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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홍윤숙
코스모스 한 다발 안고 돌아가는 내사 가난한 소녀올시다
장경기
그 시절 겨울들은 눈이 많이 내렸다 “어머! 웬 일이세요 선생님, 인천행은 막 떠났는데.……”어두운 플랫폼을 건너오는 낯익은 한 청년을 윤숙은 발견한 것이다. 인천 근처에 있는 소화동국민학교에 같이 근무하는 동료교사였다. “기차를 놓쳤습니다. 그보다 홍선생은 어떡하시죠?” 그 물음은 그녀의 마음속에 플렛폼의 정적만큼이나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기다려보는 거죠…….” 그러나 윤숙의 말엔 기운이 없었다. “홍선생, 언젠가 인천에 친척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습니까. 인천으로 안 가시겠습니까. 인천까지면 한 시간 반이면 넉넉히 갈 수 있는데……”친척? 그녀 자신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우쳐준 그의 기지가 고마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픈 상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자신에게는 인천에 가까운 친척이 있었다. 가까운, 아주 가까운……그렇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단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가, 아버지라는 사람이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오래 전부터 어머니와 별거하여 딴 살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아득히 먼 옛날의 일이었건만,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유년의 아픈 기억들이 엄습해왔다. 어느 여름날이었으리라. 우물 속에는 큰 박덩어리만한 시퍼런 수박이 몇갠가 둥실둥실 떠 있었다. 어머니의 손길이 닿자 그 탐스러운 수박은 두 덩어리로 갈라져 시뻘건 속살을 드러냈다. 그러나 어머니가 어린 윤숙에게 그것을 내밀려는 순간, 번개 같은 손이 엄습해왔는가 싶더니, 수박은 우물가에 처참하도록 박살이 나버렸다. “너 먹으란 수박 아니야!” 증오에 일그러진 사내의 입에서 차디차게 내뱉어진 그 한 마디!어린 소녀가 무서움에 질려 흘깃 쳐다본 안방에는 곱게 무새옷을 차려 입은 젊은 여자가 하나 오똑 집어다 놓은 것처럼 앉아 있었다. 그 사내가 누구였을까. 자신의 기억 속에서 지금도 무섭게 찡그리고 있는 그 사내의 얼굴, 그 기억 속에서 도리질을 하며 다가오기를 거부하고 있는 그 사내의 얼굴, 그가 바로 아버지, 아버지라는 사람의 얼굴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어느 때인가 情分난 여자와 바다를 건너 간 사내의 빈 집엔 산골 할미꽃 허리처럼 시들어간 여자-우리네 어머니
그 어머니 쓰러진 싸리문 밖에 칠석날 꽃燈 같은 달맞이꽃이며 울타리 감아오는 연분홍 메꽃들……. 윤숙의 우울한 가슴을 까닭모를 눈물이 적셔왔다. 그의 긴 그림자도 가늘고 선명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의 슬픈 선율이 그의 가슴으로 흐르는 것일까?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더듬더듬 귀 밑에 울려온 것은 그때였다. “ 홍선생………기차를 놓쳤다는 아까 그 말, 사실은 거짓말입니다. 난 아까 기차를 타고 있었어요.”그의 말이 끊어졌다. “무슨 뜻인지……” 반문하는 윤숙의 말은 먼 곳을 헤매듯 공중에서 떠돌고 있었다. 그의 말이 다시 더듬더듬 이어졌다. “차 안에서 보니 홍선생 혼자 남아 있더군요. 무척 쓸쓸해보였어요. 차는 언제 올지 막연하구. 그러다 안 오면 혼자서 어떡할까 생각하니 그냥 갈 수가 없었습니다.”그녀는 대답할 바를 잊어버린 채 묵묵히 자신의 그림자만 좇고 있었다. 그의 조심스럽게 문을 여는 듯한 정에 짜릿한 전율을 느끼면서 이상한 아픔이 가슴을 후비고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순간 자신도 모르게 윤숙은 흐느끼고 말았다. 그 투명한 물빛 울음으로 두 어깨를 그에게 내맡기면서도 그녀는 수없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내 탓이 아니야. 이건 내 탓이 아니야.’
그 시절 겨울들은 눈이 많이 내렸다 우리는 눈 속에 눈길을 걸어 소공동 모퉁이 마돈나든가 하루빈이든가 문을 열면 맞은 편 벽에 숱한 쪽지들이 나비처럼 꽂혀 사람을 찾고 있는 구석지고 따뜻한 찻집에서 자주 만났다 그 집 낡은 유성기에선 먼 여름바다의 갈매기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무연탄 난로에선 엷은 석탄내가 시골집 아궁이 연기처럼 피기도 했다 우리는 사카린 섞인 코피를 마시고 꿈이 아닌 꿈 같은 이야기를 아름다운 시와 사랑을 찻잔에 풀어 한 모금씩 마셨다 1)
아, 청춘! 그것은 ‘순수한 노출’이었다. 그리고 8·15해방, 그 스산한 시절은 그들에게 기약없는 이별의 강이었던가. 훌쩍 그 시절로부터도 멀리 건너와버린 이제, 윤숙의 기억 속에서는 힘없이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이 푸른 동판 속의 음각화처럼 떠오를 뿐이다. 그의 결혼하자는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순간의 모습이었으리라. 그녀는 가슴 속에 한 줄기 강물이 흐르듯 여린 아픔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헤어지자 우리들 서로 말없이 헤어지자 달빛도 기울어진 산마루에 낙엽이 우수수 흩어지는데 山을 넘어 사라지는 너의 긴 그림자, 슬픈 그림자를 내 잊지 않으마……희뿌연히 아침이 다가오는 소리 닭이 울면 이 밤도 사라지려니 어서 저 기울어진 달빛 그늘로 너와 나 낙엽을 밟으며 헤어지자……”2) 빨간 빌로드, 사형장에 핀 한 송이 꽃처럼 슬프고 고통스러운 추억이여그런 윤숙의 투명한 물빛 영혼은 서울대 사범대의 생활이 시작되면서 <데미안>, <크놀프>, <말테의 수기>들이 빚어내는 우울과 고독, 알 수 없는 비애 속을 섬세한 촉수로 더듬어 갔다. 47년 무렵의 일이었다. 아침이면 문 닫힌 강의실, 아우성치는 좌우익 학생들의 논쟁 속을 꼭둑각시처럼 부유하다 그나마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연극부 그 헛간 같은 창고였다. 그 시절 연극무대가 되어준 창고는 그녀에게 있어 유년시절의 빨간 빌로드 옷과 같은 것이었다. 미쯔꼬시(그 당시의 일본 백화점)에서 오랜 세월 동화책에서나 보던 것 같은 새빨간 다홍색 빌로도 망또를 날개처럼 둘러쓰고 신데렐라가 된 듯, 그때까지만 해도 화목했던 양친의 손에 이끌려 공주처럼 고임을 받았던 추억!그로부터 삼사년이 지나지 않아, 가정을 산산히 부서진 수박덩이처럼 조각내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암담한 날들을 보냈던 때에도, 빨간 빌로도 망또는, 마치 사형장에 핀 한 송이 꽃처럼 슬프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어린 가슴을 적셔줬던 것이다. 무대 위의 고독한 떨림처럼…… 초라히 코스모스 한 다발 안고 어두운 밤을 돌아가는 내야 가난한 소녀올시다운명의 키란 이상한 곳에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배를 몰아가는 것일까. 연극에만 몰입해 있던, 47년 4월 어느 날, 변두갑 철학교수의 발길을 좇아 간 곳은 소위 좌익 문인 단체인 문학가동맹 사무실이었다. 그녀의 문학, 특히 시에의 운명적 기로는 바로 그곳에 그녀 자신도 모르게 잠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작품이 되는 대로 가져오시오.” 시인 이병철이 투박하게 던진 말이었다. 그 강한 경상도 억양의 한마디가 윤숙 자신의 문학에의 향념을 한 순간에 흔들어 깨울 줄이야.
초라히 코스모스 한 다발 안고 어두운 밤을 돌아가는 내야 가난한 소녀올시다.
삼단 같은 머리도 머리에 드릴 다홍 댕기 한 감도 지닌 바 없는 다만 淑이, 淑이란 이름만을 갖인 이렇게 작은 몸이 낙엽을 밟고 돌아갑니다.
보십시요 달도 별도 없는 이 밤 하늘을 스스로히 지나가는 바람과 바람 속에 살아나는 그리운 사람들의 숨소리
얼마나 먼 길이기에 한 여름 따스한 햇볕도 못 쬐이고 이 바람 드센 가을 밤길을 옷자락 여미며 가야 합니까 3)
“방년 21세, 이렇게 나의 시는 얼굴 붉어지도록 부끄러운 치졸과 미숙과 감상을 노출한 채 가난과 미지에의 동경에 가슴 설레며 무모한 출발을 시도했던 것이다.”너 가거던 부디 사랑과 같은 것은 조그마한 이름으로 불러두어라그리고 6·25동란, 6·25는 뱀처럼 불쑥 엄습해왔다. 유년시절, 교회당 앞뜰에서 밟는 순간 아득히 혼절하게 했던 그 뱀, 뾰족한 머리 끝에 샛빨간 실 같은 혀를 날름거리며 좌우로 머리를 흔들던, 그 삽시간에 피가 식어내리던 섬뜩한 몰골, 그것은 실로 의식할 수 없을 만큼 짧은 한 순간에 보아 버린 실체였지만, 그리도 강렬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소름끼치도록 뇌리에 새겨졌었다. 그렇듯 전쟁은 갑자기 모든 것을 싸늘하게 지워버렸다. 문학도 인간도, 가치와 신의와 일체의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연극에의 정열도 문학에의 꿈도 한 줌 재로 변해버렸다. 투명한 가슴은 우울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피난 속에서의 신혼생활은 한낮 사소한 것으로 내박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어디든 떠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이 우울하고 불행한 날에도 고작 커피 한 잔 값이 될까말까한 용돈을 넣고는 광복동 거리나 남포동 거리를 배회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돌아가기 싫은 집으로 어머니를 위해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남편은 매일밤 술을 마셨고, 돌아와선 말 한마디 없이 쓰러지곤 했다. 나는 하루에 열 번도 더 가출을 생각했고 불행한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염원했다.”그런 전화의 상흔 속에서 그녀가 싹틔워낸 시들이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순수를 피어내고 있었던 것은 ‘코스모스 한 다발 안은 가난한 소녀’의 천성이었을까. 아픈 현실은 오히려 흐릿하게 탈색된 채 배경으로 물러나고, 그녀의 물빛 투명한 영혼이, 부서지기 쉬운 덧없음의 비애를 흰 눈발처럼 지상에 떨구었던 것이다.
눈 내리는 길로 오라 눈을 맞으며 오라 눈 속에 눈처럼 하얗게 얼어서 오라 얼어서 오는 너를 먼 길에 맞으면 어쩔까 나는 향기로이 타오르는 눈 속의 청솔가지 스무살 적 미열로 물드는 귀를 한 자쯤 눈 쌓이고, 쌓인 눈밭에 아름드리 해 뜨는 진솔길로 오라 눈 위에 눈같이 쌓인 해를 밟고 오라 해 속에 박힌 까만 꽃씨처럼 오는 너를 맞으면 어쩔까 나는 아질아질 붉어지는 눈발의 진달래 석달 열흘 숨겨온 말도 울컥 터지고
오다가다 어디선가 만날 것 같은 설레는 눈길 위에 자라온 꿈 삼십년 그 거리에 바람은 청청히 젊기만 하고 눈발은 따뜻이 쌓이기만 하고 4)
“<환상의 낙원>, 그 꿈꾸는 집, 그것은 우리를 끊임없이 샘 솟게 하고 새롭게 하며 더 높은 곳에서 비상하게 하며 작은 것을 크게, 초라한 것을 빛나게 만드는 마력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혼 안에 살아 있는 영원한 유, 소년기의 향수와 같은, 그것 없이는 우리의 내면을 돌처럼 굳어버리게 하는 정신의 불, 혼의 유약인 것입니다.”거친 현실 속에서 정신의 불, 혼의 유약을 피워올리려 했던 순수지향. 그러나 그 향기는 언제나 비애의 정서로 젖어 있었다. 순수지향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 시절 나의 안엔 몇 개의 창들이 술렁대고 있었다. 밝고 어두운 세상을 향해 저마다 불을 켜고 위험한 전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디서나 잡힐 듯 비쳐내던 창 속의 환한 햇살, 햇살 속에선 무르익은 딸기밭의 새빨간 딸기들이 철없이 히죽히죽 풀섶에서 썩고 있었다. 그 시절 나의 집은 온통 집이 없는 창뿐인 헛간, 구멍 숭숭한 헛간이어서 부질없이 눈만 크고 목이 긴 아이는 이 세상 초록빛에 눈이 멀어 가시나무 들찔레 덩굴에 마구 찔리고 찔려서 돌아오는 해질녘 길은 언제나 자욱히 목이 메는 안개였다. 거리엔 사방에 <통행금지> 푯말이 붙어 있었다 5) 여자가 장식을 하나씩 달아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가는 때문이다진흙탕 속에서 홀로 솟아오르는 연꽃처럼 순수를 지향했던 그녀에게도 세월은 현실이란 옷을 무겁게 입힌 것인가. 배경으로 물러나 있던 현실적 삶의 반응들은 어느덧, 불어나는 가족들의 숫자만큼이나 점차 뚜렷해지면서, 순수지향의 초월적인 움직임과 팽팽한 긴장을 이루어 갔다. 투명한 하늘과 별을 응시하던 시선을 낮추어, 나날의 작고 큰 일들이 감추고 있는 뜻에 귀를 기울이고 손을 담갔다.
거기 당신의 꽃 난초는 푸르고 여기 나의 수국은 연보라 저 어린 것들의 喝采 같은 채송화 밭으로 둘리운 단조롭고 평화한 아내의 花園 6)
그렇게 그녀는 어느덧 40대의 언덕을 서성이고 있었다. 먼 오래 전에 초라한 코스모스 한 다발 안고 어둠 속으로 떠났던 가난한 소녀는 이제 중년의 무거운 걸음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거친 바람이었다. 아이들은 바람의 후손답게 바람이 키웠다. ‘무거운데, 무거운데, 이렇듯 무거운데,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여자가 장식을 하나씩 달아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가는 때문이다 씻은 무우 같다든가 뛰는 생선 같다든가 (진부한 말이지만) 그렇게 젊은 날은 젊은 하나만도 빛나는 장식이 아니었겠는가
때로 거리를 걷다보면 쇼윈도우에 비치는 내 초라한 모습에 사뭇 놀란다
어디에 그 빛나는 장식들을 잃고 왔을까 이 삐에로 같은 생활의 의상들은 무엇일까 7)
주어진 무엇인가를 잃고 있다는 실물의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피의 더움이 식고 난 뒤의 허전함과 편안함을 뭐라고 해야 할까? 살속의 정적? 잠잠히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신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며 잠언을 읊조리듯 조용하고 깊은 사색 속으로 침잠해갔다. 아니 침식되어 갔다.
이 가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내 의자에 앉아 있는 일이다 바람 소리 귀 세워 두어 번 우편함을 들여다 보고 텅 빈 병원의 복도를 돌아가듯 잠잠히 내 안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누군가 나날이 지구를 떡잎으로 말리고 곳곳에 크고 작은 방화를 지르고 하얗게 삭은 해의 뼈들을 공지마다 가득히 실어다 버리건만 나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한다 나뭇잎 한 장도 머무르게 할 수 없다
내가 이 가을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내 의자에 앉아 정오의 태양을 작별하고 조용히 下午를 기다리는 일이다 정중히 겨울의 예방을 맞이하는 일이다 8)
나의 하루는 아낙신 두 알을 삼키는 일로부터 시작된다“나의 하루는 ‘아낙신’ 두 알을 삼키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새벽에 눈을 뜨면 우선 전기밥솥에 스위치를 넣는다. 그리고 아이를 깨운다. 두 알의 아낙신 효력으로 얼마간 진정된 머리 속은 서서히 맑아지고, 나는 숙환에서 회복된 사람처럼 나른한 몸을 일으켜 천천히 창을 연다. 살 속까지 스며드는 냉기의 겨울바람, 버려진 뜰의 스산한 정경, 쓰고 싶다는 자의적인 충동과 써야 한다는 책임감이 동시에 엄습하는 시간이다.”어머니, 아내, 며느리로서의 일상, 일상이란 신통하게도 똑같은 일의 반복을 강요하는, 얼마간 고장난 컴퓨터 같은 것이었다. 인간 역시 조금씩 녹이 슬어 삐걱거리면서 일정한 궤도를 돌고 있는 기계의 부속품 같이 여겨졌다. 그 탄탄한 그물 속에 꼭 끼어 있는 그녀는 오히려, 늘 떠나고 있는 나그네요 객이었던 것일까?
내가 사는 마을 낡은 분수가엔 내 어머니 소시적 떠돌던 타관이 있다
해바라기 노오란 꽃울타리 양개와집 언덕 나비 리본 곱게 단 바람이 있다
이따금 비에 젖은 구름 조각이 가만히 유리창을 들여다보고 쓸쓸한 타관방의 여름이 있고 어디서나 우리 앞을 앞질러가는 運命의 차가운 발자욱이 있다 지난 20년
내가 내 어머니 소시적 떠돌던 타관의 여름날 구름이었을 때 悲哀를 무지개로 녹이던 솜사탕 장수도 널려 있었다
지금은 겨울이 퍼렇게 날을 세워 해바라기 꽃울타리 양개와집 언덕 을 쓰러뜨리고 내가 사는 마을에 이사해 왔지만
나는 아직 그 여름의 소시적 거리를 떠돌고 있고 눈부시던 타관의 햇살을 기억하고 있다 9)
‘끝도없이 밀려오는 이 상실감, 무엇을 잃어버린 거지?’“실로 무서운 것은 내 자신의 내적 변화에서 오는 걷잡을 수 없는 방황이었다. 다시 말하여 일체의 기존 상식에 대한 가치기준이 붕괴되는 것이다. 이제껏 내가 묶여 있었고 그 속에 파묻혀 있었던 기존의 생활, 기존의 상식에 대한 일체의 부정이며 모반인 것이다. 남편? 자식? 가정? 시댁? 그런 것이 모두 무의미하게만 여겨졌다. 그것들이 무엇이기에 나를, 나의 인생을, 황금 같은 젊음을 빛나는 감각을 송두리째 뿌리 뽑고, 뒤집어 엎으며 녹슬게 한단 말인가.”생활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 이외의 것에 대한 일체의 관심을 잃어버렸다면 과장일까. 온갖 상식적이고 세속적인 얽힘이 귀찮아지고, 어떠한 탈선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 기존 상식에의 모반이 오히려 가장 순수한 인간의 본질처럼 보여졌던 것이다.
夏至祭, 그것은 생애의 하류에서 띄워보는 고별장 같은 것그러나 시간은 차라리 신비였다. 그렇게 딱딱한 갑질의 깨알 속에 갇힌 것만 같았던 삶의 중류를 지나 그녀는 어느덧 생애의 하류로 접어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했던 것이다. “생동하던 모든 사물들이 끝나버리는 가을, 조락과 소멸의 때를 맞이해야 하는 시간의 하류에서 결산해보는 제사. 그런 의미에서 하지제라 이름했습니다. 물론 이 시집을 낼 때에는 제 나이 50이 넘었을 때니까 생애의 하류에서 띄워보는 고별장 같은 걸로 생각했습니다.”‘여기에 이르러서야, 내 자신은 삶을, 사사로운 것들을 부드러움의 눈길로 지그시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인가? 열악한 현실, 나를 결정지워 온 역사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쏟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신앙 안에 갈증과 번민으로 서성였던 발자국을, 짙게 새겨넣은 것도 이때부터 였으리라.’“어느 날, 나는 황량한 겨울 산길을 걸으면서 문득 잎이 진 나목들 사이로 잠잠히 붉은 빛을 드리우고 섰는 겨울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오랜 인고를 이겨온 어떤 성자의 얼굴처럼 슬프고도 엄숙해 보였다. 순간 나는 그 인고의 겨울 태양에서 무한히 고독해 보이는 그리스도의 고상을 연상하였다. 그리고 차츰 슬프도록 엄숙한 인고의 모습이 알 수 없는 파문을 가슴에 일으키는 것을 느꼈다.” 돌아서면 까맣게 당신을 버리나니 버리고 그 문 밖에서 내가 떨거나 혹은 나의 문 저편에서 당신이 떨거나 우리는 그같이 서로 하나이기 원하며 하나이지 못하는 G선상의 아리아 날마다 하나씩 늘어가는 죄목과 날마다 한눈금씩 자라는 십자가를 지고 오늘도 나의 빈 영혼의 병실엔 바람 부나니 버리고 못 잊는 회한과 不忘의 바람 부나니 서른세살 청무처럼 살다간 한 사내의 삶과 죽음의 아리아가 울리나니 나의 병실엔10) 신의 섭리에 따르는 길, 곧 順命의 길은 자신의 살 속의 정적을 들여다보는 길이었다. 자신의 안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곧 자신을 되살펴보며 자신의 의미와 몫을 따지는 일이고 길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내면 속에 사원을 살피는 일은 나아가 자기 둘레의 하찮은 나뭇가지나 난초들, 그것들의 속뜻과 몫까지를 살피는 것으로 확대되어 갔다.
노을이 저녁 뜰에 새빨간 유서를 뿌리고 돌아간다
꽃들이 아름다운 최후를 진술하고 두꺼운 책장을 하나씩 닫는다
뜰은 남은 이야기를 지우며 커다란 손으로 묵화를 친다 혼자 사는 사람의 정결한 눈매로 묵화를 친다
슬프지도 않은 비극이 날마다 반복되고
살아남은 꽃들이 무서움도 없이 어둠 속에 웃는다
누가 저 어둠 뒤에 숨어 꽃들의 희망을 흙으로 덮고
다시 하얗게 바랜 새벽의 시체를 널고 있는가
참담한 것은 아무도 그 손의 집행을 의구하지 않는 일이다
아침이면 말갛게 꽃들의 죽음을 잊어버리는 일이다11)
한 사발의 목숨 위해 날마다 일심으로 늙기만 해요 자신의 내부에 있는 비밀의 사원과 주변의 물상들에 대한 깊은 응시는 자연스럽게 주변사람들과 사회로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지나치게 완강함을 인식해야 했다. 곧바로 맞서기 보다는 한 걸음 물러나, 분노보다는 차거운 웃음으로 응시하는 것이 계속 대응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 즈음의 그녀의 시가 풍자요 알레고리가 되었던 것은 그때문이리라.
날지 못할 날개는 떼어버려요 지지 못할 십자가는 벗어놓아요 오척단신 분수도 모르는 양심에 치어 돌아서는 자리마다 비틀거리는 무거운 짐수레 죄다 비우고 손털고 돌아서는 빌라도로 살아요 상처의 암실엔 침묵의 쇠 채우고 죽지 못할 유서는 쓰지 말아요 한 사발의 목숨 위해 날마다 일심으로 늙기만 해요 형제여 지금은 다친 발 동여매고 살얼음 건너야 할 겨울 진군 되도록 몸은 작게 숨만 쉬어요 바람 불면 들풀처럼 낮게 누워요 아, 그리고 혼만 깨어 혼만 깨어 이 겨울 渡江을 해요12)
그녀의 수맥을 이루고 있는 비애의 정서가 이렇듯 역설적이고 자학적인 감정으로 바뀌게 된 것도, 사유의 힘이 적극적으로 개입된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유는 물론 현실적 삶의 분열상과 혹독함을 회피하지 않고 적시하게 만들어줬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적대가 아니었다. 기독교적인 올바름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깊은 응시였다. 세계에 대한 사랑의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긴 정신적인 여정은 어느덧 사람살이의 보다 큰 이치의 세계에 닻을 내리게 된 셈이었다.
우리는 안다. 날마다 제 키보다 긴 유서를 쓰는 것을 그런 담금질 속에서 그녀는 순수와 현실, 어느 쪽으로부터도 등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자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안다 우리가 날마다 얼마나 근심하며 나이를 먹는가를 나이를 먹으면서 어떻게 자신에게 이별을 하는가를 한두 올씩 나부끼는 이마의 백발을 남몰래 뽑아내며 부르튼 영혼의 발꿈치를 절룩거리며 오랜 굴종으로 늙은 가업처럼 이 세상 율법에 순종하면서 날마다 제 키보다 긴 유서를 쓰는 것을 시간은 길고 긴 운하를 가슴에 파며 백 년의 강물을 흘러가고 불기 없이 싸늘한 아침 식탁에 물도 없이 삼키는 굳은 모래빵 우리의 위장은 그렇게 이별을 씹는 날 선 이빨이 되고 익모초 쓴 맛에도 길들어 갔다 황혼은 저녁마다 이름 모를 음악으로 슬픔을 다독여 창가에 세우지만 다시 내일을 기다리는 꿈도 꾸지만 기다리는 일에 끝이 있던가 마지막 이별에 보류가 있던가 살아 있는 날의 지상의 놀이, 이별과 기다림 그 잔을 약처럼 조금씩 마시며 산다13)
현실반응과 순수지향이 앞뒤 없이 하나로 융화된 세계, 곧 체관의 정서를 아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출렁이며 가라앉는 흑백의 수면 위에 비로소 떠오르는 知命의 얼굴 구멍난 영혼의 성벽 위에 오늘은 유서처럼 펄럭이는 기를 꽂는다 내 생애 바치는 평화의 降書 이제야 따뜻하게 옷을 벗는 허무를 만나 아름다운 距離로 손 잡는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마지막 사랑의 동행을 시작한다 14)
따뜻하게 옷을 벗는 허무! 체관의 아름다운 距離에서나 가능한 통찰이다. 이제, 그런 깊이로 마지막 사랑의 동행을 시작하는 것이리라. 진흙밭에 뿌리를 내리는 연꽃처럼, 현실로부터 그 자양분을 얻으며, 맨 처음부터 그랬듯이 순수지향에의 길을 떠나는 것이리라. 타관의 햇살 하나 머물 집 마련을 나선 것이리라.
돌아가야지 전나무 그늘이 한 겹씩 엷어지고 국화꽃 한두 송이 바람을 물들이면 흩어졌던 영혼의 양떼 모아 떠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가서 한생애 버려뒀던 빈 집을 고쳐야지 수십년 누적된 병인을 찾아 무너진 담을 쌓고 창을 바르고 상한 가지 다독여 등불 앞에 앉히면 만월처럼 따뜻한 밤이 오고 내 생애 망가진 부분들이 수묵으로 떠오른다 단비처럼 그 위에 내리는 쓸쓸한 평화 한 때는 부서지는 열기로 날을 지새고 이제는 수리하는 노고로 밤을 밝히는 가을은 꿈도 없이 깊은 잠의 평안으로 온다 따뜻하게 손을 잡는 이별로 온다 15)
돌이켜보면 세상은 풀 수 없이 흩어진 암호의 숲이었다. 그 알 수 없는 숲에 갇혀 흔들리는 하나의 의문 부호로 서서 손끝만 스쳐도 속절없이 울리는 악기처럼 울어왔던 것이다. 일찌기 코스모스 한 다발 안고, 순수를 지향하며 벅찬 여행을 떠났던 소녀, 그렇듯 기인 강을 흘러와 또 어디로 가려는 슬픈 아우성이기에 노시인의 가슴에는 젖은 비가 내리는 걸까?
한 생애 깨어서 듣는 빗소리는 창 밖에 나직이 하직 고하고 먼 세상 끝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발소리 같다
그 소리 귀로 하염없이 좇아가면 어디선가 내 영혼 소슬히 귀가 열리고 영원의 한 끝에 닿을 듯도 싶다
눈 멀고 귀 먹었던 청춘의 어두운 뒷모습들 실밥 터진 옷 사이 붉은 헌디들이 희미한 자막으로 해종일 지나가는 창 밖에 다시 이 해의 봄비 내리고 우리의 시간이 저물어간다 때의 위대한 해시계가 저물어 간다 16)
홍선생 근황은? “나는 날마다 기다립니다. 하나의 감동이 어디선가 찾아와 나를 흔들어 깨우고 무성한 상상의 숲으로 이끌어가주는 저 행복한 고독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1996년 3월호)
주1) 詩 <그 시절 겨울들은>중에서 주2) 詩 <낙엽의 노래>중에서 주3) 詩 <가을>중에서 주4) 詩 <눈 내리는 길로 오라>에서 주5) 詩 <放牧時代(약력4)>에서 주6) 詩 <아내의 화원>에서 주7) 詩 <장식론>중에서 주8) 詩 <이 가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에서 주9) 詩 <타관의 햇살2(내가 사는 마을)>에서 주10) 詩 <나의 예수>에서 주11) 詩 <꽃들의 생애>에서 주12) 詩 <사는 법2>에서 주13) 詩 <지상의 양식(이별과 기다림)>에서 주14) 詩 <知命의 겨울>중에서 주15) 詩 <가을 집짓기>에서 주16) 詩 <빗소리에 깨어서>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