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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홍신선
체험에서 우러난 정신의 해방 ― 선비정신, 그리고 溫氣 읽기
·김강태
홍신선 시인께 인사할 겨를도 없이 이번 탐방 기사는 우울한 이야기부터 해야겠습니다. 가끔 만나서 얘기 나누고 불콰히 젖다가 갑자기 지면에서 엄숙히(?) 대면하려니 어색하기 그지 없네요. 홍 시인님, 아니 신선이 형! 그동안의 안부를 살피기가 낯부끄럽습니다. 허망하게도, 형이 졸지에 친제親弟를 잃는 횡액을 당하고 잠시 황망한 사이 삼우제가 끝나기도 무섭게 허겁지겁, 이런 만남에 응해줘서 고맙기만 합니다. 그러고 보니 올해 들어 지인 정의홍 시인(대전대 국문과 교수)과 영원히 헤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아우마저 떠났으니, 여기 남은 사람들은 그저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그러나 형은 동생 일을 아무에게도 끝까지 알리지 않았지요. 주위에 그 점을 서운해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요, 형의 전형적인 내밀한 성격 탓이라고. ‘추석엔 다 내려왔다. 어디선가 기별도 없이 못 오는 아우./오는 길도 기다림도 다 치우고/고만고만 쭈그리고 앉아 큰방에서 茶禮를 기다렸다./눈이 작아 겁이 없던 아우를/깊은 어둠 속에 잘 숨던 그’(<秋夕날>)라는 구절이 눈에 들던데 형, 혹시 제2시집 《겨울섬》(평민사, 1979)에 등장하는 시적 자아인 ‘아우’가 ‘그’가 아닌지요. 이제는 ‘깊은 어둠 속에 잘 숨던 그를’ 만날 수 없게 된 지금, 형이 ‘어디선가 기별도 없이 못 오는 아우’의 죽음을 이미 예견했던 건 아닌가요…. 이제부터 형이 ‘고만고만 쭈그리고 앉아 큰방에서 茶禮를 기다’릴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기만 합니다. 더구나 장의 예식을 치르면서 내내 당신의 아버님 때문에 한이 더욱 맺혔다구요. 몇 년째 치매증으로 고생하신다던데. 실상 형을 만나기 직전, <혼자 부르는 이름 하나>라는 시와 작품 <치매> 및 감태준 시인의 해설(《좋은 詩 95》, 삶과꿈, 1995)을 읽었지요. 끄트머리 ‘홍신선을 보고 싶다’에서 감 시인의 후덕한 정이 넘치더군요.
아버지 속의 생판 다른 아버지가 기웃이 내다보며 물었다. 니가 누구냐/어머니가 울고/막내딸이 부엌 구석에서 눈가를 찍었다. ― 홍신선, <치매> 부분
헤밍웨이와 川端康成은 치매증상이 오기 전에 자살을 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인은 ‘내 안에서 웃는 누군가의 웃음에 온몸이 흔들린다’고 말한다.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치매와 관련시킬 때 자아 속에는 또다른 자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홍신선을 보고 싶다. ― 감태준, <치매> ‘해설’ 부분
응, 나 미칠 뻔 했어. 아버님이 말야, 동생 죽음 때문에 집이 시끌하니까, 내게 물으시는 거야. 얘, 집에 무슨 일이 났냐아? 예, 아버님. 둘째가 죽었어요, 둘째가. 무어? …그거 참 안 됐구나. 그러다가 3분도 안 되서 또 물으시는 거 있지. 얘야, 무슨 일이 있냐아? …. 그래애? 그거 참 안 됐구나아. 신선이 형, 늦은 시간까지 우린 신촌 어느 집에선가 아무 말 없이 잔을 들이켰지요. 나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 자리가 몇 차였던가요. 그때 나는 가신 엄니를 생각했습니다. 문학이라곤 전혀 모르는 분이 아들 자취방에 오시면, 내가 버린 원고지를 빠짐없이 다림질해 차곡차곡 챙겨놓으시던 어머니. 꼭 9년 이상을 뇌졸중으로 몸부림치다가 홀연히 떠나셨지요. 엄니의 굳은 뼈마디를 다림질해 드리겠다며 그렇게도 다짐했는데―. 벌써 ‘88년도의 일입니다. 모처럼 그 날은 형의 다스한, 깊고 무거운 정감을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요, 형은 항상 내면에 온정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한 가지, 형의 시집을 일독하며 얻은 착상은 ’70년대에서 80년대 중반까지 당신의 시를 기억해주는 이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입니다.
외마디論 얼마 전 일입니다. 형과 인터뷰를 약속하고 나서 저간의 사정으로 인해 여러모로 열불나서 책을 꺼냈지요. ‘카프카론’(들뢰즈·가타리 공저, 조한경 역, 문학과지성사, 1992)인 <소수집단의 문학을 위하여>. (나야 뭐, 문자깨나 있듯이 겁없이 혀 놀려댄 걸 들통난 지 오래지만.) 프란쯔 카프카. 지적인, 퀭한 눈동자. …우리가 모두 한번쯤은 미쳤던 남자 카프카. 그에게 코믹하고 희열에 찬 구석이 있었다니 참 놀랍지요? 그의 소설 구성 요소 중에 ‘어두운 경구, 경건한 잠언 형태의 텍스트들’이 있다는 지적(81쪽)도. 형의 겉 이미지와는 전혀 상반된 그를 역설적으로 발견하는 동시에 나는 매천梅泉 황현黃玹 선생(허경진 역, 《목숨을 끊으며》, 동천사, 1985)을 떠올렸습니다. 화급한 판단으로 형에게서 이 둘을 읽었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 발상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현실적 독서 체험의 소산이지요. 들뢰즈 등이 카프카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밝힌 ‘외마디론’(16쪽)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 카프카에 대한 기술이 형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면.
카프카의 흥미를 끄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파멸’과 관계를 맺는 밀도 높은 소리의 순수 질료이다. 그것은 탈영토화된 음악적 소리이며, 의미화·작곡·노래·말을 피해가는 외마디이며, 지나치게 의미화된 연결의 고리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파열음이다. 전체적으로 단조롭고 의미 없는 소리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밀도(密度)이다. (밑금:글쓴이) 마치 에드바르트 뭉크의 그림 <절규>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지만, 제5시집 《黃砂바람 속에서》(문지, 1996)에서 형만의 ‘외마디’를 접합니다. 형이 1965년 《시문학》으로 등단한 뒤, 시각적 언어를 차용한 언어 구사가 뛰어난 이번 시집은 단박에 형의 위치를 새삼 인식케 해준 귀한 산물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어찌 보면 신선 형에 대한 ‘외마디론’은 순전히 카프카를 단적으로 지적한 들뢰즈·가타리 제씨와 나를 위해 번역해준(?) 조한경 교수 덕택이네요. (그가 번역한 죠르쥬 바따이유의 《에로티즘》도 신선하게 읽었습니다. 이성적 인간이 되기란 그만큼 어려운가 보죠.) 형의 독특한 감성성과 인간적 이성성이 돋보이는 이번 시집은 오랜 만에 후배들에게 내적인 즐거움을 준 역작입니다.
낡은 마을/설거지 끝낸 집들은 온종일 나가 떠돌던 畜生들/워어리워어리 불러들이고 눌은 밥 주고/대문 지치고 돌아선/내 등짝/가벼이 가벼이 치는아직도 잰 걸음으로 울며 떠다니는 顔面마다 밝기 최대한 올리고 떠다니는/싸락눈 (<마음經 9> 부분) 울 뒤 텃밭의 쑥갓과 상추들이/새카맣게 마른/똥덩이 사이에서싱싱하다 두루마기 벗고 선/동저고리 바람의 몇 줄/조선 기개들. 점심에는 몇 움큼 뜯어다/무심히/적막강산을 싸서/쌈을 먹는다. 죽음과 삶이 본디 그렇게 가깝다. (<距離> 전문)
전자는 시인의 ‘심법 읽기’라고 생각합니다. ‘온종일 나가 떠돌던 畜生들/워어리워어리 불러들이’는 시인의 심성이 <싸락눈>으로 형상화했네요. 따뜻한 싸락눈? 후자는 ‘조선 기개들’이 돋보이는군요. 이를 ‘몇 움큼 뜯어다/무심히/적막강산을 싸서/쌈을 먹는’ 시적 자아의 행위는 가히 눈물겨울 정도로 푸근합니다. ‘새카맣게 마른/똥덩이 사이’의 ‘쑥갓과 상추’에서 ‘조선 기개들’을 발견하는 시인의 눈을 보세요. 마지막 구절이 본색을 드러내서 좀 걸리지만 전편을 흐르는 묘사력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왜 ‘죽음과 삶’의 거리를 생각했을까. 이것도 형의 또다른 ‘외마디’인가요. 카프카에게 다각적으로 출몰한다는 ‘외마디’는 지은이들의 말대로 ‘밀도 높은 소리의 순수 질료’이며 ‘지나치게 의미화된 연결의 고리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파열음’으로 충분히 이해하지만, 이를 형의 작품에 전이시켜 생각할 참입니다. ‘황사’란 회오리일 것이요, 나아가 8, 90년대의 혼란한 시대 상황과도 맞물려 있을 것. 블랙 홀과도 같은 혼돈기, 이 시대를 형은 누런 바람으로 몰아칠 태세를 갖춰서 믿음직하지만, 한편 그 바람 속에서 오랫동안 칩거한 채 무엇을 했는지 엄중히 되묻고 싶습니다. 원래 과작寡作이지요, 형은. 난 그러나 당신을 게으름뱅이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아래서 언급하겠지만 <金區長의 祝文>(제4시집 《다시 故鄕에서》, 문학아카데미, 1990)은 형의 혼재된 내면(시대 인식)을 질서롭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벌써 그 시와 같은 ‘축문’이라도, 아니 선언성 주문이라도 계속 남발했어야지요. 그만큼 적당한 거리를 적당히 비켜서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야말로 멀리서 시위대를 바라보며 뒷짐진 군중의 한 사람처럼―.
七代祖 五代祖는 無血無脈한 밭두둑에 면례하고 家乘 어디다 이을까, 끊긴 마음 몇 겹으로 처매고 뒤척입니다. 칠월비 뜯고 벌초했습니다. 남들 이삭 패어 새카만 풀씨달 때 시절 모르는 며느리밑씻개꽃 두엇만이 넋 놓고 피었습니다. 밟힙니다. 이즈막엔 늦여름 된볕에 검은 녹두나 동부 광쟁이 따러 웃밭에 여나믄번씩 올라 다닙니다. 탁탁 버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 봅니다. 등 뒤에 뜬 수척한 가을하늘. ― <金區長의 祝文> 부분
80년대 이후, 형이 문단을 버렸든 문단이 형을 도외시했든 책임은 쌍방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만의 정체성identity을 찾는다고 겨울 동면으로 오랫동안 칩거한 사실은 지탄받아 마땅하지요. 누가 형을 철저한 아웃사이더로 만들었습니까. 그중 팔 할의 많은 책임은 홍신선 시인, 당신이 져야 합니다. 그것은 당대 선의의 ‘문예 부흥’에 대한 직무유기죄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소린지 모르지만, 우리는 주변에서 괜히 고고·우아한 문인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들은 시대를 탓하고 자기 문학을 애달와 하곤 합니다. 자기 고집이나 ‘문학 애호’는요, 꼴같잖게도 엄청납니다. 형의 생각은? 올해가 ‘문학의 해’라구요. 그래서 비싼 돈 들여 호화판 행사나 하고 문인들에게 초대장이나 보내면 되는 겁니까. 그래서, 행사에 참여하는 문인이 몇이 있습니까. 그런 곳에 익숙치 못해 촌시러운 ‘보통 문인’들은 그저 면구스러워서…. 난 그런 걸 받을 때마다 곧바로 찢어버립니다. 오라고 해도 안 온다구요? (행사, 좋아하시네.) 개인 자격으로 말할까요. 정부가 유명(?) 문인에게 철판 훈장이나 줄 게 아니라 현실적인 여건부터 해결토록 애써달라고 엄숙히 요구합니다. 모든 작가에게 골고루 적용되는 원고료부터 현실화하고 힘든 출판사도 지원해줘야 합니다. 명망 있는 출판사나 예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후원자(혹은 딜레탕트)가 있어, 시인이 시집 한 권 분량을 몇 년 동안 쓸 수 있도록 배려하는 문화 풍토 조성을 강력히 요망합니다. 정신과 물질을 함께 나누자는 겁니다. 예로부터 바른 문인들은 배부른 자가 없었습니다. 정신을 옳게 비워내느라고 물질을 생각할 틈이 없는 게 당연하지요. 폼쟁이들을 위한 말이 아니라 싹수 있고 진솔한 문인들을 끈질기게 도우라는 겁니다. 애초 글쟁이를 꿈꿀 때는 이미 순수한 무욕을 전제했지요. 문화 위정자들은 작가를 위해 대체 무얼 고민해주는지 모르겠네. 멍청이, 바보! 시집 한 권 제대로 사지도, 읽지도 않으면서! 이거, 모두 유배지로 보내야 합니다. 벼슬하고 임금 총애를 받다가 파쟁에 휘말려 유배 당한 옛 문인들을 볼 때, 유배지에서 책 읽고 공부한 이들이 꽤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형도 즐겨 얘기했던, 두륜산 일대를 배회했다는 고산 윤선도, 그리고 추사 김정희·다산 정약용·매월당 김시습 등등. 거기에 다산의 평생 저서는 1권이 모자라는 500권, 저술에 몰두할 때는 궁둥이가 짓물려 터지기도 했고 팔꿈치는 굳은 살이 박히기도 했다니 그저 경악할 따름입니다. 내가 형을 좋아하는 이유는 가슴이 따뜻한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날은 각자의 가슴 안에 진정한 유배지를 만들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시인들도 가슴마다 감옥을 만듭시다. 쓸 때마다 신성불가침의 철감옥을 만드는 작가 이외수(!) 그의 정신처럼 어쨌든 진실한 자기에로 이르는 길, 바로 그 길을 방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글을 쓰면서 장영주의 멘델스죤을 들었습니다. ‘빈 필’과 주빈 메타의 지휘 모습도 읽으며 움직거리는 각 연주자들의 손길도 훔쳐보았습니다. 영주의 웃음 뒤에 묻은 황홀경·무아지경과 완전히 자신의 심포니에 젖은 주빈 메타의 얼굴, 얼굴. 나는 영주의 웃음 속에 묻어있을 고통과 주빈 메타의 땀에 전 표정을 엿보면서 그들만의 ‘독실한 감옥’을 발견했습니다. 평범치 않은 음의 빛깔, 기교를 벗어난 무기교의 완벽한 듯한, 달콤한 애상적 울림. 정경화의 표정과 장한나의 첼로를 만날 때처럼, 누가 뭐라든 간에 문학에 있어서만은 난 영원한 열혈 청년이고 싶습니다, 신선 형. 시집 《황사바람 속에서》에서는 매천 황 현 선생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곧 ‘선비정신’이지요. 사람됨이 호방하고 시원스러웠으면서도, 모가 지고 꼬장꼬장했다는 그 매천 선생 말입니다.
나는 (벼슬을 안했기에) 죽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조국이 선비를 키운 지 오백 년이나 되었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도 국난(國難)을 위해서 죽는 사람이 하나 없다면, 어찌 통탄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 황 현, 《목숨을 끊으며》, 동천사, 1985, 8쪽.
한국이 왜놈들로부터 망할 때 자결한 이가 매천 선생(물론 동학군에 대해 임금에 대한 반역으로 비난한 모호한 역사의식도 뵈지만)만은 아니었지만, 발문 형식의 황 현 전기를 쓴 김택영이 그의 시에 대해 ‘매우 맑고 굳세다’고 전제한 뒤 선생이 절개를 지키다 몸을 버린 여러 사람들을 많이 시로 읊은 점을 ‘천성 좋음’과 ‘그들의 절개를 아름답게 한 것’으로 극찬했지요. 이 글은 매천뿐 아니라 요즘 매명賣名하는 시인들의 ‘절개’를 새삼 생각케 하는 귀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니 형의 예스러운 선비정신은 제4시집 《다시 故鄕에서》에도 차갑게 등장하더군요.
죽으면 어디 康津灣 갈밭쯤에나 가서 肉塊는 벗어서 시장한 갯지렁이 시궁쥐들의 뱃속이나 소문없이 채워주고 그래도 남는 것이 있으면 찬 뼈 두 낱 정도로 견디다가 언젠가는/그것도 다아 이름 없는 불개미떼나 微物들에게 툭툭 털어/벗어줄 일이지 쇠막대 울 앞 애꿎은 시누대들만 수척한 띠풀들 사이 끌려나와서 새파랗게 여우눈 맞고 있다. ― <浮屠> 전문
이건 완전한 불교식 공양供養이지요. 황동규 시인의 <풍장시편>과도 맥이 닿습니다. 허기야 ‘선비정신’을 이야기할 때는 지훈 선생을 논외로 쳐서 되나요. 그래도 이 작품을 접하면서 놀라운 가슴 쓸어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에, 육신의 고깃덩이(=육괴)는 벗겨서 ‘시장한 갯지렁이 시궁쥐들의 뱃속이나/소문없이 채워주고/그래도 남는 것이 있으면/찬 뼈 두 낱 정도로 견디다가/언젠가는/그것도 다아/이름 없는 불개미떼나 미물들에게/툭툭 털어’준다니요. ‘새파랗게 여우눈 맞고 있다’는 구절 중, 눈(雪)을 노래한 대목에서는 마치 매천의 치욕의 암울한 눈(眼), 형의 치열한 시詩의 눈(眼)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2연이 없었다면 단순한 허무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많았겠지요. 여우눈(맑은 날에 언뜻 뿌리는 눈인가요)을 ‘새파랗게’ 맞고 있는 모습이란, 딴은 앞에서 일부 언급한 매천의 <絶命詩>(목숨을 끊으며:허경진 옮김)와 같은 계열이 아니겠습니까.
鳥獸哀鳴海嶽嚬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 무궁화 이 나라가 이젠 망해버렸어라. 秋燈掩卷懷千古 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지난 역사 생각해보니,難作人間識者人 인간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그리고 매천 선생은 ‘죽기도 쉽지 않더군. 약을 마시려다가, 입에서 약사발을 세 번이나 떼었다네. 내가 그처럼 바보같다니.’(7쪽) 하며 진한 인간미를 풍기곤 숨을 거두었지요. …형의 ‘절명시’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형으로 하여금 <부도>나 <金區長의 祝文>을 쓰게 했습니까. 저 앞에서 인용한 시 ‘축문’의 제사祭祀 대상은 누구이며, 또 무엇을 그토록 고하고 싶었습니까. 감히 매천 선생에게 비긴다는 것이 무례한 일이며 또 형도 원하는 바도 아니겠지만. 화제를 돌려, 이제사 형의 안방 친구 노향림 여사를 이야기 속에 끌어들일랍니다. 지금부터 내가 숨긴 카메라눈을 잘 살펴 보시지요.
장면 1 노향림 시인의 방. 홍(洪)이 나타난다. 장면 2 홍신선 시인의 방. 노(盧)가 나타난다. 노향림·홍신선. 둘이 키이를 갖고 있다. 둘이 외출해 돌아오면서 헤어지지 않고 아파트(마포구 신수ⓐ. C동 206호) 입구를 향해 들어온다. 그들은 아파트 문(☎ 715-3240)을 열고 차례로 들어간다. 둘은 현재 같은 주민등록지 안에 거주하고 있다. 둘은, 그러므로 불륜 사이거나 동거 아니면 부부일 것이다. 둘은 문단에서도 보기 드문 부부 시인이다. 그런데 둘은 전혀 부부같지 않다. 오래 살면 닮는다던데…. 그들은 그렇지 않다. 둘의 시 역시 닮지 않았다. 둘은 하나이면서 각각이다. 자신의 행적을 잘 알려주지 않는 홍 시인. 일상의 ‘의리’와 ‘술자리’는, 홍을 가끔씩 집에서 멀리 있게 한다. 오래 전 처음에 두 사람을 대학로에서 만났을 때 부부라고 해서 나는 아니라고 우겼다. 그럴 리 없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런데 둘은 부부였다. 지금은 역시 부부가 맞다고(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노향림의 말투―그녀는 남에게 남편을 곧잘 못마땅해 은근짜 흉보듯 한다―에서 반어적으로 남편 홍신선을 끔찍이 생각하는 걸 느낀다. 노 씨가 홍 씨에게 프로포즈한 걸까. 그렇다. 전형적인 화성 시골 양반 홍 씨가 먼저 사랑 동냥을 한 것 같진 않다.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그 시대에, 세상에.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물어보니 어림없다는 투였다. 형이 꼬였다고 킁킁댄다. 그를 문단에 내보내주신 김현승 시인(2차 심사는 지금 와병중이신 이형기 시인), 그 분이 바로 홍·노 커플을 만들어주신 장본인이다. (그는 줁65년에 데뷔했다.) 줁69년 어느 날 홍은 김현승 시인을 만난다. 수색역 앞 ‘수색다방’이라고 기억. 평양 시절, 축구 선수였다는 김현승 시인은 티비를 통해서 축구 시합을 열심히 관전하고 계셨다. 그때 옆에 여류가 있었는데, 바로 노 여사였다! 서로를 소개하며 자장면을 사주신 김현승 선생과 헤어진 홍은 노를 종로로 데불고 나와, 처음 생긴 호프로 환심 사며 그녀를 유혹(?)한 것. 그러다가 와글와글, 홍이 노를 드디어 꼬인 것이다. 줁70년 12월 결혼. 형은 커피를 그렇게나 좋아하시던 김현승 시인을 평생 잊을 수 없단다. 아리따운 각시를 통째로 얻었으니. 그래도 나는 궁금하다. 이쪽 여자는 능동적이고 저쪽 남자는 수동적이다. 두 시인의 일상과 시인적 삶은 어떤 모습일까. 다를까. 한동안 나는 그와 그녀가 ‘부부 싸움을 어떻게 벌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홍신선 형이 양반이라서 싸움이 이뤄질 것 같지 않은데. 그렇다면 누가 이길까. 노 여사는 거침없다. 진솔하다. 남의 생각이 어떻고가 별 상관없다. 그렇다고 그녀가 별난 짓을 한다는 게 아니다. 그녀는 놀랄 정도로 진한 동심을 지녔다. 순수하다. <압해도>의 주인공, 시인 노향림. 그녀를 기리는 시비가 압해도 주민들에 의해 얼마 전(‘96. 10. 5. 토요일)에 세워진다. 그리고 홍신선 시인은 바로 전에 《黃砂바람 속에서》를 펴내다. 부부의 경사다. 시인의 《다시 고향에서》 이후 여섯 해 만이다. 《현대시사상》 줁96년 가을호를 보면, ‘어디에 갔을까/맨발로 바다에 갇혀 떠도는/그대의 혼. 누군가 자물쇠를 풀었다. 드러난 파도의 건반이 아득하고/햇빛들은 부서진 상념처럼 튀어오르고 있다.’(<추억>)는 시구가 보인다. 이 글이 홍 시인의 냄새라고? 천만의 말씀. 또다른 한쪽 노향림 시인의 ‘압해도 85’라는 부제가 붙은 작품이다. 그녀의 시는 사람의 근본적인 외로움·고독·무의미 등이 진하게 묻어 있는데, 이 작품 역시 <압해도> 연작을 마무리해가면서 그녀의 말대로 한결같이 ‘시는 곧 나 자신’임을 더욱 강고强固히 고백하고 있다. 시의 다른 갈래를 취하면서도, 읊조림이 같은 입술 형상이다. 홍 시인은 오래 전부터 매일 수원대 국문과 연구실(☎ 0331-220-2380)로 출근한다. 곧바로 도서관장실(☎ 220-2390)로 들어간다. 강의가 없는 날에도 그는 매일 출근하고 있다. 단단히 일과 중노동에 ‘잽혀’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뒤늦게 독자에게 들려줄 고백이 있다.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홍 시인은 나의 대학 선배이다. 처음엔 좀 난감했다. 독특한 기획물 <커버 스토리>는 당연히 공적인 성격을 띤다. 누구를 다룬다 해도 ‘공식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홍신선 형에게만은 사적인 것이 더 좋다. 왜냐하면, 가까운 사이로써 그를 더 확실히 독자에게 공개할 수 있기 때문이지만, 거저 추켜올리기는 싫다. 이건 시인에 대한 신성 모독이다. 그의 시에 대한 기억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몇몇이 강화도 마니산을 찾을 때였다. 동행한 윤제림 시인이 《다시 故鄕에서》를 읽다가 말한다. ‘홍 선배의 시가 이상해졌어, 그렇지 않수?’ 나도 끄덕였다. 건방진 생각으로 형의 시는 그전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것이 가장 비범하다’는 일관된 고집(아름다운?)·주장을 지속적으로 잇는 듯이 보였다. 이러한 진리란 대체로 예술 작품의 경우, 한계가 있는 게 아닐까라는 덜 익은 후배 시인들의 넋두리였지만. 그리고 다시 6년 후. 1996년 초여름, 그새 몇 번의 만남 끝에 산정호수에서 벌어진 국문과(한국어문학부) ‘창작교실’에서 본격적으로 재회한다. 이런 경우는 대개 서로 마음의 문을 여는 법. 한 잔을 나누면 나도 분위기에 마구 젖는 편인데, 그는 자기나 남 얘기를 거의 꺼내지 않는다. 물론 남을 흉보는 일이 전혀 없다. 내가 뭐라고 불만을 터뜨리면 기껏, ‘…그래서 그랬겠지 뭐.’ 한다. 중요한 것은 늘 타자他者다. 무슨 말을 물으면 그저 듣다가 웃는 듯, 비스듬히 웃는 듯 별 말이 없다가 조용히 술만 들이키는 그는 정말 지독한 ‘양반’같다. 때때로 이런 태도가 싫을 때가 있다. 조용하고 밋밋하므로. 그때 형이 어수룩히 한 말, ‘문학은 살아가는 자의 살아감에 대한 숨김 없는 이야기’라고 했다. 정직한 삶에 관한 잠언. 이런 내음이 진한 《황사바람 속에서》를 접하면서 그를 다시 만날 꿈을 꾸게 된 것이다. 어쩜 그동안 움막 속에서 거적 깔고 지내오면서 세사를 ‘바람만바람만’ 바라본 80년대에 대한 자기 고백성 시집일 것.
내 이제는 목숨 밖에서 다시는 발길 돌리지 않으리니 단호하게 깨어서 가리니 새벽은/옆방 전세 들어온 죽음처럼 듣는 이 있다고 소리 죽여/고요들로 줄 서 있다 ― <세계의 한 모퉁이에서> 부분
무엇이 그로 하여금 ‘단호하게 깨어서 가’겠다고 아우성치게 하는가. ‘새벽은∼고요들로 줄 서 있다’고 응시하는 시인의 터질 듯한 가슴을 보라. 메가톤급 엄청난 열량의 침묵이 우리를 멈칫거리게 하지 않는가. 지난 어리석음에 대한 깊은 회오의 그림자가 시적 자아를 덮친다. 시인은 쉽사리 제 몸을 감추지 못한다. 숙명적인 것. 그는 혼몽 중에 깨닫는다.
運命은 결코 뛰쳐나갈 수 없다는 것 장대 높이뛰기로도 시대의 담벽은 넘을 수 없다는 것을/알기까지는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 그렇게 생각 안채로 들여보내고 하루를 네 귀 맞춰 개어 깔고무심히 흑백 TV의 풀온을 당기면 떠오르는 화면,꼿발 딛고 아득히 넘겨다보는 흐린 화면 너머의 화면 그곳엔 무엇이 있었는가 ― <황사바람 속에서> 부분
이 ‘황사’는 우리 역사의 소용돌이다. 시의 대부분이 회복 불능의 모진 치욕의 과거에 물들었다. 시적 화자인 ‘나’는 그때 어디에 있었는가고 되묻는다. 자신을 한없이 꾸짖는다. 작품 후반 ‘나는 어디에 고개 묻고 있었는가’, 비루하게 외면하고 있었는가 하고. ‘시집 해설’에서 김춘식은 ‘영혼의 부재’를 통해 목숨 밖의 깨달음으로까지 그 시야를 넓혀 운명, 곧 삶에 대해서 성찰하기 시작’(145∼146쪽)하며 ‘영혼과 마음의 눈’ 쪽으로 지향한다는 이상성理想性의 핵심을 올곧게 짚은 바 있다. 이렇게 역사와 현실을 괴로워하는가 하면 정이 많은 시인이다. 그의 흠씬 배어나는 깊은 정은 정의홍 시인이 불의의 사고로 명을 다했을 때 쓴 글에 이렇게 처연히 나타나 있다.
정의홍은 갔다. 그의 느닷없는 서거 소식에 당시 나는 일이 너무 황당하다는 느낌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대전행 무궁화 열차에 앉아, 그가 생전에 출퇴근을 위해 수도 없이 오르내렸을 바로 그 철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짙게 깔리는 차창 밖의 어둠 속에서 운명의 본모습을 새삼 만나야 했었다. 그렇다. 나고 죽는 일을 어찌 사람의 뜻과 같이 할 수 있는 것인가. ― 홍신선, 《현대시》, 한국문연, 1996. 7.
슬픔인 듯 슬픔이 아닌 듯, 그의 아픈 가슴을 헤아릴 길은 없으나 ‘그가 생전에 출퇴근을 위해 수도 없이 오르내렸을 바로 그 철길을 (나도)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홍 시인의 깊은 정과 심성을 가누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 그는 죽음 의식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죽음이란 자기라는 개인의식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며 ‘새는 죽는 순간에 슬픈 소리를 내지만 사람은 가장 착한 말을 한다’는 칸트의 말처럼, 이 고통스러운 멍에의 시간이 그에게 ‘가장 착한 말’과 좋은 시를 더 쓰는 계기가 되기만을 충심으로 간구할 뿐.
하강이나 패배의 이미지들도 아름답다 신선이 형, ‘하강이나 패배의 이미지들도 아름답다’, 이것은 형이 수필집(《품안으로 날아드는 새는 잡지 않는다》, 청한, 1990)에서 한 말입니다. <눈에 관한 명상>에서였지요. 왠지 형의 시에는 그러한 애틋한 그리움과 비애가 묻어 있습니다. 초기시에는 더욱 그랬지요. 아마 이것은 어릴 때 고향을 잃은 사건으로부터 비롯한 것이겠지요. 이미 어릴 때 고향을 떠나와 서울에 혼자 살며 실어증을 경험한 형이 ‘도서 대여점’을 드나들면서 문학을 알게 된 계기 하며, 한때 삶을 위해 영어 번역으로 지식 품팔이를 하던 김수영의 애처러운 삶을 접하면서 이어나간 문학에로의 열병·열정 등을 어찌 글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 슬픔은 형의 초기시의 대명사인 양, 우리들 가슴에 다가와 머뭅니다. 홀로 키운 문학 열병이 촘촘히 찍어낸 ‘그리움이 지극함에 이르면, 그 지극한 그리움은 울음으로 터지게 되고, 흘린 눈물은 진주처럼 빛나고 영롱한 것이 된다’는 말은 박재삼·박용래 시인을, 나아가 형의 동향인 눈물의 왕 홍사용 시인의 엄청난 눈물을 직접 연상시킵니다. 어린 시절, 문학적 순수성을 감안할 때 자연스레 이들에게 탐닉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되는군요. 그렇지요. 형과 함께 공감한 바, 우리 시사詩史에서 이분들을 비롯한 많은 시인들은 보들레르가 말한 ‘알바트로스의 새’일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의 외곬진 시인을 두고 한 말로, 세속에 묻혀 걸을 때는 기우뚱대지만 비상할 때의 우아함을 지칭하는 저 ‘알바트로스의 새’. 외로움, 정신의 결핍, 사고의 궁핍, 핍乏, 乏, 乏. 저들, 영혼이 가난한 이들의 외로움의 궁극…. 형, 그러고 보니 참 요즘 내가 좀 이상해졌어요. 쓸쓸함이란 낱말, 이 관념어가 좋아진 거 있죠. 지금의 나에게 쓸모 있는 거 있죠, 투덜투덜. 그런데 형도 이 날따라 웃음이 조금 쓸쓸해뵈데요, 중년에 걸맞지 않게…. 형만의 가을 냄샌가요.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국외자로서의 80년대에 대해서는 형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5년 동안은 작품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고요? 아닙니다. 형은 두루뭉수리 적당히 기다린 거죠. 그때 안동대학의 큰애들에게 육두문자를 써가며 소일했던 형이 큰 사물에만 거대 담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새알 같은 미시 담론에도 도道가 있음을 알아챈 다음, 형이 시를 썼습니까, 연애했습니까. 이젠 서사敍事(이야기詩) 쪽의 작품은 서안書案에서 물리셔야지요. 다음의 의자를 위해 빈 틈을 남겨 놓으셔야죠. 그 날 형은 이런 고백을 했지요? ‘어떤 중압감·구속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가벼움으로 시 쓰고 싶다’고. 단, ‘체험 속에서 우러난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싶다’고. 향기 있는 꽃일수록 자기 세계를 갖고 있다, 대상이 각각 다르게 현존하므로 각기 피는 세계에 대한 아름다움을 쓰고 싶다, 특히 한시漢詩 쪽의 고결성·간결성을 추구하면서 가능하다면 철학 쪽으로 여운 있는 시를. 이런 말들을 분위기에 젖어 듣노라니, 나의 정신이 형의 매운 ‘얼차려’에 의해 깨어나는 듯합니다. 후배와의 약속이 이젠 공식사항이 됐으니 꼭 지키셔야죠. 첫 시집 《棲碧堂集》(한얼문고, 1973)을 펼치니 시의 처음이 오롯합니다. ‘서벽당’이란 ‘쪽빛 푸름이 깃드는 집’이 되겠는데 웬일인지 이 시집은 잔잔한 허무감이 노을빛으로 깔려 있어 좋습니다.
누가 죽어서/저 들판의 대머리 빗기며 묵묵히/공허가 되어 와 섰느냐. 이제 이 세상에서/자네의 꿈은 저 들보리밭에 우는 산꿩 소리에나/남아서 꿔구엉 꿔구엉 제 속을 제 속의 멍을/속속드리 다 뒤집어 허공에 허옇게 주느니 허공에 허옇게/산꿩소리나/받아 들고 누가 묵묵히/공허가 되어 와 섰느냐. ― <산꿩소리> 전문
형. 꿩이 ‘꿔구엉 꿔구엉’ 운다구요! (걔들 울음소리의 형상화라니.) 그 소리가 허무 내음이 짙은데도 ‘공허’가 한낱 빈 것으로 다가오지 않아 신비롭습니다. 아하, 공허나 허무가 이렇게 우아하게 감지될 수도 있구나. 제2시집 《겨울섬》의 <불볕>(부분)도 흥미롭군요. 불볕들에게 허리와 궁둥이/겨드랑이 죄다 들어내주고 풀들이 소리 죽인다. 밋밋하게 등 구부려/모래둑에서 뜨거운 손으로 불볕들은 더듬는다. 마음 부릅뜨고 거듭 죽인 소리까지 더듬는다. 더듬는 손끝에도 묻어나지 않는 저 죽인 소리 거듭 죽인 슬픔만이 우리들꺼예요. 더듬으세요 서로 서로의 등에 숨어/코 부비는 풀들, 소리 죽이고.
나의 설익은 솜씨로 굳이 가획할 필요가 없지만, 땡볕이 ‘마음 부릅뜨고 거듭 죽인 소리까지 더듬는’ 풀의 존재는 다분히 민중 의식의 발로로 보입니다. ‘저 (마지막까지) 죽인 소리 거듭 죽인 슬픔만이/우리들’ 것이므로 한없는 애정으로 ‘더듬’어보자는 희망사항이 언뜻 읽힙니다. 함부로 흉내내기 어려운, 참 너른 가슴입니다. ‘타는 목마름’인가요. 이 작품 끝에는 유별나게 ‘생활, 일상, 나를 얽어매는 정신의 자유를 묶어오는 괴물이 싫어진다. 어디 시만을 생각할 수 있는 진공은 없을까.’라는 시작 노트가 실려 있더군요. 시집 해설 뒷면에서 시인 황동규의 ‘변화와 함께 직접적인 정황 묘사, 감각의 해부, 극적 독백 등등’(76쪽)의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덧이어 친구 박제천 시인―형이 소설에 젖었을 때, 시의 길로 안내해주었다구요―의 우정 어린 글에서 ‘그의 시가 추구하고 천착해온 한 인간의 양심, 삶의 갈등 속에서 예리하게 추출해내는 영혼의 아픔, 이 시대의 모래바람을 등에 받는 정신의 높낮이가 한국정신사의 한 수위로 기록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글(73∼74쪽)도 소위 바둑 용어인 ‘비마飛馬’처럼 잽쌉니다. 나의 경우, 지난 70년대 중반 ‘비여/말없이 번쩍이는 회초리들을 들고/저 앞들을 만들며 서 있다’(<수원지방>)는 시구를 보고 얼마나 좋았는지…. 평론가 홍기삼은 이 시기의 작품 경향에 대해 ‘도시적인 삶을 농촌에서 보고 현실의 문제를 농촌의 풍경 속에서 거꾸로 찾아 내는 날카롭고도 근심어린 눈’이라고 언급하고, 이것이 ‘포에지에 의해서 훌륭히 보완’된다(《동아일보》, 1977. 8. 31.)면서 무한한 신뢰를 보낸 바 있지요. 시선집 《삶, 거듭 살아도》(문학예술사, 1982)를 함께 보실까요.
물빠진 갯고랑. 삭은 시간들 삭은 물에 이어져 잠겨 있다. 일직선, 버려진 마음들로 쌓아올린 방파제까지 나문재 나무들 줄지어 나가 있다. 뻘에 두발 내리고 붙어 있는 목에 힘 준 저들. 쓸리지 않으면/개흙으로 사는 일 더러 쓸리면/닻으로 일생 내리는 저들의 일. ― <겨울 섬> 부분
형의 초기 시집을 구하지 못해 빈 시집의 <겨울 섬> 여백에서 문득 형의 글씨인 듯한 메모를 발견했습니다. 아마 누구랑 대화 중에 황급히 쓴 듯하더군요. ‘체험 고통과 어둠을 감내해가는 모습/밝음보다는 어두운 면을 강조,/다가올 미래보다는/삭은 시간을 되돌아보는 (제목의) 섬은 사람으로 쳐도 됨’이란 연필 글씨가 보입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뻘에 두발 내리고 붙어 있는 목에 힘 준 저’ 섬들이 ‘쏠리지 않으면/개흙으로’ 살거나 혹간 ‘더러 쓸리면/닻으로 일생’을 지내기도 하는 저들의 일대기를 그린 거네요. 시적 자아의 견인주의, 바로 이것이 이 작품의 고갱이일까. 모두들 특별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개흙’이나 물 속에 숨어 영원히 뵈지 않는 평범한 ‘닻으로 일생’을 묵묵히 지내는 생애도 가치 있는 게 아니냐는 상서로운 반문은 사욕 없는 느낌표로, 마치 겨울에 막 피어내리는 눈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암흑의 한 귀퉁이에/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 마음아/부릅뜬 두 눈만으로/여기 지난 날의 헛됨을, 공허를 다 지킬 수는 없다’(<옛마을>)는 시구도 우리들 가슴을 움직이는군요. 이들을 정리해보면 꼬장꼬장한 매천 선생의 기질이 시의 터밭에 뿌리내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3시집 《우리 이웃 사람들》(문지, 1984)은 단연 <어떤 가야산>과 <물>의 시구들이 돋보이네요.
어느 길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에 닿게 하고 아직 자기에이르지 못한 것들로 하여금 우왕좌왕 몸놀려 숨게 하고어느 길은 피해 가서 등성이로만 올라가 섰고 그 위의 殘光들, 체격 좋은 장정들은/둘러서서 메고 있다. 이 공간에/쉬임없이 침묵으로 와서 부서지고 뒹구는 죽음을/죽음 아닌 더운 삶을. 어떤 가야산. (<어떤 가야산>) 솟구치기 위해 얼마나 더 낮추어야 하는지. 힘 없는 자갈돌 하나로 누군가 눌러놓은/그의 잇새로 낮아지는 소리 신음처럼 낮아지는 소리 멈춘 것들 사이에서/혼자 흘러 더 낮추고 낮아지기 위해 상동서 단양까지 침묵으로/누워 있는 그는 솟구치고 뛰기 위해/얼마나 더 낮추어 가야 하는지 (<물>)
‘길’ 모티프가 중심인 <어떤 가야산>은 ‘헌신성’을 주제로 합니다. 즉 길이 추구하는 세계관을 한 ‘공간’으로 나타낸, ‘자기에(게)/이르지 못한 것들’을 위한 시라고 할까요. 길을 한자로 ‘道’라고 쓰는 바, 1행은 도를 이룬 경우를 가야산의 한 정경에 기댔군요. 무엇보다 ‘이 공간에/쉬임없이 침묵으로 와서 부서지고/뒹구는 죽음을/죽음 아닌 더운 삶을’ 몹시 염려해주는 가야산의 심사야말로 곧 자비심 아닐까요. ‘(뒹구는) 죽음 아닌 더운 삶을’ 생각한다는 결론이 휴머니스트로서의 시인을 미덥게 합니다. …이 넉넉함. 작품 <물>은 ‘솟구치기 위해 얼마나 더 낮추어야 하는지’란 시구가 대단히 향기롭습니다. 특히 ‘힘 없는 자갈돌 하나’와 ‘멈춘 것들’을 인식하는 시적 자아가 고맙고, ‘더 낮추고 낮아지기 위해’ 머언 거리를 ‘침묵으로/누워 있는’ 물처럼, 사람들도 좀더 겸허해지기 위해 자신을 ‘더 낮추어 가’는 연습을 계속해야겠지요. 시인의 낮추기란 ‘솟구치고 뛰기’ 위함이므로. 그러나 나는 시 <사람의 일>이 참 좋습니다. ‘굽어본다, 허름한 키다리가 저 아래 중키를/굽어본다, 중키는 더 작은 중키를/굽어본다, 다시 중키는 저 아래 앉음뱅이를/굽어본다, 차가운 언 살을 길게 내놓은 공기는 겨드랑이께 겨우 귀나 붙이고 언 앉은뱅이를.(…중략…)키들댄다./가까이 싸락눈 몇 점 허옇게 궁둥이 까고 앉은/모습이나 건너다보며/키들댄다, 웃음 소리./가득한 웃음 소리에 울려 갈 데 없이 이 얽힌 꼴 드러내는/시든 초겨울 꽃밭의/꽃들의 일’(부분).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그냥 이 ‘초겨울 꽃밭’에서 벌어진 ‘꽃들의 일’을 감상하시지요. 그러나 사람살이가 ‘시든 초겨울 꽃밭의/꽃들’처럼 어찌 단순한 삶이겠습니까. 앞으로 엄동설한을 견뎌내기, 애상과 아름다움이 잔잔히 교차합니다.
정지용·미당·김수영 대담을 끝내면서 나는 형의 얘기만 잠자코 들었습니다. 정지용·김수영·미당, 그리고 서사적 삶의 깊이를 자기 방식으로 터득하기 위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라, 김수영 그는 시적 묘사가 아닌 ‘진술’을 시로 만든 사람이다, 그는 자기를 글감으로 삼아서 끊임없이 싸우며 써온 시인, 그리고 반드시 미당의 아름다운 서정 미학과 정지용의 언어적 감수성을 익혀야 한다…, 형의 진술은 이 날따라 강렬했습니다. 신들린 듯했지요. 곧이어 후배들에게 걱정어린 ‘사금사항四禁事項’ 전달. 1)시류 영합, 2)소설 묘사 문장이 시가 된다는 착각(오류), 3)시인들의 성급한 일확 천금·출세주의, 4)기발함을 추구하는 얄팍한 태도 등 네 가지 금기 사항들. 이 날 나는 형님과 어울려 지내면서 비로소 홍신선이란 시인과 재회한 느낌을 다시 가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객지에 혼자 남아 고독의 치료법으로 독서를 선택한 뒤, 너무 뒤진 고1 성적에 격노한 아버지를 설득해주신 형의 조부님, 이제 미지未知의 독자가 고마움을 올립니다. 좋은 시인을 가까이 해주셨으니까요. 고1때 4·19, 고2때 5·16, 험난한 청소년기를 부딪쳐 오면서 형의 삶의 단초는 이미 일정한 방향으로 예견된 것이 아니었을까…. 허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정말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부디 홍신선·노향림 부부의 삶이 더욱 아름다이 영글기를 바라고, 형님의 산문집에서 얻은 귀한 글귀를 되돌리며 이만 맺을까 합니다. 행복하세요.
시는 기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현실과 현실, 불가능과 불가능 사이에 끼어 있는 하나의 기호.(53쪽) 그러나 시는 불가능을 꿈꾸는 것이다.(56쪽) 치열하지 않은 정신이나 감각은 썩는다. 썩은 정신은 시에게 나에게 아픈 복수를 가해올 것’(75쪽).
─ 1996년 가을녘, 김 강 태 (1996년 1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