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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정현종
바람의 아들의 철학적 귀향
장경기
태초에 바람이 있었다.
태초에 바람이 있었다. 천상에는 바람의 나라가 있었다. 바람들의 어우러짐이었다. 바람들은 자신들의 거처로 나무를 빚어내기도 하고 꽃을, 돌을, 흐드러지는 들판을 빚어냈다가는, 이내 흐트러져 사람을 빚어내기도 하였다. 수천의 바람들이 어우러져 커다란 새를 빚어내어, 하늘을 날다가는 이내, 수천의 나비들로 흐트러지며 허공을 수놓기도 하였다. 그러던 나비들은 제 스스로를 풀어헤치고 다시 하나로 어우러지며 휘황한 리듬의 불꽃으로 타오르기도 했다. 희디흰 눈송이로 내려보기도 하고, 얼음 속에 물고기로 흐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바람나라에 온갖 꽃나비, 벌레, 사람들, 구름, 비, 강물은 제 각각 모습을 달리하고 있었으나, 실은 한결같이 바람이 빚어낸 것이었고 바람의 거처였으며 바로 바람이었다. 그것들은 온전히 하나이면서 동시에 수천이었고, 조화로운 리듬 속에 섬세한 한 떨림이었다“해는 출렁거리는 빛으로 내려오며 제 빛에 겨워 흘러넘친다. 모든 초록, 모든 꽃들의 왕관이 되어 자기의 왕관인 초록과 꽃들에게 웃는다, 비유의 아버지답게 초록의 샘답게 하늘의 푸른 넓이를 다해 웃는다. 하늘 전체가 그냥 기쁨이며 神殿이다. 해여, 푸른 하늘이여, 그 빛에, 그 공기에 취해 찰랑대는 자기의 즙에 겨운, 공중에 뜬 물인 나뭇가지들의 초록 기쁨이여. 흙은 그리고 깊은 데서 큰 향기로운 눈동자를 굴리며 넌지시 주고받으며 싱글거린다오 이 향기. 싱글거리는 흙의 향기. 내 코에 댄 깔때기와도 같은 하늘의 향기 나무들의 향기!”1) 이렇듯 존재와 존재들 사이에 이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던 천상의 바람나라에 다른 바람들과는 어울리려 하지 않는, 경직된 바람들이 생겨난 것은 언제부터 였던가. 그 일부의 바람들은 스스로를 다른 바람과 구별하기 시작하였고, 자신들만의 집을 지었고 그 속에만 웅크렸다. 제 스스로를 풀어헤치면서까지 다른 바람들과 어우러지려 하지 않았다. 바람 부는 법, 바람의 절도 등이 연구되었고 제도화되었다. 바람의 아이들은 더 이상 벌판에 분방하게 꽃으로 혹은 나비로, 벌레로, 물로 어우러지며 놀지 않았다. 특히 바람의 왕이라고 불리는 자는 탄탄한 바람의 궁전을 지었다. 바람의 움직임도 왕도에 따랐다. 왕자 역시 더 이상 벌판에서 마음껏 꽃들을, 풀잎들을 간질이며 함께 어우러질 수 없게 되었다. 바람의 제복을 입고 바람의 궁전, 고요의 정적 속에 굳어 있어야 했다. 바람은 진지하고 심각했으며 무거워 졌다. 바람의 거처에 지나지 않았던 나무, 꽃,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자유롭게 변형을 하지 않았으며, 그 자체가 하나의 주체로서 여겨지기 시작했다. 서로는 보이지 않는 바람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각 존재들마다 자신들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어느덧 나무로 꽃으로 사람으로 사슴으로 굳어진 바람들은 천상의 바람나라에서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너무 무거워져 천상에 머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바람의 고향, 곧 모든 존재들의 고향으로부터의 떨려남이었다.
지상에 추락한 바람의 무리들 속에서 태어난 바람의 왕자 추락한 바람들은 하나같이 지상에 뿌리를 내렸거나 지상 위를 날아다니기도 하였다. 미처 물질로 화하지 못한 바람들은 허공 중을 떠돌며, 바람의 집인 꽃, 새, 나무들의 이파리에 비비기도 하였다. 바람의 왕자였던 玄이 태어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지상에 추락한 바람의 무리들 속에서 였다. 1939년 12월 17일,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3가 224번지, 그가 첫 인연을 맺은 땅이었다. 바람의 천성에 따라 그는 산으로 들로 혹은 강으로 뛰어다니며 메와 칡뿌리를 캐어 먹고 메뚜기와 개똥벌레를 잡기도 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머리에 아스라이 드리워져 있는 안개를 보면서, 끝 모를 상상을 펴기도 했고, 천진하게 반짝이는 별들을 보면서 까닭 모를 그리움을 느끼기도 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저 아슬아슬하게 재미있는 숨바꼭질이 시작되거나 개똥벌레에 홀려 논두렁, 밭두렁을 헤매고 다녔다. 어둠 속에서 여기저기서 반짝이는 반딧불을 잡으려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그 몰두와 집착은 문자 그대로 홀린 모습 그대로였다. 아! 어떤 게 반딧불이고 어떤 게 아이들의 눈동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던 그 발광채들, 온 밤에 가득 피었던 그 꿈의 덩어리들……”그러나 한편으로 玄은 부모의 손을 잡고, 바람의 절도, 바람의 길을 배우는 데에 나아갔다. 세례명은 알베르토, 동네 부근에 있는 약현 성당이었다. 단단한 벽돌 벽으로 쌓아올린 그 신전은 엄숙했고 진지했다. 그만큼 玄은 숨이 막혔다. 玄은 무거운 아버지를 닮지 못함에 죄책감에 쌓이며 자책하기도 했다. 바람으로 흔들리려는 자신을 억제했다. 본래 바람이 빚어낸 바람의 집이었던 그의 육체는 더욱 견고하게 굳어졌고 바람을 가두는 냉동실이 되어갔다. 어느덧 바람의 거품에 지나지 않았던 自我가 오히려 바람을 육체 속에 단단히 억류하고 그 존재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게 된 것이었다.
몽상의 천국에서야 태초의 바람으로 다시 부활하는 바람의 왕자 바람의 왕자 玄은 어느덧 14세가 되었다. “사춘기를 살고 있는 미성년에게 성에 대한 호기심은 사회적인 금기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집은 천주교를 믿고 있었던 집안이어서 1주일에 한 번씩 고행성사를 하는 게 의무처럼 되어 있었으니 겹겹이 억압적인 환경에서 지내야 했다.”육체는 죄, 죄가 득실거리는 뭉툭한 덩어리로 여겨졌다. 그러나 인생에도 초봄이 오면, 단단히 포박해 놓은 바람마저 뜨거움으로 서성이는 것인가. 그는 자신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떨려오는 간절함으로 되뇌이곤 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2) 그리고, 뭐라 이름지을 수 없는 욕구에 끌려 몽상의 천국 안으로 안으로 빨리듯 들어갔다. 몽상의 문은 책이었다. 그 속에서나마 바람은 마음껏 휘몰아쳐보고 마음껏 제 본성대로 뛰어 놀았던 것이다. 현실로부터 벗어나 거룩한 천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어떻든 책 읽기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좁은 세계, 코앞의 닫힌 현실에서도 재갈도 박차도 고삐도 없이 떠나며 가는 곳은 거룩한 선경이다. 그 선경에다 어떤 이름을 붙이든지 간에 그것은 하여간 다른 현실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책에 빠져 있는 상태란 정도의 차이가 있는 대로 달랠 길 없는 뜨거운 선망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것이 허구의 세계라는 점에서 신기루를 따라 가는 일일 테니까. 그리하여 우리가 손으로 넘기는 책장은 슬기로운 회오리바람의 날개이며 우리는 그 날개를 타고 몽상의 천국을 향해 간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몽상의 천국에서 다시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玄은 자유이고자 하는 바람의 본성과 이를 억압하는, 특히 자신의 육체 속에 억류되기를 강요하는, 푸른 고해의 현실 사이에서 갈등해야 했다. 그의 내면 속에 이는 바람은, 육체가 오히려 감각의, 체험의 세계로 나아가, 바람의 모습으로 타오르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특히 끝없이 죄를 고백하고 현실을 부정해야 하는 종교적 계율 속에 자신을 묶어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감히 내면의 뜨거운 욕망의 실현을 바라지도 못했다. 정신적인 딜레마에 빠져들게 된 것이었다. 이런 그에게 방향을 제시해준 것은 앙드레 지드 그리고 헤르만 헷세와 희랍신화였다. 그들이 보여준 세계는, 감각의 체험과 욕망의 실현을 통해 영원한 이상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영원한 가치 혹은 종교적 가치란 육체의 감각을 통해, 혹은 구체적인 삶의 경험을 통해 체득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감각을 통하여 얻은 지식이 아니면 진정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행동의 선악을 판단하지 말고 행동할 것. 선인가 악인가 개의하지 말고 사랑할 것. 나타나엘, 나는 그대에게 열정을 가르쳐주리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감탄하는 사람이다. 바닷가에 모래가 부드럽다는 것을 <읽기만> 하여서는 만족할 수 없다. 나의 맨발이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중략)…먼저 감각을 통해서 얻은 지식이 아니면 나에게는 소용이 없다.” 바람의 육화, 바람의 화신을 보았다
로얄발레를 본 때는 이렇듯 玄이 느낌을, 체험을, 자유를 갈망하던 어느 날이었다. 발레의 춤은 곧 바람의 춤이었고 바람의 화신이었다. “그대 불붙는 눈썹 속에서 日光 은 저의 머나먼 航海를 접고 화염은 타올라 踊躍의 발끝은 당당히 내려오는 별빛의 서늘한 勝戰 속으로 달려간다. 그대 발바닥의 花鳥들은 끽끽거리며 수풀의 寢床에 傷心하는 제……”3) 확신과 熱愛의 손을 운행하며, 바람의 휘황한 리듬의 불꽃으로 타오르며, 하늘을 향해 踊躍하는 발레리나는 바로 바람의 모습, 육화된 바람이었다. 춤을 보면서 비로소 그는 그동안 어둡고 약하고 짐스럽게 여겨졌던, 자신을 억류하는 것 같았던 육체에서, 오히려 아름다움을 느꼈던 것이다. 육체의 주인인 바람에 의해서 연주될 때, 육체는 차라리 황홀한 충격이었다. 그 충격은 번개처럼 와서 그 자신의 육체 속에 우레로 흐르다가 눈물이 되어 나왔다. 그 율동의 아름다움에 도취해 눈물을 흘린 것이었다. 거의 벌거벗은 듯한 여의 육체 앞에서의 뜨거운 눈물. 그 눈물은 이제까지의 육체에 대한 혐오감을 완전히 씻어 내리고, 살의 아름다움을, 생살 한 꽃송이를 그의 내면 속에 새겨놓았다. 그 뜨거운 바람의 몸짓을! “바람 부는 날 저는 바람이었어요. 수 없는 빗방울이 몸에 다 아프고 수 없는 바람이 다 제 숨을 번쩍이며 끊게 하여 학교도 거리도 꿈도 다 무서웠어요. 저의 삶인 제 방이 무서웠어요. 아마 포도주를 마셨지요. 甁과 하나님을 나란히 놓고. 아마 즐거웠는지…… 아마 베개에도 피가 흐르고 있었는지……”4) 바람과 자아의 갈등이 시작되다.
그러나 그가 바람이려 했을 때, 제 스스로로부터 벗어나려 했을 때, 죽음이라는 이미지가 검은 허공처럼 그의 앞에 커다란 아가리를 벌렸다. 인생이 봄이던 시절에 누구나 열병처럼 겪게 되는 괴이함이리라. 죽음! 玄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아의 해체를 의미했다. 자아는 바람을 가둠으로써 비로소 생겨난 거품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의식의 맨 끝은 항상 죽음이었네. 구름나라와 은하수 사이의 우리의 어린이들을, 꿈의 병신들을 잃어버리며 캄캄한 혼란 또는 괴로움 사이로 인생은 새버리고, 헛되고 헛됨의 그 다음에서 우리는 화환과 알코올을 가을바람에 나누며 헤어졌네. 의식의 맨 끝은 항상 죽음이었고, 죽음이었지만 허나 구원은 또 항상 가장 가볍게 순간 가장 빠르게 왔으므로, 그때 시간의 每마디들은 번쩍이며 지나가는 게 보였네.”5) 그의 철학의 출발점은 죽음이 되었다 바람이기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자아가 사라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바람이 원래 주인임을 인식해야 하면서도, 그 자신이라고 인식되는 自我를 또한 사라지도록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초기에 정현종이 세계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인식한 것은, 의식의 맨 끝은 죽음이며, 삶이란 그 죽음으로 가는 혼란스러운 길이라는 실존주의적 세계관 때문이다.’“삶의 마지막에 남아 있는 것이 죽음뿐이라면, 삶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한 인간 내에서 자아와 바람 사이의 갈등이 연주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으로 인식되고 있는 자아가 실은 바람이 잠시 머무는 거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소멸의 운명에 있는 부수적인 존재, 껍질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바로 공포. 끝 모를 무거움이었다. 그러나 이미 긴 잠에서 깨어나버린 바람은 玄의 내부에서 불꽃으로 회오리치며 제 먼 고향, 천상을 향해서 촉수를 뻗고 있었다. 어떻게 바람의 고향, 아니 모든 존재들의 고향인 천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玄이라는 바람의 화두는 그것이었다. “평면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잘라서 그 단면을 보라. 거기 곤두선 수직의 시간이 전율하고 있다. 직립한 시간의 떨림. 춤추는 발레리나들. 육체가 닿을 수 있는 극치의 초월적인 리듬, 죽음이 없는 리듬의 불!” 죽음이 없는 리듬의 불로서 거듭날 수 있을 때 자신은 비로소 저 초월적인 리듬, 바람의 고향에 깃들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었다.
바람의 천사가 내려오다
“나는 밤새도록 집에 없었네. 술을 마시며 만족의 바닥 없는 늪 속을 낯선 데로 구걸하며 가고 있었네. 그대들 애처로운 불빛들을 달고 뚜렷한 惡童들이 되어 뚜렷하지 않은 길을 따라 賓客들로 오신 그대들, 바깥에는 바람이 불고 나는 밤새도록 집에 없었네구걸하며 빈객으로 오신 그대들. 어떻게 먼 길을 별빛이 별빛에게 건너가고, 죽음이 따로 따로 되어 거리에 다채롭게 넘치고 있음을 아는 그대들은 보았겠지. 나 밤새도록 지붕 위에 올라가 떨며 앉아 있음, 뜨겁게 뜨겁게 떨며 앉아 있었음을.”6) 바람은 지붕 위에 올라가 떨며 갈구했다. 천상 어딘가에 있을 바람의 고향,천년 전에도 있었고 천년 후에도 있을 그 모든 존재들의 고향으로 깃들 수 있기만을, 자신이 다시 온전한 바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만을!그런 갈증의 어느 날이었다. 천상에 바람나라의 天使는 번개처럼 그에게 엄습해왔다. 그 초월적인 내방객은 그의 삶이 갑자기 자신에게도 낯설고 무서운 것이 되게 했다. “빗소리들이 천장을 뚫고 주룩주룩 내려, 살에 비 굵기 만한 구멍을 냈고, 천둥이 치면 그것은 격렬하고 거대한 지진처럼 몸 속을 소용돌이쳐 통과하면서, 날카로운 얼음 끝에 빛나는 햇빛처럼 번쩍이는 번개와 전류로 몸을 떨게 하는 것이다.”그러나 玄은 이런 공포의 바람에 오히려 도취되었다. 정신이 아픈 하염없는 취기였다. “하여, 나는 세월을 패물처럼 옷깃에 달기 위해 떠나려는 정령을 마중 가리. 不足으로 끼룩대는 속의 공복을 대해어류 등의 접시로도 메꾸고…… 그 뒤에 댕기는 음식과 어둠은 온 바다의 고기떼처럼 살 속에서 놀아 아픔으로 환히 밝기도 하며.”7) 天上 天使의 부름에 그는 온몸으로 답했다. 바람은 그의 내면에서 거대한 바다로 출렁였다. “내 집은 문전까지 출렁이는 바다가 와 닿아 애인이 보내주는 바람과 물결 위로 달빛이 하늘에서 떠나듯이 나는 떠나서 흘러들고 있었고 바뀌는 바람소리 때문에 또는 시달리고 있었네.”8) 그러나 이런 시달림마저 벅찬 도취였던, 바람의 천사와의 교감은 너무도 빨리 끝나버렸다. 그에게 번개처럼 엄습해 왔던 바람의 천사가 휘황한 불꽃으로 회오리치며 천상으로 다시 사라져가버린 지상은 그야말로 죽음의 지대, 미동의 움직임도 없는 정적만이 있는 지대임을 실감해야 했다. “나는 피에 젖어 쓰러져 있는 한 무더기의 고요를 본다. 고요는 한 때 빛이었고 고요 자신이었고 침묵의 사랑하는 전우였다나는 피에 젖어 쓰러져 있는 한 때의 침묵을 본다. 말은 침묵의 꼬리를 침묵은 말의 꼬리를 물고 서로 기회를 노리고 있다. 죽도록 원수처럼 노리고 있다”9) 이 완강한 無! 철면피한 물질들의 세계를 그는 보아야 했다. “끝없는 물질이, 능청스럽게 드러내고 있는 물질이 치열하고 철면피하게 기억하고 있는 죽음. 내 귀에 밝게 와서 닿는 눈에 들어와서 어지럽게 흐르는 저 물질의 꼬불꼬불한 끝없는 迷路들,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능청스런 치열한 철면피한 물질”10)지상은 철면피한 물질들의 덩어리, 덩어리들의 모임, 덩어리들의 고독이었다. 이를 인식하는 순간, 그에게 의미 있는 미소로 떠오른 이는 그 천상으로 사라진 천사였다. 그리고 천사가 자신에게 남겨놓은 숙제가 무엇인가를 알 것 같았다. 바람의 왕자인 玄이 할 일. 그것은 철면피한 물질들로부터 그 안에 단단히 억류되어 있는 바람을 구출해내는 것. 바람의 해방!철면피한 물질들을 다시 바람이게 하는 것이었다.
바람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섬이 되다
그는 사물의 완강한 어둠과 침묵을 뚫고 들어가고자 했다. 철면피한 물질을 뚫고 그것으로부터 말을 끌어내려 했다. 무 속에 원수인 말, 말 형상의 구멍인 말의 탄생의 통로를 여는 것이었다. “상상력 혹은 꿈의 유혹. 상상적 세계의 탄생, 그것은 외양이 남루하고 거지처럼 버림받은 듯이 보이는 사물들이 실은 그들의 가슴 깊이 비밀을 숨겨가지고 있는 밀사임을 알아보는 일이고, 사물 속의 빛과 생명을 끌어내서 더불어 빛나며 노는 일이며 혹은 자기 자신이 밀사가 되어 버림받고 잊혀진 사물들로 하여금 그들의 자리를 누리게 하는 일이다. 정신의 준마를 달려 사물의 고향을 되찾는 일!” 玄은 상상의, 꿈의 촉수를 뻗어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근 다른 사물들 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리하여,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바람들과의 교감을 시도했다. 玄에게 있어서는 그 교감의 방법이 바로 문학이었다. “문학은 그것을 통하여 과거를 아는 단순한 역사나 사회사가 아니다. 문학은 예컨대 어떤 한정된 집단이나 계급의 진실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인간의 진실을 담는 그릇이다.” ‘완강한 외계의 사물, 우리를 초월하는 저 침묵의 존재에서 말을 끌어내기, 완강한 어둠의 폭력에 상처 입은 채, 사물 속으로 파고들어가기, 空에게 色쓰기, 그것은 바람의 사랑이었다. 그것은 아무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 사물을 욕정에 달뜨게 할 줄 아는 천품을 가진 자에게나 가능한 것이었다.’
밤이 자기의 심정처럼 켜고 있는 街燈 붉고 따뜻한 街燈의 정감을 흐르게 하는 안개
젖은 안개의 혀와 街燈의 하염없는 혀가 서로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빨아들이고 있는 눈물겨운 욕정의 親和.11)
사물, 무기질 속에 죽음이라는 상태로 있는 바람을 일깨우는 것, 그것은 곧 생명으로의 변화였으며 에로스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玄은 사물의 서방이 되었다. 그의 시는 세계와 가장 완벽하게 화간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의 시는 사물과 사물 사이에 바람을 일으킴으로써, 사물과 사물, 시인과 세계 사이에 교감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사물과 사물은 그 사이에 움직임이 없으면 서로 독립된 존재, 비존재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사이에 어떤 움직임이 개입되면 두 사물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그 움직임이 바로 바람인 것이다.” 다시 에로스로 부활하는 타나토스여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 바람이 휘황하게 불꽃으로 타오르면서, 자아의 위태위태함 또한 더욱 절박하게 다가왔다. 바람은 자아를 모래처럼 분해시키려 하는 것이다. 바람의 본성은 곧, 우주의 무한한 변화와 그 변화가 숨기고 있는 신비한 힘이었고, 그 앞에서 자아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간이라는 이름의 유한한 존재인 그는 자신에게 곧 닥쳐올 확연한 해체 앞에서 공포에 떨어야 했던 것이다. “깊은 데로 찌르며 꽂혀오는 바람! 쓰레기는 가장 낮은 데서 취해 있고, 별들은 天空에서 취해 있으며 그대는 中間의 다리 위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음을. 거리에서도 熱烈히 筋骨 속에 潛入하여 내 靈肉은 急해 어둠이 혹은 번뜩인다는 사실을. 胸壁에 한없이 끈적거리며 불붙는 너는 달려 달려 라고 소리치며 무서운 誠實을 彈奏한다.”12) 허나 어쩌랴. 해체되는 자신의 한가운데에서 바람은 비로소 온전한 자유로움으로 탄생하는 것을,“보아. 너의 주는 모래와 어둠을 열며 하늘 바닥에 굽이 이는 나무의 뿌리눈들. 서른두 개의 齒牙의 肉親인 별…치아여. 한없이 매여도는 느닷없는 圓舞여.12)뜬눈과 惡寒으로, 뜬눈과 악한으로 이 新郞의 燈明은 떨리이니, 냅뜨는 너의 深淵을 내 위기로 壓迫하여 오오 나는 波濤치리”12)그는 이미, 자신의 해체를 통해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에로스의 부활을 이룰 수 있음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나토스를 통해서 에로스는 부활하는 것임을, 결국 창조적인 것은 끊임없는 해체와 소멸의 리듬을 이겨낸 생성임을!그는 비로소 언어와 사물을 형이상학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 정령이 된 것이었다.
바람의 사제, 생살의 꽃송이로 피다
그는 사물과 더욱 친화되어 가는 방법을 모색하고 실현해나갔다. 교감의 단계에서 더 나아가 융화의 단계로 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크리슈나무리티와의 만남은 기쁨이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이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지식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즉 자기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완전한 주의력을 가지고 전반적으로 바라보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 속의 혁명을 통해 천진하게 다시 태어나는 삶의 방법을 가르쳐준다.>“크리슈나무르티에게 미덕이 있다면 <침묵으로서의 말>을 하려고 하는 데 있다. 그의 말은 관념적 논리나 개념화하고 거리가 멀다. 말하자면 그냥 보여주려고 한다. 그런데 문학에서 침묵에 가장 가까운 말이 詩이다. …….” 배우가 슬픔 자체가 되고 기쁨 자체가 되며 말 자체가 될 때 진정한 배우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된 그는, 즐거울 때까지 즐거워하고 슬플 때까지 슬퍼하고자 했다. 모든 즐거움을 완성하려 하는, 모든 슬픔을 완성하려 하는 시인이고자 했다.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다운 詩이고자 했다. 쓸 데 없는 것의 쓸 데 있음, 적어도 쓸 데 없는 投身과도 같은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그럼으로써 동화의 세계로, 융화의 세계로 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생명! 그가 통합적인 세계관, 융합적인 세계로 나아가면서부터, 그에게 가장 근원적인 가치로 떠오르는 것은 바로 생명이었다. “시의 공간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태이며 씨앗입니다…….우리의 의식과 감수성이 충분히 신선하고 민감할 때 우리가 정말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시는 이러한 신선함과 민감성을 회복시키는 숨결입니다. 시는 우리를 마비시키는 모든 것에 대한 저항이기 때문에 우리는 시를 또한 생명의 숨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람이 우주의 숨이듯 시는 우리의 마음을 바람처럼 움직여 우리를 활력 속으로 열어놓으며 그래서 세상의 생기의 원천이 되어왔습니다.”“환합니다. 감나무에 감이, 바알간 불꽃이, 수도 없이 불을 켜 천지가 환합니다. 이 햇빛 저 햇빛. 다 합해도 저렇게 환하겠습니까. 서리가 내리고 겨울이 와도 따지 않고 놔둡니다. 풍부합니다. 천지가 배부릅니다. 까치도 까마귀도 배부릅니다. 내 마음도 저기 감나무로 달려가 환하게 환하게 열립니다.”13)그가 바람이고자 했을 때, 그는 이 세상에 물을 주고 숨통을 터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사물과의 친화력이 깊어가면서, 그의 바람은 어느덧 생명사상의 씨앗으로 여물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나는 생명현상들에 감동합니다. 모든 생명의 움직임에 감동하지 않고는 시가 나오지 않는 것이니까. 옛날이라고 해서 그렇지 않았을 리 없겠습니다만, 근년에 한결 더 그렇습니다. 숲에 가서 초록 나뭇잎과 풀들을 보면 어떤 때는 거의 狂喜에 가까운 기쁨으로 부풀어오르고, 날으는 새들, 꽃들, 풀벌레 같은 것들이 너무 사랑스러워 감탄하며 혼자 웃기도 하는 것입니다만, 사실 생명의 기쁨은 무슨 추상적인 이념이나 거창한 철학 속에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작은 것들 속에 들어 있습니다.”
파랗게, 땅 전체를 들어올리는 봄 풀잎,하늘 무너지지 않게 떠받치고 있는 기둥 봄 풀잎14)
“새로 낳은 달걀 따뜻한 기운, 생명의 이 神聖感, 우주를 손에 쥔 나는거룩하구나. 지금처럼 내 발걸음을 땅이 떠받든 때도 없거니!”15)바람은 어느덧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자연 그대로의 모든 것을 자연으로 받아들이며 모든 사물을 포옹하려 했다. 그럼으로써 사물들 속에 웅크린 모든 바람들을 이끌어내고 해방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 복도에서 기막히게 이쁜 여자 다리를 보고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골똘히 그 다리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주 오던 동료 하나가 확신의 근육질의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詩想에 잠기셔서…… 나는 웃으며 지나치며 또 생각에 잠긴다. 하, 족집게로구나! 우리의 고향 저 原始가 보이는 걸어다니는 窓인 저 살들의 번쩍임이, 풀무질해 키우는 한 기운의 소용돌이가 결국 피워내는 생살 한 꽃송이(시)를 예감하노니……” 16) 지하로, 무겁게 가라앉으려는 존재들을 위로 끌어올리려는, 상승시키려는 생살의 싱그러운 꽃송이로 피어나는 詩魂!이제 지상에 유배된 바람들에게 어울리는, 진정한 바람의 집, 바람의 나라를 지을 수 있기를 꿈꾸며, 생그럽게 춤추는 발레리나.
<거꾸로 걸어다니는 사람과 서서 자는 사람,눈감고 보는 사람과 온몸으로 듣는 사람,끌어안을 때는 팔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는 사람,발에 지평선을 감고 다니는 사람,자동차 운전 못하는 사람,원시주의자들,말더듬이,굼벵이,우두커니,하여간 그런 그악스럽지 못한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게 방이 많은 집 하나 짓는 일이야.>17)
지금 바람의 아들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섬으로 있다.
정선생 근황은?
“거창 학동마을에는 바보 만복이가 사는데요. 글쎄 그 동네 시내나 웅덩이에 사는 물고기들은 그 바보한테는 꼼짝도 못해서 그 사람이 물가에 가면 모두 그 앞으로 모여든대요. 모여들어서 잡아도 가만 있고 또 잡아도 가만 있고 만복이 하는 대로 그냥 가만히 있다지 뭡니까. 올가을에는 거기 가서 만복이하고 물가에서 하루종일 놀려구 합니다 놀다가 나는 그냥 물고기가 되구요!”18)(1995년 9월호)
주1) 詩 <초록기쁨-봄숲>에서 주2) 詩 <섬>에서 주3) 詩 <和音 중에서> 주4) 詩 <빛나는 처녀들>중에서 주5) 詩 <事物의 정다움> 중에서 주6) 詩 <기억제2>중에서 주7) 詩 <獨舞>와 <和音>에서 주8) 詩 <기억제2>에서 주9) 詩 <소리의 심연4>, <침묵>에서 주10) 詩 <철면피한 물질>에서 주11) 詩 <교감>에서 주12) 詩 <공중놀이>, <기억제1>, <주검에게>에서 주13) 詩 <환합니다.>에서 주14) 詩 <파랗게, 땅 전체를>에서 주15) 詩 <새로 낳은 달걀>에서 주16) 詩 <한 꽃송이>에서 주17) 詩 <한 그루 나무와도 같은 꿈이>에서 주18) 詩 <바보 만복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