火山을. 여기, 大地의 아들 하나 무참히 꺾이어 누워 있나니 장엄함이여,우리들이 하늘에다 쏘아올리는 조포소리를 받으라. 여기, 大地의 아들 하나 무참히 꺾이어 누워 있노니 그는 우리들 중 또다른 누구이겠는가. 그가 누구였는가를 우리 모두에게 이해하게 해다오. 우리들의 눈 멀었던 세월들을. 시대들을. 빛의 어둠으로 밝음을 내게 말하게 해다오. 도끼들이 살해한 죽은 밤나무의 입술로 말하게 해다오. 무기들을 처형시킨 용광로의 불길로 말하게 해다오.
사실을 말하게 해다오. 오랜 세월 방석을 뭉개고 앉았던 성직자, 승려, 권력자들이 왜 돈을 깔고 앉는가를. 왜 水晶들은 깊은 바위산에 숨어 성장하면서 빛을 내지 않는지를. 왜 雪山의 암굴에서 평생을 보낸 禪師들이 미쳐갔는지를.
흐트러진 입들을 한 데 모아 이야기하게 해다오. 세계를 苦辭하다 枯死해버린 고치들을. 맑게 깨어 있는 정신의 빙벽을. 한 시대의 짜라투스트라들을. 나에게 강한 새싹을 뿜어내는 死火山을.5)
쇳덩이의 어둠 속에 웅크린 채, 눈 멀은 세월을 보내는 동안, 지상은 견딜 수 없는 의문과 갈증으로 타들어가고 있었다. 일찍이 위대한 정신을 찾아나섰던 대지의 아들들이 좌초해버린, 혹은 침묵해버린 모습으로, 철면피의 물음표만을 달고 있었다. 그런 캄캄한 지상을 응시해야 했던 그의 투명한 영혼! 그만큼 스스로를 매서움으로 연마해야 했던 날들이었다. “갈가마귀 울음 자욱히 잦아가는 언 하늘에 온통 시퍼런 청죽을 치겠다. 삭풍이여, 삭풍이여, 우리를 다시 한 몸으로 묶으라. 또 한 차례 땅속 깊은 뿌리들을 출렁이게 하고 우리들을 다시 한 뿌리로 묶으라. 그리고 지상에 홀로 남아 칼을 입에 물고 노래하는 가인을 오래 머물게 하라”6)예언자적 풍모마저 띠고 있는 한 견인주의자로서의 가열찬 청정 기개. 그러나 뿌우연 먼지 속 같은 지상에서 그의 외침은 허공 저편으로 메아리 없이 사위어질 뿐이었다. 노래도, 머물 가인조차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녀자가 기른 蘭에도 향기가 없고 대장부가 기른 죽에도 기품이 없었다. 타락한 영혼들, 그들의 노래가 될 수 없는 타락한 언어!세상 온 구석에 뼈를 찔러 넣는 한기마저 없었다. 기품 없고 향기도 없이 썩은 내만 진동하는 지상! 그는 투명한 결빙의 산정을 떠올렸다. 그렇다. 캄캄한 잠 속에 침식되어 있는 영혼을 깨우고 병든 언어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바로, 투명한 얼음의 산정에 새겨 있는 가사 없는 노래가 있어야 했다.
“언제 보아도 山頂 위에는 바람 자고 오랜 세월 至高한 발길 머물은 구름의 묘비명, 거기 새겨 있는 가사 없는 노래를 내 어찌 전할 수 있으리…… 서재에 불상을 모신 쇼펜하워, 들길을 거닐며 공자를 가르치던 에머슨, 선방에 들어앉은 레비 스트로스, 니체, 랭보,저 모든 유럽 탈출자들. 그들 또한 지상을 탈출하지 못 하고 결국 지상에 묻히지 않았는가. 오, 그대들, 허공의 탈출자. 동양의 담장 위에서는 無의 성숙한 열매가 보이고 고아한 나뭇가지에는 시인이 빠져 죽은 달이 둥그렇게 걸려 있지 않은가. 그들이 부른 노래는 無의 노래, 가사 없는 노래. 그것은 차라리 도취의 노래가 아니었는가.”7) 자연의 거대한 고요 속에 감추어진 근원의 소리! 자연의 내부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그 소리야말로 우리들의 혀가 오랫동안 잊고 지내왔던 노래하는 법을 다시 일깨워주리라. “보라 친구들이여. 그대는 듣지 못 하는가. 그리하여 환희의 절정에서 소리치는 세계의 침묵이여. 내 가슴을 통과하고 높이 비상하여 내 주위에서 성스럽게 울려퍼지는 경이롭고 부드러운 음률이여. 혀 끝처럼 감미로운 음률이여”8) ‘우리는 되돌아가야 한다. 인간의 타락한 언어를 버리고 태초의 원형을 찾아 돌아가야 한다. 태허의 고요를 담은 자연의 가사 없는 노래소리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이 전해주는 혀로써 노래하는 법을 다시 익혀야 한다.’ 그렇구나 도시여, 이제는 내가 너희들을 버릴 차례가 온 것이다. 이런 결론에 이른 때문일까. 그에게는 자신이 자라온 도시이건만, 더욱 낯설게만 여겨졌다, 저 늙어버린 피부의 도시. 칠십 먹은 주름살의 언어들!인간의 혀란 본시 말보다 노래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닌가. 지상의 거주자들은 그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혀로써 말을 쌓아 올리고 의미만을 찾는데 모든 정열을 쏟고 있지 않은가. 얼음과 만년설과 寒氣의 벼랑에서 견인주의의 기개를 길렀고 비속한 시대를 질타했던, 미래의 ‘歌人’을 기다리며 ‘切腹’시대의 도래를 예고했던 그는 어느덧 절벽을 향해 돌아누워, 늦은 저녁의 낮은 종소리를 듣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망망대해였다. 도시 속에서 그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구나, 도시여, 이제는 내가 너희들을 버릴 차례가 온 것이다. 너희들은 언제나 낯선 이방의 언어로써 나를 검문하지 않았는가. 높은 노래는 하늘의 첨탑에 고립되어 있고, 거리의 둥그렇게 떠오른 滿月 속에서는 흰 피의 사냥개가 달려나와 나를 쫓아내지 않았던가. 그렇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들을 버릴 차례인 것이다.”9) 버리고 어디로 가려는가. 山頂이리라. 모든 사람들이 다투어 일용할 양식을 도모해 탐욕의 저자로 몰려갈 때 그는 삭풍을 맞으려 山頂을 향해 떠나려는 것이다. 높고 차고 청정한 것에 대한 견인주의적 동경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지상적 삶을 극복해낼 수 있는, ‘투명한 노래’를 가지고 돌아오리라. 그는 출발하는 순간, 짜라투스트라처럼 되뇌였다. “입술의 노래는 흙으로 돌아가지 않으리. 스스로의 영혼을 입술로 불어서 불씨를 일으키는 데 사용했던 입은 흙으로 되돌아가도, 입술의 노래는 대지에 묻히지 않으리. 내가 되돌려주어야 할 것은 고뇌를 담기 위해 태어난 두 손, 방황하기 위해 태어난 두 다리, 그리고 땅의 住民임을 표시하는 살, 언젠가는 흙으로 되돌려주어야 할 이 형벌의 뼈. 아, 아, 암흑의 관을 쓰고 땅을 기어가는 흉한 짐승처럼 고뇌하는 이마와 방황하는 긴 막대기를 지닌 이 형벌받은 살.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되돌려주어야 할 혀.”10) 밤이여 이제 출동명령을 내려라 “밤이여 이제 출동명령을 내려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11)그는 이윽고 도시를 떠났다. 깎아지른 산정에 오르기 위해서 출발했다가 그의 몸은 여전히 동숭동, 상계동의 거리를 배회했지만, 이미 그의 ‘뜨거운 얼음 속 참숯불덩이 같은 혼’은 쩡쩡한 얼음산 속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결빙의 벼랑을 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높은 정신이 머물고 있는 겨울산정, 천상의 일각에 닿으려 죽음의 절벽을 오르는 것이었다. 밤이 오면, 결빙의 절벽 위, 空山 빈 껍데기 어둠 속으로 고른 소리로 비가 내려왔다. 끝내 눈으로 산정에 머물 수 없어 추락해버린 비! 그것은 자신의 우울한 자화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 빗줄기에서 어린 날 새양철지붕 위로 쏟아지는 쇠못 같은 강인함을 읽으며, 허한 가슴을 투명한 충만으로 채우고, 다시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벼랑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득히 신기루처럼 지나온 발자국에 섞여 몇몇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다. “시는 설명이 아니고 압축시켜야 한다.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문장이며 언어다.”시인 이건청이었다. 양정고등학교 시절, 문예반 선배이자 서라벌예대 학생이었던 그에게 참 많이도 습작시를 움켜쥐고 달려갔었다. 겨울에는 파랗게 잉크병이 얼어서 그 딱딱한 잉크를 펜으로 찔러가며 시를 썼던 습작시절을 지나, 문단에 얼굴을 내민 것은 69년, 갓 스물의 나이였으니, 꽤 이른 셈이었다. 《현대시학》 9월호에 <바다>, <새>, <이 어둠의 커튼>으로 초회 추천을 받았다. 박목월 선생과 전봉건 선생의 얼굴이 안타까움과 고마움이 뒤섞인 속에 떠올랐다. 그 시절 뜻을 함께 했던 ‘육시’ 동인들, 오세영, 이건청, 이시영, 신대철, 그들은 또 어느 벼랑을 오르고 있는 것일까?‘한국문화예술진흥원’으로 오기 전에 근무했던 ‘공간’은 공부하기에 퍽 좋은 곳이었다. 건축, 환경, 미술, 음악, 연극, 무용 등 온갖 예술 장르를 접할 수 있었다. 한국 예술계에 ‘공간’의 황금시절로 기억되는 80년 전후에 ‘공간’의 실무 책임자로 근무했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예술적 심미안을 키울 수 있었던 소중한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잔인한 족적으로 쇳덩이 같은 어둠으로 버티고 있는, 몇 개의 시집들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形態》, 《詩篇》, 《虛心頌》, 《하늘이불》, 돌이켜보면, 지나온 삶이란 고운 티끌들을 곱게 적시다가 빗물로 사라져버린, 고요한 흔적뿐인 뿌우연 눈발의 스산한 자취 같은 것이었으나, 또한 삶은 강인하게 견디어내야 할 어떤 것이고 그것도 추위와 얼음 속에서 참아내야 할 어떤 것이었다. 그리고 유일한 덕성은 산봉우리의 높이와 기품과 청정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천상의 계단,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의 계단을 발견하기를 기원하면서, 스스로 지상으로는 결코 내려가 쉬지 않는 강한 영혼이고자 했다. 맑게 깨어 있는 정신과 빙벽과 한 시대의 짜라투스트라를 꿈꾸었다. 차라리 세계를 苦辭하다 枯死해버린 고치가 되길 원했다. ‘아, 버린 땅, 삭발해버린 바위산의 空寂, 그 속에서 너의 언어를 解産하라.’ 그러나, 얼마나 가파르게 올랐던가. 아니 내려갔던가? 그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캄캄한 절벽이었다.
“산맥과 산맥이 숨가쁘게 치달아 내려간 곳에 바다가 가로막고, 길은 절벽에서 끝났다. 돌아갈 길을 잃었도다. …… 발뿌리에 걸리는 돌무더기와 죽음의 신호를 보내는 黑鳥들의 울부짓음,입을 가로막는 어둠 속 낭떠러지,그대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 …… 귀는 설원 속으로 탐험을 떠나 소리치는 雪風 속에서 혼돈을 그리워하고 깨우쳤지만 발은 길을 잃었도다. 하늘에서 장닭이 훼를 치듯 태양이 세계의 門을 열기 전부터 길은 어디에 있었는가. 처음의 순간은 어디였는가”12)
벽! 우리들의 고향이고 고향으로 가는 길, 우리들 중 아무도 당도해보지 못한 밤이고 아무도 도착해보지 못한 시간!캄캄한 벼랑의 어둠 속에서의 길찾기란 갈등과 두려움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지금 원래 우리가 가야 할 길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어둠은 결국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었던 것이 아닌가? 처음의 순간은 어디였는가.’결국, 그는 스스로에게 저 먼 자신도 기억할 수 없는 맨 처음으로 되돌아가도록 명령한다. 아직 천상과 지상이 완전히 분리되기 이전, 물과 불이 서로의 강한 인력으로 끌어당기며 결빙하는 곳. 모든 것이 침묵 속에 얼어붙어 있는 곳, 우리는 그 곳에서 최초의 형태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태초의 원형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오! 불이여, 혼 속에 깃든 혼이여. 너의 함성 속에는 큰 고요가 있구나’그것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을 다시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도요, 더 크게는 태초의 원형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욕구였다.
“오랜 세월 내 幼年에 굳건히 밑둥을 내린 月桂樹나무여. 너의 밑둥은 지친 자가 명상의 처음 출발지로 삼았던 곳, 대지로부터 지상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곳을 향해 출발한 네 뿌리의 道程은 끝나지 않고, 끝도 없는 기원을 찾아 너는 헤매는구나. 오, 뿌리의 수고로움인…….너로부터 나는 방황하는 두 다리의 막대기를 부여받아 헤매왔건만 이제는 휴식을 그리워하는 것인가. 내가 일찍이 지상의 이정표로서 꽂아 놓은 물음표여!월계수나무여! 직립하는 神들의 권능이여!”13)
우리는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좌초한 인간들 이렇듯 태초의 원형을 찾아, 위대한 정신, 가장 높은 정신을 찾아,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갈증 속에서 가파르게 벼랑을 오르내렸던가. 결국 그가 도착한 곳은 산정이었다. 그러나, 그를 맞은 것은 쓸쓸한 무덤, 산정묘지뿐이었다. 인간이 천상의 가치를 강하게 추구한다 할지라도 인간인 이상에는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좌초하기 마련임을, 우리는 분명 우리에게 주어진 이와 같은 운명의 씨앗을 거부할 수 없음을 또한 절감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좌초한 인간들. 가 닿을 수 없는 높이를 강인하게 추구하다가 寒氣를 끌어 모아 서리를 뱉어내는 겨울땅에 결국은 드러눕는 인간들,”14)
그는 밤마다 산정묘지의 무덤 속에서 검은 어둠의 망토에 얼굴을 가린 王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명령했다.
“내 죽음의 진혼곡을 노래하라. 내 노래는 칠흑같이 어두운 저 밖에 몰려온 어둠 속에 검은 글씨처럼 씌어져 있다…… 지하무덤들이 물 위로 떠올라 수세기 동안 묻혀 있던 죽음의 향기를 게울 즈음 너는 지상을 향해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장중하게 내야 할 것이다. 그때 너는 귓전을 울리는 신성한 소리를 죽은 듯이 연주해야 한다. 온 누리를 닫아걸듯 죽은 듯이 연주하라. 더워서 넘치는 가슴들은 地上의 세계가 아니다. 얼음같이 식은 심장들의 세계, 닫혀진 눈과 봉인된 입들의 식어버린 세계를 죽은 듯이 연주하라.”15)
그러자, 그는 독백하듯 자신을 응시하며 말했다.
“하늘에다 누가 어둠을 불질러 놓았는가! 절망이 임종하시어 하늘의 언 창살에 갇혀 있다. …… 나는 절망이 잡수실 私食을 하늘로 올려보낸다. 거절당한다. 겨울 솜바지 한 벌 올려보낸다. 거절당한다. 시간의 소쿠리에다 흰 쌀밥 잘 지어 올려보낸다. 거절당한다. 털신 한 짝에 영치금을 넣어 올려보낸다 거절당한다. 드디어 나는 자신의 배를 째기 시작한다 간수들이 와서 막는다. 간수들은 희망의 따귀를 치기 시작한다 나는 반항한다 나는 코피를 흘리며 쇠창살에 갇힌다. 절망을 두둔한 죄 보호 은닉하려 한 죄……”16)
한 알의 검은 씨앗이 네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으니결국, 밤은 그의 옆구리를 독살했다.
“이제 그의 옆구리에 검은 장미를 심어버렸다. 밤은 피칠한 손을 냇물에다 던져버렸다. 밤은 시꺼먼 냇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이제 그의 옆구리는 꿰맨 돌의 환상을 가진다. 이제 그의 옆구리는 결박한 밧줄의 환상을 가진다. 이제 그의 옆구리는 꿰맨 자국 감쪽같은 비늘의 환상을 가진다. 그는 독살된 것이다.”17)
그는 이제 무덤 속에 있다. 뼈만으로 있다. “흙이 눈부시게 솟아올라 살을 훌훌 털어버리더군. 아 豊山은 얼마나 가벼울까. 뼈들은 얼마나 홀가분할까. 질긴 살덩이에서 놓여났으니.”18)그의 ‘가장 높은 정신’을 향한 등정은 끝을 맺어야 하는 것인가?주변을 보니, 무수한 사람들이 病者 차림을 하고 낙방을 한 채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쳐들어 뒤를 보자, 먼 신기루처럼 이미 먼저 갔던 이들의 행적이 보였다. 횔더린, 게오르크 트라클, 하이네, 구스타프 말러, 바그너, 모짜르트……오, 地上에서 일찍 거두어들인 자들이었다. 그는 절망의 음성으로 말했다.
“主여, 저는 백 번 만 번 값없나이다. 천 번 만 번 값없나이다. 날개가 없는 자가 날으려 했나이다. 가장 비천한 자가 삶의 신성함을 훔쳐내어 위로받으려 했나이다.”19) 창조주의 목소리가 그의 영혼의 귀청을 울려온 것은 그 때였다.
“‘내려가서, 절망하라. 그것이 地上의 신성함이라.’ 한 알의 검은 씨앗이 네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으니 그것을 잘 심어 네 몸 속에 입사귀가 무성하게 퍼져가면 때를 알리리라. 네 몸속의 검은 잎사귀들이 가득차 이마로 솟아나오는 날을신성의 표시로 삼으리라.
한 알의 검은 씨앗이 네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으니…….”20)
한 알의 검은 씨앗! 신이 자연에게 나누어준 위대한 정신을 지닌 씨앗, 정결한 씨앗을 꿈꾸었던 그가 인간의 영혼 속에서 발견한 것은 한 알의 검은 씨앗인 셈이었다. 그 씨앗은 절망의 예언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 알의 검은 씨앗을 지닌 인간의 노력이야말로 천상의 종을 끌어당겨 울릴 수 있는 진정한 신성함이리라.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스스로를 위대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그럴 때 우리 인간은 천상의 그것과는 또 다른 의미의 신성함을 지상에서 발견할 수 있으리라.’
위대한 정신 한 조각 들고 하산하니 이제 산정묘지로부터 내려와야 할 때가 되었다. 성취했기 때문이 아니라, 때가 저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부여받은 시간을 다 쓴 때문이었다. 그는 그 동안 자신이 등정의 연장으로 사용해온 육신과 정신을 거두어서 챙겼다. 그는 자신이 일구어낸 초라하나, 소중하디 소중한 얼음 한 조각, 위대한 정신 한 조각을 들고 처음 올라온 길을 찾아서 다시 내려왔다. 그것은 추락이었다. 처음 출발했을 때보다 더 깊고 추운 골짜기로 잊혀져가야 하는 것이었다.
“구름은 신발만 남긴 채 천길 낭떠러지로 뛰어내리고,모든 무덤들은 훗날 기억되기 위해서 더 깊고 추운 골짜기 속으로 망각되어 가리. 살아 있는 그대들 또한 잊혀져 가리. …… 그대들, 살아 있는 자들 또한 조만간 잊혀져 가리. 그토록 오랜 세월 그대를 헤매게 하고 방황하게 한 세상으로부터.”21) ‘미래의 어느 순간에 나타날 가인을 위해 아낌없이 자리를 물려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마음껏 노래부르도록 해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발을 헛딛은 자들,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우리 모두는 잊혀져야 한다.’ “잊혀져 간다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차라리 휴식. 내일의 그대들이 오늘의 나를 죽은 사람이라 부른들 나는 상관치 않으리. 왜냐하면 나는, 우리들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서 실제로 산 듯 죽었으니까. 모든 노래는 기억되기 위해 잊혀질 필요가 있지. 모든 죽음들이 다시 기억되기 위해 저 추운 골짜기를 찾아가 묻힌 것처럼 이제 잊혀져 가는 자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 자, 내일의 바람은 내일의 죽음 죽은 자여 휴식자여 안식자여! 강풍의 아들들이여! 발은 이제 어디에서 다시 시작할 것인가 미래의 그대들이여!”22)
입술의 노래는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다만 기억되기 위해 잊혀지는 것일 뿐이다.
조시인 근황은? 여전히 동숭동과 상계동 일대를 배회하는 獨樂堂! ‘獨樂堂 對月樓는 벼랑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숴버린 이.
(1996년 5월호)
--------------------- 주1) 詩 <산정묘지 1>중에서 주2) 詩 <산정묘지 1>중에서 주3) 詩 <산정묘지 2>중에서 주4) 詩 <산정묘지 3>중에서 주5) 詩 <산정묘지 4>중에서 주6) 詩 <산정묘지 5>중에서 주7) 詩 <산정묘지 7>중에서 주8) 詩 <산정묘지 9>중에서 주9) 詩 <산정묘지 10>중에서 주10) 詩 <산정묘지 11>중에서 주11) 詩 <산정묘지 12>중에서 주12) 詩 <산정묘지 13>중에서 주13) 詩 <산정묘지 17>중에서 주14) 詩 <산정묘지 19>중에서 주15) 詩 <산정묘지 25>중에서 주16) 詩 <산정묘지 26>중에서 주17) 詩 <산정묘지 27>중에서 주18) 詩 <산정묘지 28>중에서 주19) 詩 <산정묘지 29>중에서 주20) 詩 <산정묘지 29>중에서 주21) 詩 <산정묘지 30>중에서 주22) 詩 <산정묘지 30>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