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허형만

내면의 집으로 귀환하는 새

김선태

사람은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

- 파블로 네루다의 시 구절 중에서.

잡지사 측으로부터 허형만 선생님의 커버스토리를 써 달라는 전화를 받고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때 나는 무슨 일엔가 매달려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허형만 선생님 본인이 나를 지목했다는 말을 듣고 이내 수락했다.

전화를 끊고 내 서재의 유리창 너머로 일렁이는 겨울바다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허형만 선생님을 생각했다. 파도의 이맛살처럼 수많은 기억의 편린들이 부침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 기억의 온도는 결국 따스했다. 지나간 시간은 언제나 추억이라는 아름다운 이름표를 달고 있지 않던가.

허형만 선생님은 나의 대학 스승이자 까마득한 문학적 선배이다. 나는 올해로 17년째 지근 거리(대학)에서 선생님과의 인연을 쌓고 있다. 선생님 밑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배우고, 일하고 또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인연(강사)이 그것이다. 이 인연의 실마리는 내가 죽을 때까지 이어질른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분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부담이 덜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가깝기 때문에 그만큼 조심스럽고 또 글의 객관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이 선생님에 관한 객관적이고도 정밀한 분석을 피해 가기로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도 능력이려니와 다행히 커버스토리의 성격이 그러한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허형만 선생님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맨 먼저 떠오른 말은 "사람은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 한 구절이었다. 이 시구는 선생님이 평소 강의실이나 연구실 그리고 시집의 서문에서 자주 애용하던 말로서 그 분의 삶과 시를 단적으로 집약한 좌우명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실제로 선생님의 삶과 시는 이 한 마디에 행복하게 녹아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경구와 같은 말의 뜻은 무엇일까. 새도 아닌 사람이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니. 어떻게 사람이 새처럼 날 수 있다는 말인가. 처음에 나는 이 말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선생님도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말의 뜻은 내가 가까이서 선생님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자동으로 풀렸다. 그것은 부지런함·성실성·적극성의 다른 말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스스로 새처럼 날개를 달고 날아다녀야만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일 게다. 적어도 내가 파악키로는 그러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는 허형만 선생님처럼 부지런한 사람을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내가 보기에 허형만 선생님은 마치 새처럼 날개를 달고 날아다닌다. 실제로 선생님의 걸음걸이는 폭이 크고 빠르고 또 거침이 없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과 함께 걸을 때면 숨이 가쁘다. 선생님은 천천히 걷는데도 나는 숫제 달리기를 해야 겨우 그 보조를 맞춘다. 그러므로 선생님에게 그냥 걸어다닌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다.

또한 선생님은 어떠한 바람결도 능숙하게 잡아타고 어디든 날아다닌다(그렇다고 새처럼 근원적으로 자유롭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따라서 그의 활동 공간은 창공처럼 드넓고 무한하다. 나는 선생님이 어느 한 곳에만 집착하여 멈춰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어찌 선생님이라고 하여 세상의 매서운 칼바람을 맞고 아프게 쓰러진 적이 없었으리요만 그 분은 그 상처에 연연하지 않는 강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아니다. 그 상처 때문에 강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거뜬히 다시 일어서서 길을 떠난다. 한 마디로 선생님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이다.

부지런함과 성실성은 시를 쓰는 자세에서도 드러난다. 선생님은 눈코 뜰 새 없는 와중에서도 시를 생각하고 쓴다. 나를 포함해 상당수 시인들이 특별한 시간에 시를 쓰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선생님은 그러한 특별한 것에 시를 묶어두지 않는다. 그만큼 생활과 시가 한데 맞물려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 부지런함과 성실성이 50대 중반인 현재까지 자그만치 10권의 시집을 상자하게 만든 원동력이다. 그리고 선생님의 시는 간결·명쾌하면서도 의외로 꼼꼼하다. 이러한 특징은 그 시적 리듬과 시어를 다루는데 있어 잘 드러난다. 복잡하고 지리멸렬한 시는 절대 사양이다. 이는 선생님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나는 감히 어림잡는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파블로 네루다의 시구 한 마디는 허형만 선생님의 삶과 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허형만 선생님과 나와의 첫 만남은 1982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주화 열기가 뜨겁던 당시 대학 3학년이던 나는 학보사 편집장을 맡아 세상의 고민이란 고민은 혼자 뒤집어쓴 몰골을 하고 있었다. 학보를 만든답시고 학과며 학점을 거의 무시한 채 제멋대로였다. 게다가 「풀잎」이라는 문학동인회를 만들어 날이면 날마다 선술집을 전전하며 핏대를 올리고 있었다(이 문학써클은 아직도 건재하다). 그때 우리가 시내 술집 곳곳에서 거꾸러뜨린 보해소주병을 합하면 자그마한 산을 이루고도 남으리라. 그런데 그때 그야말로 땡전 한 푼 없는 작자들의 술값을 든든하게 책임져 준 것이 학보사였으며(그들은 고정 필진이나 다름없었다), 황량한 캠퍼스에서 갈 곳 없는 그들의 아지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도 학보사였다. 그리고 나는 그 악동 일파의 실제적인 우두머리였다.

그때 편집국장으로 부임한 사람이 허형만 시인이었다(여기서부터는 당시의 호칭을 혼용할 것임을 밝힌다). 편집국장은 학보사의 실무를 관장하는 행정 조교였다. 허 시인은 기다란 코트깃을 세우고 바람처럼 우리 앞에 나타났다. 부임하기 전 주간교수님으로부터 '반체제 시인'이라는 귀띔을 받은 바 있는 우리 앞에 후리후리한 키에 깡마른 몸매 그리고 긴 생머리 속에 날카로운 눈빛을 숨기고 악수를 청하는 허 시인의 첫 인상은 참으로 강렬했다. 말로만 들었지 그때까지 실제로 '시인'을 만나본 적이 없었던 나는 속으로 '아, 저렇게 생긴 사람이 시인이구나' 생각하고 이후 허 시인을 우상처럼 따랐다.

그러나 실제 학보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다소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는 나도 나중에 편집국장이 되어 절실하게 느꼈던 바이지만, 당시 허 국장님의 직무상으로 보아 불가피한 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내가 허 국장님께 범했던 결례 몇 점이 아직 남아 죄송스럽기 그지없다. 좋게 보면 젊음의 패기요 나쁘게 보면 치기에 불과했을 당시를 돌이켜 생각하노라면 지금도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래서 멋모르고 날뛰던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던가.

허형만 선생님은 천성이 다정다감하고 자상한 분이다. 다음은 학보사 시절 선생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한 토막이다.

당시 편집장인 나를 포함한 학생 기자들은 학보사가 집이나 다름없었다. 학보를 만들러 올라가기 전인 며칠 동안은 기사를 쓰거나 편집을 하는 일로 날밤을 꼬박 세우기 일쑤였다. 특히 나는 당시 양을산 기슭 철거민 촌에 열 달에 5만원 하는 사글세방을 얻어 살벌한(?)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멀기도 하거니와 늘상 연탄불이 꺼진 지 오래여서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학보사에서 밥을 해먹거나 굶거나 했는데, 빈속에다가 술만 들이부으니 건강이 말씀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가 야근을 하는 동안만큼은 별로 걱정이 없었다. 허 국장님이 사모님과 함께 손수 솥에다가 라면을 끓여 가져다주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 꿀맛 같은 라면과 반찬들을 먹기 위해서 일부러 야근하는 일도 많았다. 뿐만이 아니다. 학보가 만들어져 나오기까지는 허 국장님의 집을 들락날락하기 일쑤여서 그곳이 아연 식당이나 여관처럼 여겨졌다. 그때 대식구의 식탁을 차리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으셨던 사모님의 넉넉한 따스함을 잊을 수 없다.

그 후 허형만 선생님은 국문학과 전임강사 겸 학보사 주간으로 발령을 받았고,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그 분의 뒤를 이어 편집국장이 되었다. 또한 선생님은 그때부터 지금은 중앙대 문창과로 적을 옮긴 소설가 이동하 선생님과 함께 문학써클의 지도교수를 맡아 그 가슴 시리던 날들을 악동들과 함께 했다.

이렇듯 선생님과 나는 지금까지 참으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중간에 생략된 이야기를 하자면 지면 관계상 한이 없을 것 같아 선생님과 나와의 사적인 인연은 이쯤에서 그만 접을까 한다. 다만 한 가지 호칭이 여러 번 바뀐 이야기를 덧붙인다. 나는 그간 허형만 선생님을 국장님·주간님·학과장님·학장님으로 불러왔다. 그러나 선생님은 아직도 변함없이 나를 '선태야'라고 부른다. 정겨움이 묻어나는 표시이다. 나는 마흔이 된 지금도 선생님 앞에서는 어린 학생이다.

올해로 시력(詩歷) 28년째를 맞고 있는 허형만 선생님은 70년대를 대표하는 중견시인 중 한 사람이다. 선생님의 연보를 보고 있노라면 그 특유의 부지런하고 다양한 족적이 그대로 찍혀 있어 흥미롭다.

허형만 선생님은 1945년(해방둥이) 전남 순천에서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 때부터 문예부장을 맡는 등 문학에 관심을 보인 선생님은 고교 시절과 대학 시절엔 문학 동인회를 결성하고 중대신문 현상문예에 시가 당선되는 등 활발한 습작기를 거친다. 특히 선생님은 고등학교 때 만난 문병란 시인과 대학교 때 만난 조병화·김현승 시인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1973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가 입상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시단에 나온 선생님은 1978년 첫 시집 『청명』을 발간한다. 1979년 광주에서 강인한·고정희·국효문·김종 등과 「목요시」 동인회를 결성한 선생님은 이어 「원탁시」 동인회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인 시단 활동을 벌인다. 이 중 「목요시」 동인회는 서울의 「반시」 동인회, 대구의 「자유시」 동인회 등과 더불어 1980년대 동인지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선두 주자 역할을 담당함을 물론, 광주의 「5월시」 동인회를 탄생시키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1984년 제2시집 『풀잎이 하나님에게』를 발간한 선생님은 창작과비평사의 17인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참여함으로써 시단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1985년 제3시집 『모기장을 걷는다』를 비롯 1987년 제4시집 『입맞추기』, 1988년 제5시집 『공초』와 제6시집 『이 어둠 속에 쭈그려 앉아』, 1993년 제8시집(시선집) 『새벽』, 1995년 제9시집 『풀무치는 무기가 없다』 그리고 1999년 제10시집 『비 잠시 그친 뒤』에 이르기까지 모두 10권의 시집을 지속적으로 펴냄으로써 중견시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한다. 시집 이외에도 선생님은 수필집 『오매, 달이 뜨는구나』(1987), 평론집 『시와 역사인식』(1988), 저서 『우리시와 종교사상』(1990), 연구서 『영랑 김윤식 연구』를 상자 함으로써 학자로서도 손색이 없는 면모를 갖춘다.

그 동안 선생님은 소파문학상(1979)·전남문학상(1984)·평화문학상(1990)·전라남도문화상(1990)·한국크린스챤문협상(1991)·우리문학작품상(1992)·편운문학상(1994) 등 7개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작 활동 이외에도 목포에 거주하는 동안 목포를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목포문학의 발전과 후진 양성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으며, <우리문학기림회 회원>의 회원으로 수많은 작고 문인들의 문학비를 세우는 등 그 활동 경력이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한편 허형만 선생님의 직장 생활은 교직으로 일관되어 있다. 1973년 학다리고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약 8년간 고등학교에 몸담았던 선생님은 1984년에 대학으로 옮겨 목포대학교 국문학과 전임강사로 임용된다. 이후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인문대학장을 지내는 등 대학교수 생활 16년째를 맞고 있는 선생님은 현재 계간 『시와사람』 편집인을 맡고 있다.

허형만 선생님의 시세계를 이 글을 통해 본격 논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서두에서 이야기한대로 그 분의 시세계에 대한 정밀한 논의나 분석을 피해가기로 한다. 시집 10권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을 한꺼번에 논의할 시간도 없으려니와 또 그럴 능력도 없다. 그렇다고 아예 논의조차를 피해갈 수는 없으므로 가볍게나마 시세계의 변모 과정만을 약식으로 살펴볼까 한다.

지금까지 허형만 선생님의 시세계에 대한 논의는 지엽적인 선에서 그치고 있다. 말하자면 시세계를 총체적 또는 종합적으로 조명한 경우가 지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더구나 첫 시집인 『청명』에 관한 언급이나 시세계의 변모 과정을 구획·정리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의 시적 변모 과정을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구획해 본다.

첫째, 1973년 등단 무렵부터 첫 시집 『청명』이 출간된 1978년까지 쓰여진 시를 초기시로 본다. 이때에 쓰여진 시들은 주로 개인적인 순수 서정시에 가깝다. 둘째, 「목요시」 동인으로 활동하던 1979년부터 제9시집인 『풀무치는 무기가 없다』를 펴낸 1995년까지를 중기시로 본다. 전체적으로 보아 몸통에 해당하는 이 시기의 시들은 소위 '진솔한 삶의 역사와 향토적 서정'으로 한꺼번에 수렴될 수 있는 것들이다. 셋째, 1996년부터 제10시집 『비 잠시 그친 뒤』를 펴낸 1999년 현재까지를 후기시로 볼 수 있다(물론 앞으로 쓰여질 시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때의 시들은 그 이전의 시들과는 달리 내면의 깊이와 고요를 획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극명하게 구분된다.

이러한 시기 구분은 물론 다소 무리가 있긴 하지만 뚜렷한 시세계의 변모 양상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면 이에 준거하여 선생님의 시세계의 흐름을 가볍게 따라가 보기로 한다.

습작기를 포함 등단 초기에 쓰여진 초기시들은 그 편수가 얼마 안될 뿐더러 지금껏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되다시피 한 것이 사실이지만 내가 보기엔 허형만 선생님의 시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들이 모두 들어 있다. 굳이 지적하자면 맑고 섬세한 감성·투박한 향토성과 전통성·간결한 언어와 가락 등이 그것이다. 다만 노래의 대상이 아직은 내 안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밖으로 뛰쳐나오는 중기시와는 분명하게 다르다.

『청명』은 제목처럼 맑고 투명한 시집이다. 나는 여기에 실린 49편의 시를 읽으면서 선생님이 얼마나 섬세하고 여린 감성의 소유자인가를 발견한다. 주로 80년대 이후의 시를 통해 날카롭고 강렬한 인상과 목소리만을 기억하고 있던 나로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본바탕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또 사람에 대한 선입감이 얼마나 큰 판단의 오류를 불러올 수 있는가도 깨닫는다.

허형만 선생님의 초기시들은 주로 전통성에 기대고 있다. 이는 선생님의 시가 전통적 발상법을 충실히 따르는 데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선생님은 습작기에 문병란·조병화·김현승 시인으로부터 시를 배워 그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실제 시에서는 서정주·박재삼 시인의 시풍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 이는 초기에 선생님이 우리 고전적 숨결과 그 아름다움을 많이 탐닉한 데서 기인한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시어의 선택이나 가락의 조율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또 이를 기질과 관련하여 생각해 본다면 선생님은 천부적으로 선비의 기질을 타고난 분이다.

빈 손으로 왔어요.

다홍 치마 저고리

버선발로 달빛 밟고

옷고름 매며 뛰어 왔어요.

초롱불은 끄기로 해요.

차마 옷고름이 풀리지 않는군요.

한 줄기 설움으로 올을 내어

열 두 겹겹 감싼 속살인걸요.

포옥 안아 주세요.

그리고 炯炯한 幽界의

가장 낮으막한 목소리로

불러 주세요.

내 이름은 新婦,

우주의 꽃잎으로 불태우던

아, 내 소원

新婦.

불은 꺼졌으나

九天 하늘 어둡지 않으니

늘 어둠다히 밝게 살아

가진 거 없으나, 우리

빈 몸이 곧 가득한,

내일 아침에도 新行 길.

빈 손으로 떠나기로 해요,

눈 감으세요.

이제사 비로소

저를 재우세요,

바람으로 살래요.

빛살로 살래요.

- 「예맞이」 전문(첫시집 『청명』에서).

'어느 소년소녀의 영혼 결혼식에'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작품은 선생님의 데뷔작이다. 신부의 어투를 빌어 쓴 이 시는 서정주의 「춘향유문」이나 「신부」를 연상케 한다. 이 시에 등장하는 화자는 이승에서 사랑을 맺지 못했거나 꽃다운 나이에 결혼도 하지 못하고 죽은 서러운 넋이다. 따라서 밑바닥에 깔려 있는 정서는 우리의 전통정서를 대표하는 한(恨)이다. 그러나 그 한은 서러움이나 눈물 따위가 밖으로 철철 넘쳐나는 그런 퇴영적 한이 아니다. 그 처연한 슬픔은 놀랍게도 안으로 잘 승화되어 결코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애이불비(哀而不悲)의 미학'이라 함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따라서 "幽界의" 언어로 쓴 듯한 이 상처 입은 넋을 위한 추도사는 우리에게 섬뜩하리 만치 투명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이 시는 앞서 지적한 전통적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첫째는 제목부터가 고전적인 이미지가 물씬 풍긴다. 두 번째는 여성적인 화자를 내세움으로써 간절한 호소력을 자아낸다. 세 번째는 내용 자체가 우리 전통 정서인 한을 형상화하고 있다. 네 번째는 리듬 자체도 전통적인 가락에 기대어 간결한 호흡으로 넘어간다. 다섯 번째는 "다홍 치마 저고리"·"버선발"·"옷고름"·"초롱불"·"九天"·"어둠다히" 등 고풍스런 시어들이 다수 동원되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 요소들은 비단 이 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는 "하마 핏물질가/아롱디리 우닐세라/이처럼 고요론 숨결로…"(「봄 그리운 이에의 시」)를 비롯한 초기시 대부분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특히 전통적 가락에 기반을 둔 짧고 간결한 호흡법은 선생님의 중기시나 후기시에서도 그대로 붙박혀 있다. 이렇게 볼 때 허형만 선생님은 간결하고, 단아한 시풍이 호흡이 긴 시풍에 비해 체질적으로 어울리는 시인이다. 물론 초기시 중에는 「전라도 안개」·「학다리 마을」 등 투박한 향토성을 드러내거나 「유치원에서」·「이슬」·「창」 등 이미지 연습을 위주로 한 시들이 혼재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중심을 관류하고 있는 것은 고전적 시학 또는 전통적 시학이라고 본다. 따라서 나는 허형만 선생님의 시적 근원이나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명』에 실린 초기시를 무시하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감히 단언한다. 젊은 날의 상처가 석류알처럼 알알이 박혀 진한 속울음을 피워내고 있는 첫 시집 『청명』은 내가 보기엔 매우 아름다운 시집이다.

1979년 「목요시」를 결성하고 그 동인으로 활동하면서부터 허형만 선생님의 시세계에는 일대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특히 1980년 벽두의 5·18 광주민중항쟁을 기점으로 거세게 몰아닥친 민주화의 열풍은 선생님을 비롯한 이땅의 젊은 시인들에게 '시란 무엇인가', '시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자문하도록 만든다. 그 자문의 결과 선생님의 시적 자아는 초기 내면의 집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오게 된다. 시적 화자 또한 '나'에서 '우리'로의 전환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 뛰쳐나온 시적 자아는 이후 1995년까지 16년 동안 거친 역사의 광장에서 '진솔한 삶의 역사와 향토적 서정'을 일관되게 노래한다. 따라서 중기시로 묶을 수 있는 것들이 『풀잎이 하느님에게』(1984)·『모기장을 걷는다』(1985)·『입맞추기』(1987)·『이 어둠 속에 쭈그려 앉아』(1988)·『공초』(1989)·『진달래 산천』(1991)·『풀무치는 무기가 없다』(1995) 등 7권의 시집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우리의 이파리를 꺾이지 않게 하시며

당신의 이름을 위해 우리를 지키소서

야훼, 우리 하느님

태풍이 몰아쳐도 뿌리 뽑히지 않게 하시고

들불이 번져와도 타지 않게 하소서

비록 어둠 속에서도 두 눈 크게 뜨게 하시며

나팔을 높이 불어 쓰러진 동족을 일으키소서

우리의 햇살을 전과 같이 함께 하게 하시고

우리의 새들도 처음처럼 돌려보내 주소서

짓밟는 자에게 생명의 귀함을 일깨워 주시고

낫질하는 자의 낫은 녹슬게 하소서

야훼, 우리 하느님

우리의 땅은 더욱 기름지게 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버러지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우리의 뿌리는 더욱 깊이 뻗게 하시며

우리의 하늘은 더욱 푸르르게 하소서

- 「풀잎이 하느님에게」 전문(두 번째 시집 『풀잎하느님에게』에서).

민중적 상상력과 기독교적 상상력이 한데 어우러져 간절한 기도가 되고 있는 이 시는 허형만 선생님의 중기시를 대표할만한 수작이다. 초기시 일부에서 가느다란 발성의 싹을 보인 역사의식이 이 시에 오면 커다란 목소리 또는 외침으로 바뀌고 있음을 본다. 간절한 기도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이 시의 육성은 마음속으로나 읊조리는 정도의 그런 소박한 기도가 아니다. 기도 속에 날선 비수를 감추고 있는 이 시는 따라서 탄원하듯 함께 부르짖어야 제맛이 나는 절규에 가깝다. "낫질하는 자의 낫은 녹슬게 하소서", "우리의 영혼을 버러지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같은 구절이 그 비수에 해당한다. 그 낫질하는 자나 버러지가 누구이겠는가.

나는 실제로 선생님이 이 시를 낭송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으레히 남들처럼 선생님이 단상에 올라 기도하듯 이 시를 낭송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예상은 전혀 빗나갔다. 느닷없이 청중 속에서 튀어나온 선생님은 단상에도 오르지 않고 원고도 없이 이 시를 절규하듯 큰소리로 낭송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성난 호랑이의 우렁찬 포효와 같았다. 좌중을 완전히 사로잡아 정신을 번쩍 들게 하던 선생님의 낭송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이 시의 진정한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비로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허형만 선생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나는 선생님이 어디에서고 기도하는 모습을 흔히 본다. 그래서 선생님의 시에는 기도조가 상당히 많다. 제5시집인 『이 어둠 속에 쭈그려 앉아』(1988)의 시 전편이 바로 이러한 투철한 역사의식을 담은 기도시이다. 그리고 선생님의 기도시는 그냥 기도시가 아니다. 다음 시를 보자.

세상을 살다보면/숨 죽여 작은 소리로는/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세상을 살다보면 /조용히 홀로 있는 작은 소리는/언제나 신음에 불과할 뿐//목소리도 크게/발소리도 크게/몸짓도 눈짓도 크게 크게/그래야 사는 세상 속에서//세상을 살다보면 /침 넘어가는 작은 소리 정도는/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

- 「큰소리」(일곱 번째 시집 『진달래 산천』에서).

80년대는 어쩌면 큰소리가 요청되던 시대였는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싸움의 문학, 현장의 문학, 저항의 문학을 표방한 시가 "침 넘어가는 작은 소리"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통하겠는가. 따라서 이 시에서 주장하는 논리는 당연한 시대적 요청이요, "큰소리"는 선생님의 의도적인 시적 전략으로도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기도마저도 큰소리로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선생님의 중기시 중에서 역사의식을 담고 있거나 저항시적 요소가 강한 시들은 모두가 "큰소리"이다.

하지만 큰소리도 실천을 담보로 하지 못할 때 허망해진다. 또 사람의 감정이나 선호도는 아주 약은 것이어서 똑같은 패턴이 지속되면 빨리 실증을 내고 돌아서고 만다. 그래서 방법론적인 전환이 필요한 것일 터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그 당시에 제자이자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선생님의 큰소리가 너무 오래 지속되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이렇게 말해도 선생님은 너그러이 용서하시리라).

손님이 와도 짖지 않는 개는/개가 아니다/잡상인이 와도 짖지 않는 개는/개가 아니다/더더욱 도둑을 보고도 꼬리치는 개는/개가 아니다//어느날 대낮에 도둑을 맞고/개 한 마리 얻어 왔다/짖지 않는 개/눈치만 보는 개/개가 개이기를 포기하는/그 개를 보며 자문했다//- 왜 컹컹컹 짖지 못할까?/- 무엇이 목청껏 짖지 못하게 할까?/- 무엇 때문에 시원스럽게 짖을 수 없을까?/- 왜? 어째서? 왜? 어째서?

- 「개로 인하여 - 供草 4」(여섯 번째 시집 『供草』에서).

이 시는 모순을 보고도 말을 못하거나 방관하는 자의 비겁함을 개를 통해서 강하게 질타하고 있다. "손님이 와도", "잡상인이 와도" 짖지 않는 개는 "개가 아니다". 더구나 "도둑을 보고도 꼬리치는 개", "눈치만 보는 개"는 "개이기를 포기하는" 개다. 그 개는 불행하게 목울대가 거세된 개도 아니요, 제 정신이 아닌 미친 개도 아니다. 그럼에도 짖지 않는 개는 차라리 미친 개보다 못한 개다. 그것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속으로만 신음하던 지난 연대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 개의 부류 속에는 허형만 선생님 자신도 포함된다. 그래서 "왜? 어째서?"라고 고통스럽게 자문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 질문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아니 질문조차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큰소리"를 표방하며 "목청껏" 짖고 싶었던 선생님도 이 실천의 문제 앞에서는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시는 자신의 비겁함까지를 진솔하게 드러내는 양심적이고도 통렬한 자기 반성으로 읽힌다.

오늘도 출근하기 전에 아들놈

껴안고 입맞추기 아랫도리 벗기고

엉덩이랑 똥구멍까지에도 입맞추기

일기예보는 청명 출근길은 정상

기분상태 양호 아직도 풀잎은 초록

전봇대도 가로수도 품안 가득 품고

입맞추기 길바닥에 널린

달래 보리 풋나물에도 입맞추기

우리네 위대한 황토땅에도(교황성하처럼근엄하게는말고)

으스러지게

입맞추기 사람이라면 사람 누구나

그것이 비록 북풍이거나 창칼이거나

아님 시래기국이거나 라면일지라도

사람으로 치고 입맞추기

- 「입맞추기」 부분(네 번째 시집 『입맞추기』에서).

이 시는 「풀잎이 하느님에게」와 함께 선생님의 중기시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제목을 달리 바꾸라 한다면 「사랑법」이라 해도 좋을 만큼 이 시는 사랑을 토대로 시를 쓰는 허형만 선생님의 시학이 한꺼번에 들어 있다. 그가 이야기하는 사랑의 실체가 무엇인가도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음을 본다.

또한 이 시는 아름답다는 뜻이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대개 겉으로만 번드르르한 것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잘 모르는 소치이다. 그것은 마치 외모만 화려한 여자를 아름다운 여자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만약에 미의식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 시를 쓰려고 한다면 나는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말리고 싶다.

허형만 선생님의 시적 관심 또는 사랑의 대상은 무슨 특별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있다. 아니다. 오히려 귀하고, 잘나고, 화려하고, 깨끗한 것들보다는 천하고, 못나고, 볼품없고, 더러운 것에 있다. 선생님은 사람의 몸뚱아리 중 가장 더러운 부위인 "똥구멍"에 입맞추고, 생명이 없는 "전봇대"에도 입맞추고, 하잘 것 없는 "달래 보리 풋나물"에도 입맞추고, 팍팍하고도 서러운 "황토땅"에도 입맞춘다. 뿐만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나를 고난에 빠뜨리고 죽일 수도 있는 "북풍이거나 창칼"이라도 입맞추고, 못난 "시래기국이나 라면일지라도" 기꺼이 입맞춘다. 그것도 "뜨겁게 뜨겁게", "온몸으로 온몸으로" 그리고 "땀 흘리며 햇살로 희망으로" 입맞춘다. 이는 무엇이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이고, 어떻게 해야 자신의 시가 구원의 손길이 될 수 있는가를 절실히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아름답다는 말은 이럴 때 써야 어울리는 표현이다.

이렇듯 허형만 선생님의 중기시는 시집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크게 보아 '진솔한 삶의 역사와 향토적 서정'으로 수렴된다. 달리 말해 '나'라는 초기시의 협소한 공간에서 '우리'라는 세상의 드넓은 광장으로 걸어나와 그것을 오래도록 진솔하게 껴안고 또 부대꼈던 모습을 노래한 것이 중기시라 할 것이다.

그러나 허형만 선생님은 제9시집인 『풀무치는 무기가 없다』(1995)를 펴낸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시쓰기와 발표를 삼가는 공백기를 갖는다. 이 공백기는 선생님 스스로 진중한 시적 변모를 꾀하기 위해 웅크린 기간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4년 후인 최근에 펴낸 시집이 『비 잠시 그친 뒤』(1999)이다. 따라서 이 시집은 그 공백기가 탄생시킨 결과물이다.

이 시집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이전의 시집들과는 성격을 달리 한다. 첫째, 시적 관심사가 치열한 현실의 전면에서 일상과 자연으로 한 발짝 물러나 있다는 점. 둘째, 대상을 보는 눈이 깊어지고, 목소리 또한 고요해지고 있다는 점. 셋째, 직설적인 진술보다는 말을 최대한 아낌으로써 절제된 표현미를 획득하고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는 50대 중반이라는 선생님의 연륜의 깊이와도 비례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달라진 시대적 상황과 급변하는 문학의 흐름을 감지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받아들여진다. 사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선생님의 이러한 시적 변모를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면서 긍정적으로 평가해 마지않는다.

그러면 허형만 선생님의 이러한 시적 변모의 계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살아온 날보다/살아갈 날이 훨씬 짧아졌구나/천상의 모든 생명들이/서둘러 흙으로 돌아오고 있구나"(「처서」 일부)라는 시구에서 알 수 있듯이 지천명의 나이에 대한 자각과 성찰에서 비롯된다. 당연히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선생님은 어느덧 인생의 가을을 맞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 멀고 험난한 세상을 떠돌던 한 마리 새가 이제 본연의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허형만 선생님의 시는 이제 가을이다. 가을이 어떤 계절이던가. 가을이 되면 햇빛부터가 그 음색이 다르지 않던가. 만물의 눈빛과 소리가 그윽하게 깊어지는 계절. 하여, 가을밤을 우는 한낱 쓰르라미나 귀뚜라미 소리마저도 그만큼 깊고 정밀하여서 멀리서 울어도 가까이 들린다. 여름내 푸르던 가을들판도 스스로 변색하여 무겁게 출렁인다.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 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들판을 거닐며

겨울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 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 「겨울 들판을 거닐며」(열 번째 시집 『비 잠시 그친 뒤』에서).

열 번째 시집에서 단연 돋보이는 이 시는 대상을 바라보는 성찰의 깊이가 빛나는 작품이다. 직설적인 목소리 위주였던 중기시와는 그 표현의 깊이가 현저하게 다르다. 사물의 본질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현현시키는 성찰의 깊이, 더구나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겨울들판에서 이토록 많은 의미를 건져 올리고 있는 성찰의 깊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멀리서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겨울 들판을 거닐며" 가까이 다가서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러기 전에는 무엇이 어떨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하는 자기 반성과 깨달음이 동반됐기 때문이다. 이 반성과 깨달음을 가능케 하는 근원은 당연히 오랜 삶의 경험에서 터득한 지혜와 비로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에 있다.

그래서 겨울 들판은 황량하고 살벌한 죽음의 들판이 아니다. 그것은 외양과는 달리 새로운 봄을 기다리는 생명들이 안식을 취하면서 꿈틀거리는 희망의 들판인 것이다. 살벌한 겨울 들판은 이 시로 하여 다시 따스하게 태어난다. 그것이 겨울 들판의 본질이다.

내가 보기엔 허형만 선생님의 시는 열 번째 시집을 계기로 분명 다시 태어났다. 앞으로 우리 시단은 선생님의 시를 새로운 눈으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쓰다 보니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끝으로 부디 선생님의 시세계가 이순으로 갈수록 더욱 고요하고 심원하여져서 만물의 본질을 그득 품에 안을 수 있기를 삼가 소망한다. 그리고 허형만 선생님은 따스한 사람이라는 말을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