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커버스토리 / 정진규
‘살과 뼈·몸·알’, 그 정신의 談論 읽기
김강태
능금은… ‘유혹’, 그러나 ‘아직 따지 마시오. 다만 어루만지시오’ ─ 정진규 편, 《나의 시, 나의 쓰기》 토담, 1995. 47쪽
1. 담론discourse의 양상 사랑은 마지막 선택이며 몰입 8월 17일 토요일 오후 4시, 찻집 ‘인사동 사람들’서 나는 인사동 사람이 된 그를 만난다. 고유 여름 복장인 듯한 ‘개량 한복’(윤인숙 기자가 몰래 일러주었다)이 매우 깨끗했다. 눅은 색상의 쥘부채, 펜 하나……. 묘한 느낌을 풍기는 인사동은 이제 고색을 드러내는 느낌이다. 그는 참 바쁜 사람,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그를 아는 이들이 많이 스쳐간다. 그는 ‘카스Cass파’였다. 난 ‘하이트Hite파’??데. 성급한 언급이지만, 시인 정진규를 인터뷰하기 전부터 나는 몇 개의 의문점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 처음이 1978년부터 등장한 ‘산문시’ 등(《매달려 있음의 세상》, 1979)에서부터 현재까지 완전히 사라진 마침표 행방과 이를 없앤 이유(진의眞意), 두번째는 정진규 식式 산문시의 비밀을 헤쳐보기, 세번째가 <살과 뼈>에서 <몸>으로, 다시 <알>로 전이시킨 과정 뒤의 소재가 과연 무엇일까, 라는 점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는 그의 취향이 곧 나의 관심사였다. 내가 우연히 그의 7시집 《뼈에 대하여》를 만난 날이 1986년 8월 18일. 연수차 방문한 ??대학 구내 서점의 시집 코너, 생생한 즐거움과 함께였다.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다.) 시인의 자유 분방과 깐질긴 사고 전개, 한만영 화백의 컷이 든 깔끔한 책으로서 그 당시 성기옥·김은자 씨의 평론까지 밑금치며 빠짐없이 읽었었다. 그는 말한다. ‘매일같이 씻고 닦는’ 것이 ‘시의 행위’라고.
사랑은 마지막 선택이며 몰입이라는 것을 비로소 안 셈이다. 현실적 파탄을 두려워하고서는 언제나 문전만을 서성대일 따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 <사랑 2>, 《따뜻한 상징》(문학선), 나남, 1987, 284쪽
곳곳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아포리즘은 엄연히 시인 정진규의 비밀의 문 쪽을 서성인다. 그럴 것이다. 사랑은 궁극의 선택이며 몰입이 아니겠는가. 실제로 이 시대 문명의 철저한 하수인인 우리에게, 그것 말고 또 무엇이 남을 것인가. 그것은 마지막 희망의 빵…. 우리 육체와 영혼에 순수를 가열해서 남을 사리舍利란 결국.
참 내가 얼굴이 달아올랐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앙뉘, 앙뉘, 累積의 內部에서 잃었던 表情이 되살아난다는 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나는 부끄러웠다. 새벽, 아직 어두운 門前에 거기에도 例外없이 어두움은 고여 있었는데 그 門 틈서리로 빠져 떨어지는 아침 소리. 朝刊의 音響을 듣고. ─ <朝刊> 전문
첫시집 《마른 수수깡의 평화》(1965)에 실린 작품으로 신선한 선지 냄새를 풍긴다. 그의 많은 작품을 일관하는 내향성, ‘아퍼라, 나의 물 속 울음소릴 누가 들었을까’(<모래알 但只 두 개>) 등의 중심 시구에서 진실한 부끄러움이 처녀성을 드러내며 맑게 웃는다. 사물에 대한 깔끔한 생각의 산물이다. 이러한 신중한 시적 잠심潛心은 2시집 《有限의 빗장》(1971)에 와서 ‘안과 바깥’ 세계의 험로(기로岐路)에서 망설이면서 결국은 안으로 빗장 치고 만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이란/우리집 문단속이나 잘 하는 일이었다./진종일/속에서는/뜨거운 부정으로 여러번 봉기하고/밖에서는/차가운 미소로만 여러번 쓰러지는/나의 自由’(<문단속>)라는 구절은 당시 정 시인의 심리 상태를 잘 반증하고 있다. 다음, 3시집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1977)를 순례해보자.
어쩌랴, 나는 없어라 그리운 물, 설설설 끓이고 싶은 한 가마 솥의 뜨거운 물, 우리네 아궁이에 지피어지던 어머니의 불, 그 잘 마른 삭정이들, 불의 살점들 하나도 없이 오, 어쩌랴, 또다시 나 차가운 한 잔의 술로 더불어 오직 혼자일 따름이로다 全財産이로다, 비인 집이로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하늘 가득 머리 풀어 빗줄기만 울고울도다 ─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부분
그러나, 아직 꽃의 깊이를 길어내는 純金의 두레박을 잃지 않았으며 어떠한 事物의 어떠한 飜譯도 아직은 可能하다 그러나, 싸움이 없다 이 子正에 비, 비, 비, 비만 가득 내리는데, 나의 모국어는 비에 젖는데 내 긍정의 고개짓은 지금 어디가 닿고 있는가 ─ <나의 母國語> 부분
이미지의 현란한 충돌 속에서 내면의 혼취는 지속된다. 물의 참신한 이미지가 다이나믹하다. 전자의 ‘그리운 물’·‘불의 살점’처럼 물/불의 이미지가 서로 드섞여 ‘또다시 나 한 잔의 술로 더불어 오직 혼자일 따름’으로 ‘들판의 비인 집’ 한 채만 가진 채 혈혈 울부짖는다. 후자는 전자의 ‘어머니의 불’이라는 요원한 불길을 모국어를 통해 찾고자 한다. 매몰차다. 정작 ‘그러나 싸움이 없다’. 망연히 ‘모국어는 비에 젖는데’도 그의 젖은 더듬이로 ‘긍정의 고개짓’만 하는 것이다. 문제 하나, 가열찬 이미지는 있으나 직통 목표물을 향해 달리는 가투街鬪가 없다. 리얼리티가 없다. 당시 이러한 불안한 인식과 자각이 어찌 정진규만의 것이랴. 그렇지만 고육苦肉과 비감의 생체험이 작품 배면에 진솔한 목소리로 깔려 있다. 4시집 《매달려 있음의 세상》(1979)의 내실을 노크해보자.
나는 어디를 가나 나의 符號를, 나의 呼出符號를 달고 다녀야만 한다 그러나 기다리거라 아직 나의 목소리는 젖어 있다 다시 헹구어 내고 있다 더러는 햇빛에 내어 말리고 더러는 개키어 서랍 속에 넣고 있는 중이다 기다리거라 아직은 부르지 말라 부르지 말라─ <나의 호출부호> 부분 텅 비인, 비어 있는 충만을 아시나요/가득히 와 고이는/푸른 하늘을/둘이서 길어 올렸지요, 하루종일/끝남이 없데요/거기 우리 둘이서 알몸으로, 알몸으로/溺死해도 좋은가요, 좋은가요 하느님 ─ <戀歌·1> 부분
전자에서 그늘진 곳에 자리를 편 채 방황하는 시적 화자를 볼 수 있다. 수동적 화자의 속내를 틈보는 짓은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일. 아직은 그 의식 내부를 ‘햇빛에 내어 말리’기 보다 ‘개키어 서랍 속에 넣고 있는’ 쪽이다. 후자는 비교적 적잖은 연시의 하나로 ‘거기 우리 둘이서 알몸으로, 알몸으로/익사’의 가능성을 질문하는 신선한 에로티시즘(비극성의 황홀!)이 은어처럼 매끄러이 튄다. 혼자만의 방(밀실)에서 비로소 둘이. 그러나 나는 7시집 《뼈에 대하여》(1986)와의 만남을 모진 인연의 끈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현은 ‘조정권의 시들과 마찬가지로 노장, 선의 연습인데, 충격이 없다’(《행복한 책읽기》, 문학과지성사, 1992, 23쪽)고 했지만, 아무리 일기문이라 하더라도 단편적 직감적 소회인 듯하여 부담스럽다. 어느 정도 인정은 하되, 정진규의 《뼈…》의 중심이 과연 노장老壯과 선禪의 연습일까. 조정권의 시세계와 동위원소를 따져도, 그렇게 비견해도 괜찮은 것일까. 시의 갈래가 다르지 않는가. 역방향에서 오히려 정진규 나름의 상징(상상력)의 숲을 소요한다면 어떨까. 노장의 무위無爲나 선의 세계에 대해 김현은 ─적어도 시 작품의 경우─ 일종의 컴플렉스를 지닌 것 같다. 선시풍禪詩風하면 비교적 작위作爲가 많은 풍토에서 선을 빙자한 ‘이와전와以訛傳訛 증후군’을 염려한 때문인가. 뒷시들 중에서도 가편이 많지만, 하나의 몸을 이룬 건물을 조감할 때 아직도 이 <집과 집>(《뼈…》 시집)들이 생체험으로 내 의식의 방 한 켠을 차지한다. ‘사랑은 살일까 아니다 아니다 살의 숲을 헤치고 뼈를 찾아내기’(<뼈에 대하여>)에서 보이는 견인주의, ‘사람들이 지금 따뜻하게 그것보다는, 그들이 그리워하는 따뜻하게 그것만큼씩 춥게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눈물겨워지는지 모르겠다 (…중략…) 그들의 문전마다 쌀 두어 됫박쯤씩 말없이 남몰래 팔아다 놓으면서 밤거리를 돌아다니고 싶다 그렇게 밤을 건너가고 싶다 가장 따뜻한 상징, 하이얀 쌀 두어 됫박이 우리에겐 가장 따뜻한 상징’(<따뜻한 상징>)이 주는 온기, 그 두 가지가 정진규를 그답도록 유지시키는 힘이라고 나는 믿는다. ‘부러진 말씀의 토막들을 만지면 고운 슬픔이 묻어난다’(<늦어짐에 대하여>)거나, 멋을 부렸지만 ‘절망해야 할 사람이 온전히 절망할 때 그것은 아름답다’(<눈을 기다리며>)는 시구 또한 끈적·끔찍할 정도로 아름답다. 비록 위험한, 아슬아슬한 기울기일지언정 그의 생각生覺이 예쁘다. (우리말 ‘생각’에는 ‘사려思慮’의 뜻도 들어 있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이를 한자로 내심 치부한다. 생각이란 기실 ‘생生의 각覺’이 아니겠는가. 으례 우리식 한자려니 여겨온 뭇사람들의 슬기도 인정할 일이다. ─하찮은 떼부림!)이어서 그는 ‘비워내기’(<비워내기>)와 ‘지우기’(<印朱빛>)를 반복한다. 이 행위란 존재의 먼지 털기. 그렇게 마른 속뼈를 살피다가 당도하는 곳이 바로 <슬픈 허방 하나>가 아니겠는가. 한때, 많은 부분 나는 그의 시를 좋아했다. ??일보 문화부 이경철의 《몸詩》 스크랩은 나의 감상력을 한껏 부추긴다. ‘우리의 일상적 삶을 끌어안고 그 자질구레한 흔적들을 역력히 보여주면서 그 안에 포함된 원초적 순수, 혹은 순결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는 말. 이 의미망은 오히려 시집 《뼈…》에 녹록치 않게, 흐드러진 어우러짐으로 존재한다. 나의 첫번째 의문점은 아랫글(산문시집 《연필로 쓰기》, 1984. 서문)의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 독자에게 ‘모든 나의 작품에 ‘<마침표>를 사용하는 것을 절대 거부’한다고 확인시키면서까지 그 이유를 고백한 바 있다.
우리 시의 종결어미는 요즘에 명사형으로 끝나거나 또다른 형태를 취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다>로 끝나고 있고 거기에 마침표까지 붙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산문적이다. 경직케 한다. 확정적이고 규정적이며 단정적인 그런 의미의 진술성을 내포하고 있다. 음악적인 면에서도 거의 제로라고 할 수가 있다. 차단적인 그 음절은 우리의 상상의 공간을 또한 차단해버리기 때문이다. 흐름이 없다. ─ <나의 詩에 대한 생각> 부분
여기서 하나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 시집에서 세군데(<안방에 머물며> <러브체인> <나의 兵丁들>)만 나온 ‘느낌표’가 최근에 너무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마침표 불가’ 입장을 변명하기가 어려워졌다. 말하자면 …, , , ·, ?, ！의 쓰임에 민감하고 조심스럽던 그가, 그토록 싫어한 마침표 사용을 뛰어넘어 외려 느낌표를 빈번히 차용하는 태도는 변명할 수 없는 모순이다. 차례를 뛰어 넘었다. <알> 시편 다음에는 어떤 부호로 그만의 몸짓을 보일 것인가. 그의 견해대로라면 이제부터 비로소 마침표를 찍어야 하지 않을까. 작품에서, 그것도 산문시의 느낌 부호는 핵심을 그대로 노출하는 법. 잔흔도 없이 시의 비밀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자꾸 잠언적인 경구화警句化·아포리즘화하는 태도도 짚어둘 문제다. 느낌 부호로 ‘규범’을 만들고 정의하려는 몸짓에서 나는 일말의 잗다란 불안을 얻는다. 만난 자리에서, 마침표를 뺀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지 함량 증가를 위해 서정적 물결·환상적 물결을 빚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지요.’ 그렇다면 단절감을 주는 느낌표 남발(!)로 정진규 몸의 문을 사뭇 닫으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산문시 탄생의 비밀을 그는 평론가 홍기삼洪起三의 공으로 돌린다. 제일 처음으로 산문시 형식의 가치를 인정해준 그는 당시 《문학사상》사 편집장으로 ‘네나두리’(너나 하는 사이, 너와 나 둘이 하나)하는 사이였다고. 그는 제2시집인 《有限의 빗장》(1971) 해설을 써주기도 했다. 제3시집 《들판에 비인 들이로다》는 그를 통해 산문시 형식으로 공인 받은 전환점이 되었다고. 그는 넉넉함을 지닌 시인이다. 그의 넉넉함은 작품을 발표하기 전에 기회만 있으면 시를 남에게 보인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시인의 창작실은 더 이상 은밀한 곳이 아니지요. 남에게 자꾸 나눔으로써 객관성이 획득된다고 할까요.’ 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흡족한 웃음.) ─ 후배 시인들에게 조언 한 마디. 정 ： 젊은 시인들의 잦은 소설 쓰기, 이것이 큰 문제다. 영특함을 뵈던 시인들일수록 갑자기 상업성에 젖는 것은 아닌가. 모호·불투명성도 큰 문제. 실험·해체 작업은 영원히 지속해야겠지만 새로운 질서 만들기가 아니기에 문제가 심각한 것. 상업적 유행이라는 위악적 요소가 함정임을 알아서 자숙하기를. 작품에 대한 예술적인 자존自尊 부족도 깊이 생각할 문제다. ─ 전적으로 공감한다. 시에서 소설의 전이는 자연스러운 거지만, 시력詩歷이 짧은 그들이 다른 쟝르를 겁 없이 탐내도 되는가. 시도 소설도 다 숙성이 안될 텐데. 정 ： 그렇다. 그들이 좀더 진득해졌으면. ─ 요즘 읽고 있는 책은. 정 ： 독일 ‘산문’ 번역본을 읽고 있다. ‘독일 산문’을 우리 식의 단순히 긴 문장으로 보면 안 된다. 길이가 짧고 형태는 산문이며 동화적 요소가 든. 글쎄, 근래의 <알·7─포도를 먹는 아이>가 엇비슷하다고 할까. (맨 끄트머리에 소개.)─최근의 책읽기에서 인상적인 것은. 정 ： 홍만종의 《시화총림》, 연암 박지원 쪽의 <詩話> 부분이다. 특히 연암의 시화는 현대에 비겨도 모자람이 없는 짧은 시론 아닌가.
그와는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표표히 헤어진다. 나 혼자 돌아오는 길에서의 산문 풀어내기, ‘…시인 정진규가 아직은 씽씽한 공기를 흡입해야 한다’,는 믿음이 나의 의식을 사로잡았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나는 착한 시인 김종삼을 생각했다. 자신의 시구처럼 ‘내용 없는 아름다움’(<북치는 소년>)을 그린, 지금도 ‘누구나 한번 가는 길을/어슬렁 어슬렁 가고’(<풍경>) 있는 이, 김종삼. 그의 기록(장석주 편, 《金宗三 全集》, 청하, 1988)을 꼭 봐야겠다고 재촉한다. 문득 시가 쓰고 싶어진다. 그래서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공책 한쪽에 가만 적는다. 제법 글이 된다면, 그에게 보일지도 몰라. 누군가에게 욕을 한 바께쓰(!) 퍼붓고 싶어졌다.
뼈 속에 뼈가 있다 이 안에 또 뼈가, 그 속에 딴 뼈가 또 들었다 뼈와 뼈, 연뼈 날뼈 굳뼈들 갖가지 형상의 작고 큰 뼈들이 새끼 치더니 자꾸 뼈의 핵이 뼛속으로 비집고 들더니 속에 사리를 또 품었다 참, 맛있다 노오란 핵 시인 ‘그리운 안니·로·리’ 김종삼金宗三을 꽤 닮은 조각가 최종태崔鍾泰, 그의 파스텔화 <소녀 얼굴>이 시적 화자에 의해 겹겹이 발라진다 나는 처음 ‘안녕’ 하고 인사했다 곧 인사동 사람들과 종삼·종태와도 헤어졌다 종鐘 모양의 부도浮屠로 솟은 둥근 무리 ─알 또는 핵의 답례, 이젠 황홀한 갈채와도 ‘굿바이’ ─ 김강태, <뼈/뼈/뼈>(草稿)
뒷부분이 영 개운찮지만 괜찮은 시가 될 것 같다. 일주일 전에 부여·논산 고적지를 순례하다가 논산 쌍계사에서 150㎝ 내외의 종鐘 모양의 부도를 만났다. 작은 보주寶珠(금방 놓은 만두똥 모양이었다)가 얹혀 있는 부도는, 알 위의 작은 알 형상이어서 새삼스러웠다. 그렇다. 부도는 알이다. 시인 정진규가 깨려는 알이다…. 지금 펼치는 소견이 과연 정 시인에 대한 직감直感일까, 직관直觀일까.
2. 편 지 정진규 시인께─ 제9시집 《몸詩》를 중심으로 꼭 10년 전, 어느 대학에 연수를 받기 위해 나가던 때의 일입니다. 우연히 서점에 들른 나는 시집 코너에서 당신의 《뼈에 대하여》(1986)를 만났습니다. 그전에 물론 특이한 제목의 《연필로 쓰기》(1984)나 《비어 있음의 충만을 위하여》(1983)를 엿보기도 했습니다만. 햇수로 따져서 4년 동안 3권의 시집을 출간한 것은 대단한 열정과 산고를 뜻하기도 한 반면, 그만큼 시인 자신의 긴장의 이완(풀어지기)이란 추측도 가능합니다. 당신의 작품을 주목하게 된 것은 《연필로 쓰기》와 《뼈에 대하여》가 같은 산문시집이라는 형태상의 공통점 때문만은 아니었지요. 당시 산문시 형식에 호감을 갖던 나는 두 권의 시집을 통하여 ‘정진규 시의 비밀’을 어느 정도 알아낸 탓입니다. 내용상 일종의 ‘풀어쓰기’라 할 산문시는 그만큼 작품의 이해도 빠르면서 시인에 대한 친근감이 빨리 와닿았다고 생각합니다. 1986년 8월, 무더운 18일 오후였지요. 그때는 책을 얼마나 꼼꼼이 읽었던지 30㎝를 반으로 자른 자로, 연필로 밑줄을 반듯이 그어가며 표시한 시구들이 눈에 띕니다. 그 곳에서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은 살과 뼈에서 ‘몸의 세계’로 돌입하는 시인의 새로운 출발선입니다. 정석인데도 뭇시인들이 살이나 뼈는 여러모로 담론화하면서 구조적 통합체인 ‘몸’을 생각지 않는 성향에 대한 당신의 반감과 통쾌한 반란은 신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나는 당신 작품에서 그토록 풍기는 살내음이 좋습니다. 살이란, 솔직한 놈이거든요. 《비어 있음의 충만을 위하여》(1983)를 넘기다가 이를 다시 발견합니다. 또 이 시집부터 당신은 ‘한 바다 앞에/나 알몸으로 서리라/살을 보이리라/속살마저 보이리라/살이란 살들을/모두 버리리라, 버리리라’(<살을 버리리라>)며 ‘살 버리기’를 시도했지요.
한 채의 생각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한 채의 말씀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이 한 채는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터전을 닦는 일은 이미 끝내었습니다 네 귀퉁이를 반듯하게 닦았습니다 한 그루 대추나무는 그대로 놓아 두었습니다 우리들의 가난한 糧食으로 남겨두었습니다 대패질을 합니다 나무들의 속살이 화안하게 드러납니다 이 싱그런 속살, 당신의 속살과도 처음인 듯 만납니다 나 온갖 거짓과의 결별을 끝냅니다 대패질을 합니다 나는 지금 요염합니다 머리꼭지까지 가득 차오르는 이 땅에서 가장 정결한 물, 물빛과도 만나고 있습니다 ─ <속살> 전문
‘싱그런 속살’이라니요, 물큰 솟는 맑은 에로티시즘이 당신 작품에는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작품 곳곳에서 즐거운 시의 성감대를 만나곤 합니다. 예쁜 섹슈얼리티sexuality도 가끔 밉지 않게 등장하구요. (당신이 거부해도 할 수 없습니다.) 이를 섹스 리얼리즘sex-realism(?)으로 읽으면서 나는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모릅니다. <몸詩>의 에로티시즘, 객쩍은 상상…. 작품에서 말한 ‘한 채의 생각의 집’이나 ‘말씀의 집’짓기를 ‘하나의 온전한 몸 만들기’로 풀어봅니다. 왜 대패질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대상이 대추나무인가), 일단 ‘나 온갖 거짓과의 결별을 끝’낸다는 시적 화자의 내적 독백은 ‘싱그런 속살’을 목격한 직후인데, 바로 이 부분이 우리를 잔뜩 오금 뜨게 만듭니다. 어쨌든 ‘한 채의 생각’이나 ‘말씀의 집’이란 다름아닌 ‘몸 만들기’가 아닌가요.
여성성·성징 또 한 가지, 나는 어느새 당신의 시가 음성(＝여성)화하는 경향을 읽습니다. 어쩌면 남성성이 직접적이고 공격적이라면 간접·수동적인 것이 여성성임을 전제할 때 당신의 비밀스런 성징을 쉽게 드러내보이는 것 같아 안쓰럽습니다. (예를 들어 ‘몸’에서 ‘알’로의 변화를 명확히 규명할 필요가 있어요.) 이렇게 생각하니 당신이 최근에 상재한 시집 《몸詩》(세계사, 1994. 작품마다 부제副題가 붙어 있음. 이하 문장 내의 인용시는 번호만 표기)는 펄뚝이는 ‘몸 이미지’를 풍겨서 좋습니다. 우리, 왜 그러지 않나요? 다른 몸(體)인 그녀가 잠자리에서 은밀히 속삭이는, ‘당신 몸‘이, 보고, 싶,어….’에서의 ‘몸’이란 말. (사람들은 이상해요. ‘몸과 몸 나누기’를 노래했다고 다 천박한 건 아닐 텐데. 성性을 순수하게 추구하는 것. 그래서 이런 규정 만들기도 해봤지요. 남성의 페니스를 ‘몸’, 여성의 질그릇 모양의 성징을 ‘성기性器’로 표현하자고. G. 바슐라르적 상상력으로 짜내면, 진흙을 빚어 그릇 만들고 그 질그릇Vagina이 다른 몸penis을 만들고…. 당신 작품에는 종종 <부드러운 몸 만들기>가 나타나요. 좀더 규명해야 할 영원한 오브제로서 통털어 말하자면 나의 ‘성징론性徵論’ 혹은 ‘상징론象徵論’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거꾸로의 탈신비화를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는 ‘성聖’ 속에서 ‘속俗’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분명히,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경우는, 암묵적으로, 숨겨진 형태로 비평가들이 발견해내는 ‘성聖’을 ‘속俗’ 안에서 찾아내는 것이다. ─ M. 엘리아데, 《일기 초抄》 Ⅱ, (재인용：글쓴이)
그것은 우리가 비어 있는 자들임을 인정하는 일이다. 우리가 결핍의 존재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우리가 오만하게 지배했다고 생각했던 자연에게 온당한 자리를 돌려줌으로써 우리는 비었던 중심을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중략) 전혀 새로운 형이상학으로 채울 수 있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밑금：글쓴이)─ 김정란, 《비어 있는 중심─未完의 詩學》, 언어의 세계, 1993 50─51쪽 이 긴 인용구를 당신께 들려주고 공감하면서 시구 풀이를 돕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성聖’을 ‘성性과 속俗’ 안에서 ‘전혀 새로운 형이상학으로’ 발견키 위해 성性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탐구하면 안 됩니까. 이야기의 연장선에서 볼 때, 8시집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1990)에는 <밥詩> 연작과 <몸詩> 일부(시집 《몸詩》에는 정작 《별들…》에 실린 14편 중에서 12번까지를 제외시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젠 겨우 밥술이나 좀 들게 되었다는 말씀, 그 겸허, 실은 쓸쓸한 安分, 그 밥, 우리나란 아직도 밥이다 밥을 먹는 게 살아가는 일의 모두’(<밥詩·1>)라든가, 시인이 시적 화자를 통하여 ‘꽃을 보면 꽃이 마렵고 별을 보면 별이 마렵고 모래알을 보면 모래알이 최루탄을 보면 최루탄이 여자를 보면 여자가 마려워지는’(<밥詩·3>) 이치를 깨닫는 모습은 가히 정진규 시인답습니다. 마침 《별들…》의 <몸詩>편에 끌리는 시가 있데요.
전에는 길에 나다니는 애 밴 여자들을 만나면 별로였는데 요즈음엔 그렇지가 않다 ‘그렇지가 않다’ 정도가 아니라 예뻐서 환장을 하겠다 ‘예뻐서 환장을 하겠다’고까지 나는 어느 여자들 앞에서 정색을 하고 토로한 바 있으며, 그래서 점수를 크게 딴 바도 있다 바로 그때, 그동안 소문나게 여자를 탐해온 나, 나를 향해 높이 들려져 있던 저들의 검은 방패가 가뭇없이 내려지는 것을 나는 보았으며 나 또한 맑게 비운 그릇 하날 가슴에 받쳐들고 서있는 바알간 少年服事와 같았다 여자를 제대로 사랑하는, 세상을 제대로 사랑하는 核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이 좀 갔다고 할 수 있다─ <몸詩·9> 전문
나 요즈음 너무 들통나 있다 (…중략…) 화계사 절마당 기막히게 이쁜 산수유 한 그루 그런 것들과의 은밀한 관계 같은 거나 남몰래 하고 있는 기막히게 좋은 일 같은 게 그런 게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몸詩·12> 부분
전자는 본의 아니게 속내를 토로한 시인의 고백이 흥미롭습니다. ‘애 밴 여자들’에 대해 ‘예뻐서 환장을 하겠다’는 표현이야말로 흠집이 없는 시적 경지, 당신의 표현대로라면 ‘비어 있음의 충만’입니다. 그렇다면 윗 작품에 ‘성性을 뛰어넘은 신성한 성性의 추구’라는 관형어를 붙이면 어떨까요. 성性의 ‘보다 순결한 성속成俗’이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후자는 시적 화자의 화사한 산수유꽃으로의 동화(둘만의 ‘은밀한 관계’를 ‘남몰래 하고 있는’ 일이란 ‘기막히게 좋은 일’이겠지요)가 멋지고 은근히 ‘들통’나기를 바라는 화자의 엉큼한 제스처가 이 작품을 더욱 맛깔스럽게 합니다. 이렇게 풀면 성이란 진짜 ‘예뻐서 환장’할 만한 게 아닐까요. 사디스틱Sadistic 관능이나 성도착性倒錯·관음증觀淫症의 폐기물로 시를 이해하려는 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이 방면의 압권은 누가 뭐래도 아랫 구절입니다. 전혀 설說을 붙일 필요도 없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작품을 ‘싱싱하고 순결한 성性의 탐구’로 보면 결례가 됩니까. 정진규 시의 한 비밀이 아닐까요. 그 중에서도 밑금친 곳. 몸을 보았다 비의 몸 속에 손을 넣어 따뜻하게 만졌다 저녁 무렵엔 비! 그치고 안개 자욱하고 화계사 뜨락의 늙은 산수유 한 그루 하얀 타월에 비눗갑 하나 싸들고 마을로 목욕하러 내려가는 것도 보았다 (밑금：글쓴이)─ <몸詩·76─봄비> 부분
황홀합니다. 이런 시야말로 평론가 최동호(시집 《연필…》과 산문집 《따뜻한 상징》의 해설)의 ‘에로티시즘의 정신화’에 해당하는 작품일 것입니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시의 부정적 특징을 거론하는 평론(《삶의 깊이와 시적 상상》, 민음사, 1995. 75쪽 요약)에서 그는 ‘세속적 에로티시즘의 광범위한 확산’을 걱정하면서 ‘에로티시즘의 배면에 상업주의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경박한 에로티시즘 시로 판단하고 있더군요. 중요한 지적은 ‘에로티시즘 시의 정신성’ 이면에 상업주의 요인·요소가 존재할 때를 ‘세속적 에로티시즘’이라고 지적한 부분입니다. 물론 ‘상업주의 시’라는 개념의 명확한 정의와 그에 따른 철저한 비평적 검토가 전제되야겠지만. 그가 이러한 비평적 관점에서 당신의 작품을 검증하면 좋을 텐데요. 한편 김병익은 《부드러움의 힘》(청하, 1988)이란 문화비평집 ‘책 머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부드러움이 얼마나 근원적이고 분명한 힘이 될 수 있는가’라고. 또, ‘문학이 종국적으로 지켜야 할 힘은, 이렇게 우리를 부드러움으로 마음을 풀어놓는 것’(15쪽), ‘그 부드러움이 우리의 울혈진 마음과 가파른 심리, 원한의 정서를 옹골진 부정과 극복의 논리, 화해의 정신으로 이끄는 강인하고 각성시키는 힘’(17쪽)이라고도 했습니다. 뉘앙스로 봐도 될까요만, ‘부드러움의 힘’이란 용어에서 기묘하게도 우리 신체의 일부, 역동적이고 부드러운 ‘몸penis’을 생각하면서 이를 상징적 중심 소재로 다룬 당신의 예지에 놀랄 뿐입니다. 힘이란 실로 강할 때보다 부드러울 때 값어치를 더하는 게 아닌가요. 《몸詩》를 좀더 살핍니다. 시집 자서에서 ‘<몸>은 가시적인 육신이면서 불가시적인 또 하나의 육신’이라고 하셨지요? 그런 화두를 뇌에 심은 탓인지 ‘몽매를 일깨우는 물푸레 회초리 하나를 손에 들고 다니’(73)면서 ‘나의 몸을 깨우는 일’에 몰두하거나 ‘내 소멸의 빈 터에도 풀잎 하나 돋는구나 풀잎, 아기의 손을 쥐니 가득 조여오는 生動!’(59), ‘적막의 맨몸’을 ‘깨끗이 비운 밥그릇’(58) 등, 깨달음의 구절에서 ‘몸의 가시성과 불가시성’에 대한 해답을 얻는 듯싶습니다. 직접 설명하기를, ‘육체(생명성)의 신비성을 강조한 것으로 인간의 몸을 하나의 우주율로 생각한 결과’라고 한 말씀이 기억납니다. 또 ‘너의 손은 날렵했다 백발백중이었다 알고 보니 메뚜기가 너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온몸을 한손에 모았고, 나는 온몸이 다 보이게 작동했다 그런 온몸에는 잡을 수 있는 손이 없다 온몸만이 있다 그런 까닭이다’(74)는 깨달음도 보이지만 ‘이슬은/하늘에서 내려온 맨발/풀잎은/영혼의 깃털/고맙다/서로 편히 앉아 쉬고 있다/허락하고 있다’(17)도 달콤합니다.
품고 다닌 칼 한 자루/여엉 꺼내 쓰지 않았더니/제 스스로 걸어나가/달빛 아래/제 몸을 제가 갈고 있다/제 몸의 毒을 毒으로 갈고 있다/녹이 슬었다고/녹이 슬었다고/숫돌에/제 몸을 제가 몸으로 갈고 있다─ <몸詩·28─달밤> 부분
이 작품을 힘과 힘을 겨루는 근육질 몸에 관한 명상시로 읽습니다. 몸이 무기가 되고, 녹슨 것을 시퍼렇게 갈아대는 몸의 행동 의지, 마침내 시퍼렇게 된 칼날로 이젠 다시 사용하고 싶고 손대고(접촉하고) 싶은 지순한 욕구가 보입니다. 여기서의 몸은 전자의 작품들과 달리 독을 뿜는 여성성을 띠었군요. 아래 작품은 부끄러운 ‘속몸’을 신기한 부끄러움으로 훔쳐보는 기분이 듭니다. ‘사랑의 작은 열매들’이 ‘햇살을 조금씩 훔치’는 모습이 마치 내게는 첫날 밤에 순결을 서로 머금는 섹스의 몸짓(＝욕망)으로 보입니다. 완전한 ‘사랑 나누기(몸＋몸)’를 위한 전주곡이라 할까.
아직은 雨期가 아니다 자자하던 소문의 꽃잎들 지고 사랑의 작은 열매들 푸른 이파리 속에 숨어 깊게 숨어 햇살을 조금씩 훔치고 있다 아직은 부끄러움을 탈 때이다 햇살을 조금씩 훔치고 있다 누가 맨발로 강을 건너고 신발 벗어든 채 마을로 들어서고 있다 ─ <몸詩·14─마을> 부분
하지만 역시 흥미로운 관심사는 ‘물은 자궁이다’(36)의 소제목인 <물 속엔 꽃의 두근거림이 있다>는 구절 같은 것입니다. 물의 여성적 이미지는 널리 회자되는 말이거니와, 당신은 일부 작품에서 ‘물’을 여성기女性器의 혼융체로 인식한 것 같았습니다. 말하자면 여성의 질을 ‘그릇 물의 속(안)’으로 보는 견해. 재미있는 것은 ‘생각의 집 한 채’ ‘말씀의 집 한 채’를 짓고 싶다(《연필…》, 1984)던 당신이, 비로소 ‘혼자서 집 한 채 지어냈다’(《몸詩》·90, 1996)는 대목입니다. 내가 괜히 고맙기만 합니다. 이제야 정신이 안거할 스위트 홈이 정 시인에게 생겨났으니요. 그러나 당신은 ‘그런 시’가 아니라고, 음험한 시가 절대 아니라며 다음과 같이 강변하셨지요?
엘레난가 뭔가하는 여성잡지에서/여자들의 눈, 코, 귀, 입을/ 시로 써달랜다/미친 놈!/누가 보았는가 싶어 얼른/뒤부터 돌아다봤다/그러나 아니었다/<몸詩>는 그런 게 아니라고,/아니라고 내가 화를 냈으니/내가 미친 놈! ─ <몸詩·27─완벽한 바구니> 부분
그렇다고 ‘<몸詩>는 그런 게 아니라고,/아니라고’ 화를 내면 어쩌겠다는 겁니까. 그렇게 읽든 안 읽든 발표 순간부터 시는 철저히 독자 몫이라는 기본적·암묵적인 숙지 사항을 모를 당신이 아니니까요. 아래 시는 마음에 쏙 듭니다. 실은 나도 ‘애인 하날 감추어두고도 들통나지 않는 경영’을 여직 하고 싶으니까요. 몸은, 주인 말을 듣도록, 평소에 그런 명령어를 계속해서 내려야지요. 너끈히 ‘예비’해 놓아서 ‘슬퍼하시게’라며 한숨 쉴 정도는 되지 말아야죠. 정신의 경직성에서 속히 벗어나, 빛나는 데가쥬망을 위해.
젊었을 때는 더러 넘치게 만나고 그랬는데 애인 하날 감추어두고도 들통나지 않는 경영이었는데 이젠 마음보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정직하다고 그게 좋다고 부끄럽지 않게 내가 말했다 한 몸에 두 지게는 못 짊어진다고 내가 말했다 슬퍼하시게 드디어 내가 말했다 (밑금：글쓴이) ─ <몸詩·69─容量> 부분
또, ‘정신이 드는 새벽 공기 같은 여자’란 구절이 절창인 이 작품은 어떨까요.
여자들은 가장 좋은 내 상징이다 나의 집이다 세상이다 상징은 새것이라야 정신이 든다 정신이 드는 새벽 공기 같은 여자! 그러나 곧 떠나야 할 나의 문패들이다 새벽은 곧 한낮으로 저녁으로 건너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들은 자신만이 가장 온전하다고 믿는다(밑금：글쓴이) ─ <몸詩·37─새벽> 부분
이 작품은 어떤 남성이라도 ‘새벽 공기 같은 여자’라면 얼마든지 자기 몸을 즐겨 바치는 기쁨에 젖을 것입니다. 좋은 상징으로서의 여자들, 새것으로서의 상징, 시인(시적 화자)은 그러나 그들이 ‘곧 떠나야 할 나의 문패’임을 깨닫습니다. 뭇 표징들을 거역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으로 승화시킨 점이 ‘정진규’답고 놀라우나, 경구 형식─‘언제나/배반은 저쪽이 가장 온전하다고 믿을 때/새벽이라고 믿을 때/가장 배반되어진다’─에 끄덕이면서도 한편 주억거리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당신은 그 날의 대화에서, 이 고질적인 ‘경구 만들기’ 습벽에 대해 ‘속히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지금은 하나의 ‘발견’으로 봐달라’고 했지요? <넉넉한 규범> 만들기 참, 나는 어느 책을 보더라도 자서나 후기를 잘 챙겨 읽는 습관이 있습니다. 작가 목소리로 책의 방향을 진실하게 알려줄 뿐더러 그의 사상·작품의 핵심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줘서 그렇지요. 정 시인의 시집은 딴 시인 것에 비해 자서가 긴 편이더군요. 산문 정신이 강한 탓인가…. 아무튼 문단 후배로서 원하는 바는 당신의 ‘적극적·능동적인 사물 편력’을 은근히 원하는 바입니다.
소멸이여, 길은 나를 떼밀고 나는 길을 떼밀지만 가진 것 없다 적막이여, 나는 이제 떠나야 한다 깨어나야 한다 잠시 진눈깨비 멎고 이제는 이 몸만이 아득히 길이다 이제는 적막만이 아득히 이 몸의 밥이다 ─ <몸詩·61─이 몸에 쑤셔넣은 술병들 한움큼의 지푸라기들로 쏟아져나오고> 부분
그러나 이처럼 자꾸 마무릴 짓거나 정돈(규정·규범화)하려는 인위적 자세는 경계해야겠지요. 이러한 ‘경구적 영탄’의 시구가 자주 나타나는 점은 불안합니다. 시인이 벌써 늙어가는 건 아닌가, 하는 조바심에서지요. 왠지 모르게 부쩍 는 ‘깨달음의 시편’을 접하면 안절부절못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귀한 시인들이 폼 재다가 시詩의 운殞이 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현듯이 치매 증상에 빠지거든요. 진규 큰형, 한사코 안으로 기어들지 마십시오. 사물을 자꾸 경구화하지 말고 ‘보다 넉넉한 규범’을 만드십시오. 부탁입니다. 그러나 역시 당신의 온기 서린 넉넉함은, 다음에 예시한 <몸詩·82>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시 원고는 반드시 흰 종이에 육필로 적는다는 습작 행위처럼, 그 작품 안에 따뜻한 희망의 싹이 돋아 고맙기만 합니다.
심심하겠다 운동장은, 이 여름방학을 저토록 혼자서 하얗게 지키고 있으니, 하얗게 혼자서 놀고 있으니 가서 해 질 때까지 함께 놀아주어야 하겠다 ─ <해질 때까지> 부분
그 싱싱한 틈, 희망이 바로 이 곳에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어쩐지 마음에 소슬 바람이 부는 건 정 시인께서 너무 언어의 촉감에 민감한 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갈수록 정갈한 언어가 많이 등장하고, 단어나 어휘를 계속 풀어나가며 사물을 만나는 인상이 혹시 나타懶惰의 소치인가 싶어 마음 산란합니다. ‘정진규’는 그런 시인이 아니잖습니까. 정신의 고양은 산정을 막연히 찾거나 높은 곳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굳이 말할 필요 없지만, 똥에도 지푸라기에도 있고 생몸이나 굴헝·허방이나 눈물, 먼지, 그리고 더없이 낮은 곳에도 존재하겠지요. 요즘은 정신의 봉우리를 찾는 자가 부지기수라 ‘사기치는 시(詐欺 詩)’들도 많던데, 혹시 당신이 부분적이나마 언어의 벽을 넘지 못하고 그 안에 안주할까 봐 약간 긴장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요즘 부쩍 느는, 한없이 편한 자유를 누리는 시행(＝풀어지기)도 다소 불만입니다. 또다른 유형의 정신 긴장, 그 수축과 이완의 반복 속에서 당신이 몹시 망설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면서. 특히 상위에 랭크되는 벌거벗은 <몸詩> 후반부는 더욱 풀어지기를 향해 치달리는 기분입니다…. 그것은 자주 발견되는 느러짐─예를 들면, 앞 시집들에서 발견된 구절이 뒤에 자주 반복해서 나타나는 점 등─에서 두드러집니다. 즉 언어를 용의주도하게 주무르던 의도가 산문시 형식이라는 미명하에 풀어지고 있다면, 문제가 아닐까요. 가끔 ‘편지시’라는 형식도 실은 또다른 ‘풀어지기’가 아닌지. 문제는 정진규 시를 따르는 어린 시인들입니다. 시인 정진규는 아직 저만큼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시인의 숨은 내면을 보지 않고 언어의 현시나 출몰에 현혹될까 두렵습니다. 일부 작품에서의 양식주의성樣式主義性 기질이 소박하게 보이나 아슬아슬합니다. 정 시인님. 이 산만한 글을, ─무릇 당신의 고을 안성은 내 아버지의 제2의 고향으로 늘 친근하고, 한때 너무 좋아했던─ 당신에 대한 후의厚誼로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서른도 안 된 삶을 등진 한 젊은 시인의 산문집(살림, 1990)이 떠오르는군요.
나는 그처럼 쓸쓸한 밤눈들이 언젠가는 지상에 내려 앉을 것임을 안다. 바람이 그치고 쩡쩡 얼었던 사나운 밤이 물러가면 눈은 또 다른 세상 위에 눈물이 되어 스밀 것임을 나는 믿는다.(…중략…)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1)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2) (밑금：글쓴이) ─ 기형도, 《짧은 여행의 기록》, 86─87쪽
앞 단락이 주는 쓸쓸함. 그러나 상징적 사물에 대한 자기 확신. 그렇습니다. 밑금 친 부분 1)에 대해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결례가 허용된다면(그는 벌써 세상을 다 살아버린 어른이니까!), 기형도의 ‘자연’을 당신 시의 ‘몸’으로 바꿔 ‘가장 위대한 시적 잠언이 <몸> 속에 있음’을 캐내려고 합니다. 바로 앞 글에서 기형도는 글 쓰기의 고충을 호소했지요,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라고. 무심한 듯싶은 ‘시작 메모’ 중 인용부 2)의 ‘눈’을, 나는 하마터면 ‘눈물’로 읽을 뻔 했습니다. 아니, 실제로 그랬어요. 그의 죽음을 접하고 한동안 바슐라르적 물의 이미지에 죽 젖었었지요. ‘물이 된다는 것은 혼에 있어서의 죽음’임을 갈파한 《물과 꿈》(이가림 역, 문예출판사, 1980, 85쪽)은 여러 구절이 나의 정신을 후려치대요. (대학시절, 한참 방황할 때 전폭적으로 바슐라르를 좋아했는데.) 영 가시靈可視·육 가시肉可視 정 시인님, 어차피 인간의 육신 안에 영혼이 내재한다면 나는 두 가지 세계로 분류할 참입니다. 시인이 만나는 사물(피사체)에는 꼭이 ‘영 가시적靈可視的 세계’와 ‘육 가시적肉可視的 세계’가 있다고. ‘영가시’란 ‘시인이 마음으로 바라보는 궁극의 극지점’이고, ‘육가시’는 ‘사물(물질)의 외양에 머무는 시각적·감각적 모멘트’라고 정의합니다. 멋져 뵈는 이 말은 이청준에게서 비틀어 따왔지요. 이 시대의 걸출한 작가 이 씨는 장편 《낮은 데로 임하소서》(홍성사, 1981)에서 ‘사람에겐 사물을 보는 육신의 눈과 이해하고 생각하는 사유의 눈, 그리고 직관하는 영혼의 눈까지, 세 가지 차원의 눈이 있다’(226쪽)고, 작품 모델인 ‘그’의 말을 빌어 우리에게 잔잔히 전한 바 있습니다. 지금은 자주 인용되지만, 이 구절이야말로 당시 내가 받은 작은 감동이었지요. 물론 다른 어른들에게도 직·간접적으로 사사했지만, 나의 청년기에 그를 통해 ‘(사물을) 직관하는 영혼의 눈’을 새로이 인식하는 동기가 된 건 사실이지요. 사실 영가시의 세계는 아무나 넘볼 수 없는 영역인데 많은 시인들 자신이 마치 그 경지에 있는 양, 기 쓰는 품이 우리들 코를 간지럽힙니다. 혹 지면이나 얻을까 하여 갖은 교태, 야들야들한 미혹적 태도로 잡지사·출판사 턱을 나다니는 모자란 글쟁이연하는 자들은 어떻구요. 속상하다 못해 짜증나는 그들. 그나마 작은 청정 문단 구역을 훼손시키는 유치한 놀이패 같으니. 이런 풍토는 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몽매한 평론 ‘목록’을 보면 거의 학연 관계의 선후배 작가·유명 시인이나 인기 작가들 평評으로 덧칠하고, 어떤 경우는 대상이 마치 군주·신선이라도 되는 듯 호들갑을 떨어서 우리로 하여금 헛울음 켜게 합니다. 솔직히 말해 우리에게 양심적이고 위대한 시인·작가가 몇이 있습니까. 손으로 꼽을 정도는 됩니까. …정 시인께 아프게 반문합니다. 문장도 안 되는 주제에 서로 얼러주고 애무하는 이 너절한 문학판 풍토. 외국문학 전공자는 강연 때마다 왜 그리들 그 나랏말과 이론에 의거하여 중탕重湯하며 주절대길 즐기고, 괜찮다 하던 시인들은 왜 그리들 한결같이 고답적이고 점잔 빼는 이론에 밝은지. 대상이 시인이든 비평가든 그저 작가적 양심에 물을 뿐입니다. 좀스런 영웅심리에 입각한, 한 글쟁이의 투정으로 봐주시기를. 한 말씀 더 드리지요. 멀쩡한 작가가 가끔 절필하겠다고 양식 있는 작자들을 위협하는 횡포도 이젠 지겹습니다. 옳다구나, 호재(특종)라고 큰 글로 특필하는 문화부 기자들의 맞장구에 눈물까지 흘리며 작전상 슬립 다운을 선언, 지면을 어지럽힐 때는 언제고 조금 뒤에 노오란 기름낀 얼굴로 슬쩍 나타나 ‘지 맘대로’ 재등단을 선언하는 추태를 보면 어이조차 없습니다. 그들 변명의 공통성은 글을 안 쓰고는 도저히 못 배기겠다는 문인적 우국지사의 한 읍소 형태 아닙니까. (실제로 그런 퇴물들은 재등단 과정을 거쳐야 되는데.) 우리 모두 영가시적 존재가 되기 위해 각기 성실할 필요는 있겠지만 그건 어쩌면 영원히 ‘큰바위 얼굴 일화逸話’일지도 모릅니다. 육가시 세계에 머무는 것, 그 안주安住의 방편으로 작가적 사명을 다한 듯 삶을 만끽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영가시의 세계를 지향하는 참 시인들이 비집고 나갈 틈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부탁이 있다면, 진규 형님께서 앞으로 진실한 의미의 영가시적 세계로 한 발자국 나아가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지금사 내 마음은 어느덧 《연필로 쓰기》 곁에 찬찬히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 반편도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 <연필로 쓰기> 전문
‘향그런 영혼의 냄새’라, 기막힙니다. 산문체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1977년 이후 제4시집 《매달려 있음의 세상》(1979)에서부터 마침표를 찍지 않기로 한 뒤, 아마도 이 시처럼 마침표 없이 부드러운 향을 전하는 것은 드물리라 생각하지요. 그 유향幽香의 고즈넉한 흐름…. 여기서 연필로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해 시인은 ‘지워버릴(드릴) 수가 있’기 때문이며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이라고도 하셨지요. 거듭 감탄하는 바, 이처럼 산문(시)으로도 쭉정이 없이 순알맹이만 남은 시를, 오늘 우리 모두가 고대하고 있답니다. 또 있습니다. 어쩜 이 시를 자랑하기 위해 지금까지 조바심쳤는지 모르겠네요. 많은 고난을 이기고 우뚝 선 선지자처럼 인간과 자연의 순수한 내음을 풍기는 이 작품(86)은 더 이상의 췌언도 붙이지 않고 마음의 심연에 새겨놓고자 합니다.
길이 열릴 때 보면 밝음이 늘 어둠 안쪽에서 몸을 키워 키를 키워 밤을 새워 어둠 밖으로 길을 내놓던데, 엄지발가락 하나가 상해 있던데, 어렵게 거미줄 뽑듯 시작하던데, 오늘은 그렇게 보이지가 않았다 直方으로 왔다 길이 밝음 그대로 몸이 되어 덩어리로 그냥 걸어나왔다 낙산 의상대 가서 바다에서 뜨는 해를 새롭게 만났다 어둠과 이미 한평생 잘 살고 나온, 한살림 차렸던 흔적이 역력한, 이미 싸움을 끝낸, 피냄새가 나지 않는 해를 새로 보았다 ─ <몸詩·86─낙산 의상대 가서> 전문
화제를 돌립니다. 뜻밖에 아픈 역사 안에서 괴로워 한 몸짓을 그린 작품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네요. 어떤 형태로든 ‘갈등’이란 우리를 지배하는 독소로 늘 우리 곁에서 타협이니 항거니 하는 달콤한 말로 존재해왔던 게 사실입니다. 다음과 같은 아픈 고백, 희석식이 아닌 순결한 ‘증류식 소주’ 마시기를 계속하려는 시적 태도가 앞으로도 당신의 참 매력이 되길 바랍니다. ‘풀잎 끝에 맺히는 이슬로 맺히는/한방울의 순결’로 남고 싶다는 소망이 애틋하면서 꼿꼿해 뵈는군요. 일종의 투사법投射法projective technique으로 자주 역이용되는 아픈 현대사의 4·19와 5·18(소재)을 생각하면, 당신의 다소 격한 자성自省의 목소리는 얼마나 정결합니까.
역사는 희석식인가 증류식인가 4·19는 희석식 소주인가 증류식 소주인가 그날 이후 나는 서른 해를 넘게 희석식 소주만을 마시면서 살아왔다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증류식 소주가 마시고 싶다 마침내 풀잎 끝에 맺히는 이슬로 맺히는 한방울의 순결, 그게 증류식 소주이다 역사는 증류식이어야 마땅하다 ─ <몸詩·30─4·19를 생각하며> 부분
진규 큰 형, 가급적이면 약주를 더 줄이시고, 새 애인 만들기(!)를 꿈꾸기 바랍니다. 시 <여자들>에서 ‘내게는 참 이상한 것이 있다/여자란 여자들은 모두가 다/남이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내가 그들의 남편이며/애인이며/(…중략…)/그 가운데서도/애인이 될 때가 제일 좋다’(《별들…》)를 보았을 때 참, 땡기더군요. 사실 애인이란 청량제 아닙니까. 서로를 따뜻하고 도탑게 하는 존재, 참깨·기름으로 서로를 맛깔스러이 비비는 것. 아, 따뜻한 상징. 그리고 더 나은 시지詩誌 만들기도 각별히 원합니다. ‘새벽 공기 같은’ 참한 신인 발굴에 선봉이 되주시고 중앙·지방, 중견·신인을 가릴 것 없이 좋은 시고詩稿를 골고루 청탁하는 등, 사실상 정 시인께서 하실 일이 꽤 많군요. 전문 문예지 주인장이란 시대(당대)를 대표하고 주도한다는 자부심도 가지는 법. 요즘은 사람 숲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고민 중이라구요. 크고 작은 시인들이 무던히 속 썩이는 모양이지요? 청컨대 당신의 바램대로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은 시인으로 남아 주십시오. 늙거나 낡지 마십시오. 어쩌다 인사동에 나가면 그냥 멋적어 사무실을 비켜갔는데 이젠 비로소 편히 찾을 것 같습니다. (너절한 인용구가 줄렁줄렁 많은 이 글도 공해인데 어쩐담. 지난 호에 ‘막스 삐까르 운운’한 것을 본 ??교수가 그러대요, ‘거, 폼 좀 쟀습디다.’ 그래서 함께 웃었지만.) 연전에 한 잡지사 부탁으로 취재차 당신의 고향 안성에 모셨었지요. 그때 친구분이 경영하던 <황구黃狗 집>(거기 육질, 참 좋더군요!)과 거센 시인 고은 선생 댁이 가까운 ‘대림 동산’에서 다시 한번 질탕히 놀고 싶습니다. 딴은 억울한 죽음, 시인 임홍재(당신이 주관해서 시비를 세웠다지요)나 그 옛날 걸걸한 농요를 읊던 남사당 꼭두쇠 바우덕이·걸립패거리도 만날 겸, 안성(청룡사) 부근을 찾을 필요는 있겠네요. …한번쯤 육가시 세상에서 허튼 화두나 던지며 헤피 ‘풀어지기’도 괜찮은 것 아니겠습니까.
알·지워내기 끝으로, 맨 처음 제시한 마지막 세번째 의문점에 대해 풀어봅니다. 자, 지금까지의 <살쭭뼈쭭(밥)쭭몸쭭알>에서 다음은 어느 소혹성을 탐색할 것인지요. 살을 구체적으로 노래한 것을 일일이 검증하긴 어려우나, 언젠가 ‘살을 버리고 마침내 뼈로만 남아 있기다’(<뼈에 대하여>)라고 한 당신의 시구와, 살 버리기에 관한 최동호의 좋은 지적(《따뜻한 상징》 해설과 같음)을 인용하여 내 나름의 <도식圖式>을 그립니다.
살을 버려야 한다고 정진규는 말하고는 있지만, 그의 시가 지니는 묘미란 바로 살과 뼈의 적절한 조화에 있지 않을까. 뼈로 지탱되는 강골의 정신주의로 나아갈 때 그는 더욱 추위를 느낄 것이며 여위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부드러움과 따뜻함 그리고 너그러움이 함께 할 때 정진규 시의 유연성이 살아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피가 돌지 않는 정신이란 죽어 있는 화석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 <정갈한 영혼을 찾아서>, 《平定의 詩學을 위하여》, 민음사, 1991. 182쪽
뼈란 살과 함께 존재하는 것, ‘살과 뼈의 적절한 조화’. 그런 점을 종합해보니 혹시 당신의 상상력이 <… 쭭 쭭·쭭 ? 쭭！>으로 발전하다가 더 머무를 문장 부호(삶의 부호)를 상실하는 건 아닐까, 하는 솔직한 심정입니다. 나아가 <알> 연작 시편에 대한 나의 상상력은 이렇지요. 알은 중심·핵을 그릴 수 있지만 오히려 퇴행의 의미를 띨 위험도 있다는 것. 즉 알을 규범화할 때 핵심(＝몸)만 그릴 게 아니라 그 몸을 둘러싼 각질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몸은 드러내고 싶은 양성성을, 알은 감추고 싶은 음성성의 속성을 지니므로. 느낀 바 있어, 양성의 몸을 ‘알몸’, 음성의 그것을 ‘속몸’이라 명명하니 결국 당신의 ‘알’이란 속몸의 또다른 구현이 아닌가 합니다. 각질로 내부를 칭칭 싸안는 의도를 일견 독창적인 깊이로 이해하면서도 그 각질이 자꾸 신경 쓰이는군요. 그렇다 해도, 포도를 따먹는 아이를 보고 ‘존재의 지우기’를 연상한 이 작품은 독자를 미혹迷惑시키는 큰 힘과 울림을 줍니다.
목욕을 시켰는지 목에 뽀얗게 분을 바른 아이가 하나, 사람의 알인 아이가 하나 해질 무렵 골목길 문간에 나앉아 터질 듯한 포도알을 한 알씩 입에 따 넣고 있었다 한 알씩 포도라는 이름이 그의 입 안에서 맛있게 지워져 가고 있었다 이름이 지워져 간다는 것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나는 때묻은 중랑천 언덕에서 비에 젖으며 안간힘으로 버티고 섰는, 추하게 지워져 가고 있는 망초꽃이라는 이름 하나를 본 적이 있다) 아이는 마지막 한 알까지 다 먹었다 포도라는 이름이 완전히 지워졌다 아이가 말랑말랑하게 웃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자라 있었다 이름이 뭐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아이는 이제 자러 갈 시간이었다 ─ <알·7─포도를 먹는 아이> 전문
아이도 알, 포도알도 알, 그리고 포도알이 지워진다는 표현이 참 싱그럽습니다. 이 시를 당신은 ‘존재의 생성은 이름 붙이기가 아니라 지워지기’란 오묘한 말로 대신했지만(이를 당신은 ‘김춘수·하이데거 식 깨달음’이라 했지요.), 내게는 ‘알이란 깨어나기 전의 완벽한 초생명체이자 그 생명성의 참 존재 이유’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 존재 이유를 모든 시인들이 더 캐내야 되겠지요. 결국은 남들이 수없이 부르짖는 실존주의에 머무는 듯하군요. 종국에 가서 ‘모두 하나 되기, 온전한 하나로 끌어안기’. 그러다 보니 ‘사랑은 마지막 선택이며 몰입’이란 당신의 낮고낮은 육성이 다시 귀에 쟁쟁합니다. 이런 유類의 <알>은 방금 낳은 산새알을 몰래 만질 때의 작은 다사로움·떨림 그 자체인 즉. 마지막으로 당신을 시인으로 낳아주신 조지훈 님께서 ‘시인의 추위란 詩를 쓸수록 더욱 깊어질 따름이야. 적당히 덜어내고 피해갈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속뜻을 함께 새기면서 이만 글을 맺습니다. 반가워요, 시집이 곧 나온다니 무척 기다려집니다. 그때 가서 다시금 <알詩>에 대해 대화할 시간이 있었으면 합니다. 정녕 안녕히 계시기를.
‘96년 후끈 단 늦여름, 김 강 태 (1996년 9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