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김혜순

나는 그녀를 시인기계 제 7호라 부르련다.

신수정

2019년, 로스엔젤리스에 소재한 타이렐사는 우주 식민지 개척용 복제인간 판매로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를 구호로 내건 타이렐사의 복제인간들은 애초부터 특정한 목적으로 설계, 판매된 소모품들이었다. 이를테면, 전투용이라든가 위안용 등의 용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불문에 붙여진다. 그들은 다만 철저하게 인간적인 이해관계에 기반한 그들 스스로의 기능을 다하고 난 다음 조용히 회수되어 폐기처리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엄격한 경계체계와 가혹한 금지규정을 어기고 종종 죽음을 무릅쓴 귀환장정에 오르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어느 순간 자신들이 복제인간임을 감지한 자들이다. '블레이드 러너'로 불리는 경찰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들 사이에 섞여있는 비인간을 색출하고 다시금 그들을 회수하여 인간적인 질서의 흐트러짐을 방지한다.

리들리 스콧의 공상과학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복제인간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인간의 인간다움에 관해 묻고 있는 영화다. 이 영화에 따르면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는 기준은 '기억'이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과거 경험의 유무인 것이다. 가장 뛰어난 블레이드 러너 가운데 하나인 '데커드'가 복제인간을 가려내는 테스트에서 행하는 질문은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으면 말해보시오"라는 것이다. 추억은 인간만이 경험하는 삶의 표징이다. 처음부터 성인으로 태어나는 복제인간에게는 지금의 그를 형성해 온 삶의 누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달된 과학기술은 점차 복제인간에게도 과거의 경험을 선사하는 수준에까지 이른다. 타이렐사의 최신제품 '레이첼'이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의 '기억'이 선명하다. 어머니와의 다정한 한 때, 평화로운 집안 분위기. 그런 점에서 그녀는 분명 인간이다. 데커드 앞에서 아름다운 눈을 깜빡거리며 자신이 복제인간일 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그녀의 기억은 데커드를 만나기 전까지는 창조주 타이렐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았을 정도로 정교하고 치밀하다. 그러나 데커드의 테스트를 통과한 다음 그녀는 자신의 기억이 이식된 기억, 다만 프로그램의 조작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내가 살다 나온 어항을 밖에서 쳐다봤어요. 팔을 뻗으면 팔이 접혀져 내게로 다시 돌아오던 어항을. 왜 그날 나는 어항 밖에 서 있게 되었을까요? 나는 살아있는 거울처럼 어항을 쳐다봤어요. 일생 동안 몸을 내리누르던 어항을요. 1999년, 온몸에서 물이 흘러내렸어요. 흡사 내 몸은 수영 풀에서 금방 몸을 건진 사람 같았어요. 옷밖으로 몸이 줄줄 녹아내렸어요. 어항을 무릎 사이에 묻고 울기도 하였어요. 어항은 점점 미끈거렸어요. 남의 얼굴 같았어요. 그러다 내 어항에서 당신 얼굴이 빠져나오더니 눈알이 증발되고, 내 손에서 당신의 두개골이 무너져 반죽된 밀가루처럼 뼈부스러기들이 녹아내렸어요. 나는 내 무릎 위에서 금간 어항처럼 두개골이 우는 걸 봤어요. 2029년이 지나고 몇 년 후에 가슴이 대낮의 사막처럼 타오르기도 하였지요? 아침에 일어나면 당신이 내 가슴의 창문을 드르륵 열고 뜨거운 모래를 마구 뿌렸었지요. 입을 열면 메마른 안개꽃이 쏟아지곤 했었잖아요? 그런 일이 있고 또 몇 년 후, 2048년이던가요? 어항을 들고 얼음바다를 건너갔었어요. 걷다보면 얼음 밑 바닷속에서 얼음 숫말이 일어서고 핏줄 속으로 눈보라가 치기도 하였었지요? 그 일이 있고 또 몇십 년이 흐른 뒤엔 어항 밖 흰 탁자보를 검게 물들인 무언가 썩은 냄새 한 뭉치가 여전히 어항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을 거예요, 아마.

―너와 함께 쓴 시 2 -1994년 5월 4일의 편지

김혜순의 시들, 특히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에서부터 『불쌍한 사랑기계』에 이르는 최근 시들은 데커드에 의해 어느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버린 레이첼의 독백을 닮아있다. 위 인용시를 보자. 이 시의 화자는 '일생 동안 몸을 내리누르던 어항' 바깥으로 나온 자다. 이 '어항'은 그녀의 시에서 자주 보이는 '수족관'이나 '유리문' 혹은 '물방울' 등과 마찬가지로 주체와 비주체를 나누는 경계구역이다. 도처에 번쩍이는 빛과 몇 겹으로 둘러쳐진 미로로 구성된 이 투명한 공간이 시선의 그물망으로 뒤얽힌 거대한 감시체계를 상징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찍이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면 또 유리문이 나온다. 유리문 안쪽엔 출구라고 씌어 있고, 바깥쪽엔 입구라고 씌어 있지만 그러나 나가든 들어가든 언제나 너는 어떤 몸의 내부에 속해있다"(「서울」)라고 묘사했던 바로 그 공간처럼 '어항'은 어떤 의미에서 감옥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물고기가 어항 바깥에서 살 수 없듯이 존재가 이 공간을 떠나서는 숨쉴 수 없다는 데 있다. 끊임없이 어항 내부의 어느 한 지점을 기준으로 임의라도 '입구'와 '출구'를 구분한 채 '유리문'을 밀고 또 미는 덧없는 작업을 지속함으로써 존재는 비로소 하나의 주체가 된다. '어항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금물이다. 그 경계를 넘는 순간 주체는 다시 거대한 혼돈 속으로 뒤엉키게 되기 때문이다. "쉰 살의 나와 예순 살의 내가 고무줄 양끝을 잡고 열 살의 내가 고무줄 뛰기 하는 그런 학교"(「내가 모든 등장인물인 그런 소설 1」)에서 영원히 놀 수는 없다. 비록 주체가 존재에 덧씌워진 환상, 미혹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삶을 연장하기 위해 '나'는 '열 살의 나'와 '쉰 살의 나' 그리고 '예순 살의 나'를 나이순으로 구획하고 줄을 지워 질서를 유지해야만 한다.

대개 별다른 어려움없이 이 작업을 수행한다. 이미 그렇게 살도록 '설계'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용도가 무엇일까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 그저 "감자 자루에서 쌀자루로 비누갑에서/책상 밑으로 루카치에서 들뢰즈로"(「The Rat Race」) 몰려다니는 '쥐떼'처럼 먹이를 찾아 부산스럽게 움직이면 된다. 때로 어떤 의혹의 그림자(이게 도대체 누구의 어항 속이냐?)가 스쳐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거울 미로에 빠진 사람"(「현기증」)처럼 당최 눈을 뜰 수 없기 때문에 이 징조는 무시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블레이드 러너의 존재가 이미 죽음을 무릅쓰고 인간의 세계로 귀환하는 복제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현기증(vertigo)'은 균열, 불일치, 존재를 위협하는 미세한 틈, 곧, 어항 바깥의 세계를 끊임없이 지시한다. 남달리 예민한 유전자 혹은 프로그램 상의 오류로 인해 이 징조를 수시로 앓는 자가 있다면? 남들 다 찬양해마지 않는 태양을 바라보며 "그 푸른 동공 위에 확대경 같은/태양을 갖다 대고 누군가/나를 눈부시게 째려보고 있다"(「현기증」)고 느낀다면? 그리하여 붉은 치마를 입은 '당골'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니캉 내캉 같은 일 하는 사람이랑께!"(「한라산 장마, 입산 금지」)하고선 어깨를 껴안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김혜순의 시는 이 혼돈과 공포의 한 가운데를 정면으로 관통한다. 그녀의 시에 있어 혼돈과 공포, 현기증과 착란은 단순한 수사나 상상력의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그 자체 실존이자 시다. 데커드의 테스트를 통과한 레이첼처럼, '너'의 두개골이 반죽된 밀가루가 되어 녹아내리는 것을 목격한 '나'처럼, 그녀의 시는 '그 날' 주체가 산산조각나고 뼈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리는 의식을 치른 자들의 외마디 비명, 독백, 자조, 냉소, 그러나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연민과 비애, 구원에 대한 갈망과 그것의 무의미에 대한 인식, 그 분열과 허무의 기록이다. 무한의 우주라고 생각되던 어항은 '팔을 뻗으면 팔이 접혀져' 돌아오는 협소한 공간에 불과했으며 절대적 주체로 여겨졌던 자아는 단지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에 다름 아니었다. '그 날 이후' 삶은 '사막' 아니면 '얼음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다. 미래는 이미 곧 과거이며 과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 날 이후 미래는 이미 언제나 '지나간 미래'며 과거는 '캄캄한 허방'이다. 이 엄청난 아나크로니즘은 꼬리에 꼬리를 문 형상으로 순환되는 시간과 '네 겹의 텍스트' 안을 떠도는 주체의 분열을 낳는다. 주체는 '길 건너편 은행 빌딩 검은 유리창'이나 '까만 그랜저 차체' 혹은 '햇빛 받은 은행나무 노란 잎들 사이' 등으로 '전치'되거나 "호박 속에는 127개의 씨가 들어있다/127개의 씨 속에는 127개의 호박이 들어 있다/그 호박들 속에는 다시 127개의 씨가 들어 있다/다시 그 씨 속에는 127×127×127×127개의 호박이 들어있다"(「39도 5부」)에서와 같이 하나의 수렴점을 향하여 '압축'된다.

환유와 은유의 축을 따라 확산, 응축을 되풀이하는 주체는 결국 스스로를 대상으로 한 '유희'에 골몰한다. 거대한 섭리와 금지의 명령들이 거미줄처럼 혹은 실핏줄처럼 뒤엉켜있는 미로 속에 갇힌 존재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출구를 찾아' 탈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출구인 줄 알고 달려가면 그것은 곧 입구이며 문을 밀고 들어가면 또 다른 문이 막아선다. 도처에 벽이다. 설혹 어항 바깥으로 나온다고 한들 기다리고 있는 것은 '썩은 내' 진동하는 부패의 예감 뿐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자는 이 곳이 아닌 저 곳에의 행복을 꿈꾸지 않는다. 이 곳이 곧 저 곳이며 저 곳이 바로 이 곳이다. 노스탤지어나 유토피아는 김혜순의 몫이 아니다. 어디에도 출구는 없다. 탈출할 길이 없다. 그녀는 '파열'을 택한다. 자기를 상대로 한 유희의 절정, "가슴과 함께 뇌가 작동을 시작한 시한폭탄처럼 폭발하려고"하는 순간, "진정코 한 번 멋들어지게 폭발하고 싶다"는 욕망, "그래서 이 껍질을 벗고 한줌의 영혼만으로 저 공중 드높이......"(『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自序) 날아가고 싶다는 갈망. 물론 이 갈망은 "이 몸의 스크린만 찢고 나면/내 몸에서 홀로그램이 터져나"(「타락천사」)올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한줌 영혼을 가두고 있던 이 '몸'의 형식, '아버지'가 자신의 금기와 욕망을 아로새겨놓은 이 몸은 존재를 실감하게 하는 최고의 '증거'임과 동시에 다시금 그 존재를 허방으로 밀어 넣는 '너'의 '꿈'이다. 이 몸을 터뜨려버림으로써 존재는 자신의 비존재, 홀로그램으로 가득찬 껍데기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오류를 모르는 절대자 아버지의 전지전능함에 '빵꾸'를 내버린다. 몸 속에 각인된 아버지의 기억을 부정하고 순결한 자신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역설적으로 몸을 꼬집고 할퀴고 물어뜯으며 두드려댄다. 비록 그것이 '마녀'가 되어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지는 일이라 할 지라도 더 이상의 방법은 없다. 이 무섭도록 참혹하고 끔찍한 유희를 통해 아버지 남근(phallus)이 표방하고 있는 표상체계의 허위를 찢어 발길 수 있다면, 그리하여 오늘도 "비맞은 개처럼 욕조마다 붙은/전화기를 붙잡고 혼자 짖고 있"(「비에 갇힌 불쌍한 사랑기계」)는 저 불쌍한 사랑기계들의 코드를 바꿔칠 수 있다면, 그 어느 것도 마다할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시인기계, 이 불쌍한 사랑기계에 각인된 아버지의 '저주'일는지 모른다. 시인기계는 저주로 작동한다. 그것은 애초에 사랑을 위해 증오를, 구원을 위해 전락을, 지복을 위해 지옥을 선택하도록 설계되어져 있다.

이 시인기계에겐 탈주의 동반자 데커드도 없다. 애인은 그녀를 따라 나서기 보다는 그녀를 집어 삼키며 다만 '길게 피륙을 짤 뿐이다.' 복제인간 레이첼과 시인기계 김혜순이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녀에게는 아무도 없다!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욕망뿐이다. 천공에 구멍을 내려는, 태양을 파열시키려는 욕망만이 아버지의 저주에 대항하여 탈주를 부추길 뿐이다. 멀리서 하, 하, 하, 웃고 있는 아버지의 비웃음소리가 들린다. 할 수 없다. 얼른 "뚜껑을 열어 끓고 있는/내 골을 들여다"(「궁창의 라면」)볼 밖에. 그리고 "이제 막 자궁 속에서 구워진 살 덩어리들/푸들푸들 첫 공기에 떠는 아가들/기름살 덩어리들/맛있고, 따뜻하고, 물어 뜯으면 피 흘리는 덩어리들"(「이 밤에」)에 날카로운 이빨을 갖다대고 서서히 갉아먹기 시작한다. 덩더꿍!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김혜순 시인에 대해 무언가를 이야기하기에 아주 적합치 않은 사람이다. 동년배의 친구로 고락을 같이한 일도 문단의 후배로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은 적도 없다. 지난 연대의 어느 끄트머리에서 우리가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다만 나에게 80년대와 함께 각인된 하나의 언어, 하나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았다. 가령, 그녀는 "촉감 연습 시간이야/눈을 감고 열 손가락으로 빚어/만들고 느끼는 거야/자 지금 이 순간 시궁창으로부터/이것을 집어/올려봐"라고 속삭이는 '판토마임 강사'였고 '딸을 낳던 날의 기억'을 판소리 사설조로 중얼거리는 광대였을 뿐이다.

지금에 와서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으리라고 짐작되지만, 그녀와 그녀의 동세대 시인들이 막 처녀시집을 펴내고 연이어 그 동안 적재해왔던 시어들을 마구마구 토해내기 시작하던 무렵, 그들의 언어는 곧바로 문학적 출발점이자 궁극적 도착지로 여겨졌었다. 결코 짧지 않은 우리의 근대문학사를 돌이켜보아도 한 세대의 문학적 행위가 이토록 강렬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적은 드물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모든 뛰어난 문학이 그러하듯 현실의 편린들을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현실의 틀을 새로 짤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한 일은 현실 곳곳에 '거울'을 장착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주형(鑄型)'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뜨는 행위였다. 그들에 의해 비로소 오늘날 우리가 '80년대적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인지되기 시작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그것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그러했다고 믿는 그것과는 분명 상당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이미 '판토마임 강사'를 넘어선다. 그들은 실재의 창조자다.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모자에서 비둘기와 토끼를 끄집어내는 그들의 행위는 데이비드 커퍼필드를 능가하는 '마술사'의 그것이라고 할 만하다.

이제와 그 마술이 얼마나 현란하고 아름다웠으며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이었는지를 고백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들 곁에서 그들이 꾸며내는 무대를 지켜보며 하루를 지새는 것이 업이 된 나의 선택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나의 뇌와 가슴과 목소리에 수백만 볼트의 전류를 흘려 넣었다. 그러나 모든 마술의 세계는 그것이 황홀한 것인 한 그 비밀을 엿보고 싶은 충동을 잠재우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 남산에 있는 한 학교에서 김혜순 시인을 처음 만났을 때 내 심정이 그러했다. 유독 그런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마술사들이 많은 그 학교에서 나는 황홀했던 과거의 마법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 여전히 그것에 몸을 깊숙이 담그고 둥둥 떠다니고 싶기도 했다.

길지 않은 시간 그녀와 함께 하면서 나는 그들의 마법의 비밀을 조금은 눈치챌 수 있게 되었다. 결론은 이렇다. 한때 나를 미혹했던 마술사들의 주문은 '그 날'이었다. "그날내남자친구들은머리를깎았고나는깍지않았다. 6년전오늘그들은뒤엉켜일어나軍歌를부르며흩어졌고나도흩어졌다. 뿔, 뿔, 이......(중략)......6년전오늘미칠것만같았다. 참을수없었다. 그누구라도참을수없었을거다. 나는정말견딜수없어옷을몽땅벗고머리르빡빡밀고팔뚝을지지려고몸부림쳤다. 그러다가가족들몰래오대산월정사로줄행랑을쳤다. 그망할놈의부처를피해서맹렬히."(「出家記」)는 또 다른 마술사의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중략)......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이성복, 「그날」)와 섞이고 조우하며 마력을 확대한다. 그리고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최승자, 「즐거운 일기」)로 변형되어 '아싸라비아'라는 주문으로 완성된다. 김혜순, 그녀는 다시 이 주문을 자신의 등허리에 꽂혀있는 수많은 케이블선을 자르는 데 사용한다. 온몸을 감싸고 있던 스크린을 찢고 내장된 홀로그램이 펼쳐지기 위해서는 비밀번호가 필요하다. 아마도 주문을 비밀번호로 전환시킬 줄 안다는 점에서 그녀의 마법은 동세대의 아날로그 방식을 넘어 거의 '디지털-매직'의 수준에 이른 것 같다. 당신들에게 오늘 그녀에 관한 비밀 하나 털어놓겠다. 그녀는 가슴이 터져버린 사이보그다. 혹 그녀를 만나게 되면 아직도 푸른색으로 칙칙거리는 모니터의 소음부터 죽이고 이야기를 시작하기 바란다. 그녀에게는 안식이 필요하다. 더 이상 "수천개의 수상기들이 철썩거리는 소리" 속에 혼자 내버려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그녀-시인기계의 절망, 고장, 고통, 고독을 통해 우리는 이곳 바깥으로 가는 길을 알게 되었는데. 그녀-시인기계가 그 바깥에서도 썪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는 소금인데. 무엇보다도 그녀-시인기계가 바로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출구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