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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김종길
5,000년 전의 남자, 金宗吉
김강태
1991년 9월 19일 목요일, 뉘른베르크에 사는 평범한 중년의 지몬(Helmut Simon, Erika Simon) 부부는 알프스 등반 코스에서, 하산 중에 크레바스가 있는 빙원을 만나면서 위대한 발견을 한다. 살이 가죽처럼 변한 사체였다. 얼음 밖으로 돌출한, 동전만한 상흔이 난 다갈색 피부의 엎드린 상태. 앙상한 등뼈가 완연했다. 녹은 얼음 사이로 사체의 바지 ─촘촘히 꿰맨 자욱이 있는─ 가 보이고, 활짱·자작나무 껍질그릇 등도 자리에 널려 있었다. 외짤 알프스, 인스부르크 근방의 하우슬라프요흐라는 곳에서였다. 그들은 처음에 50여년 전에 실종된 이태리 음악교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아니었다. 나중에 보니 도끼·가죽신·등의 화상 흔적·채찍 흔적도 있었다. 9월 24일 사체를 넘겨 받은 저명 고고학자 라이너 헨(Rainer Henh)·콘라드 슈핀들러(Konrad Spindler) 교수는 비로소 이상한 느낌을 갖는다. 한 오백 년 쯤 됐을까? 아니다. 그는 ‘5,000년 전의 남자’였다! 정식명은 외찌(Otzi), 40세 정도의 빙하 미이라로 선사시대의 얼음인간(Iceman)이었다. 외찌는 오스트리아 아이들에 의해 ‘눈 속에서 홀로 죽은 불쌍한 사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완벽하게 보존된 미이라가 탄생한 순간이다.1) 어느 날, 지나치는 해외 뉴스를 무심히 본 ‘5,000년 뒤의 남자’ 김종길 시인은 그 감흥을 이렇게 읊는다.
사슴을 쫓다 한 발 헛디딘 것일까. 硫黃불 지글거리는 地獄은 아니지만 눈굴헝 설흔 길이면 숨 거두기엔 족했으리라.
그로부터 五千年,너는 肉身으로 버젓이 부활했다. 마흔 다섯 살의 멀쩡한 四肢,洞窟 모닥불 연기에 그을린 허파. 인스부룩 근방 어느 골짜기,푸른 얼음 속이 오히려 따스했으리. 티롤의 솔바람에 감기운 너의 瞳孔이 마지막으로 바라보았을 알프스의 노을….
五千年도 너에겐 한 나절 낮잠에 불과했던가. 네게도 소리칠 마지막 絶叫는 있었던가. ― <五千年> 전문
시인은 무엇을 읊고 싶었던 것일까. 연로한 시인의 감각을 깨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김종길 시인의 새로운 영역이라고 일컬어도 좋을 최신작시 <오천년>2)은 우리들에게 기묘한 감동과 함께 서서히 충격을 주는 작품이다. 너른 빙하와 설원雪原. 그리고 5천년 동안의 고독, 기인 잠, 그의 영원한 안식처 ‘푸른 얼음 속’…. 그에게도 ‘소리칠 마지막 절규는 있었던가.’ 도대체 그 사체는 5천년 동안 사라지지 않고 빙하 속에서 무엇을 생각했으며 시인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가. 시인은 5천년 전의 미이라를 보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외찌가 들려주는 선사시대의 독백(‘절규’)을 김 시인이 받아 적은 걸까. 소리가 죽어가면서 미동도 없이 사라지는 숨결 속에서 그가 5,000년 뒤의 남자 김종길을 생각했을까. 김종길 시의 비밀이 혹시, 이 스토리에 있는 것은 아닐까. 김 시인은 어느 계간지에 전했다는 자필 원고지를 가지고 와, 낮은 목소리지만 큰 울림으로 <오천년>을 낭송한다.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음성이었다. 떨림이 있었고, 떨리는 손으로 나에게 낭송 원고를 전하신다. 또박또박, 쉼표·마침표까지 정확히 정성들여 찍은 원고. 음성의 휴지부, 마디마디마다 또박또박 쉼표 마침표가 찍혀지는 듯 싶었다. 노시인의 체취가 인상적으로 물씬 피부에 닿는 친필의 원고를 소중히 담는다. 그는 아직 빈 틈이 없다. 노쇠해 뵈지도 않았다. 실로 빈 틈을 보이지 않았다. '96년 11월 9일 토요일 오후 3시 반이었다.
평론가 오형엽 씨의 안내를 받아 그의 은사 김종길 시인 댁을 방문하는 날은 완연한 가을빛이었다. 춥다는 티브이 보도는 어느새 잊은 듯했다. 응접실 창으로 잘 다듬어진 정원이 보인다. 편찮다는 소식도 접한 뒤라, 간단한 인터뷰를 생각한 터에 당신의 낯빛을 살피느라고 우리 가슴은 조마조마했다. 위궤양이 재발하여, 부인의 담석 수술 직후 곧바로 입퇴원을 하신 모습으로는 의외로 원만해보였다. 우리는 지난 10월 11일, 시인의 <仁村賞> 문학 부문 수상을 축하드린 뒤 질문 보따리를 풀었다. 진해의 <김달진 문학제> 세미나에 참여한 뒤 토혈·토사를 하면서 김해 공항에서 급거 귀경, 입원하기까지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는 선생의 말씀은 아직도 다소 떨렸다. 구석진 음식점에서 편치않게 먹은 음식 탓이었다고. 그 좋아하는 담배도 끊은 선생은 두 사람의 손님을 반갑게 빈객으로 흔쾌히 맞아주셨다. 난로 가습기의 몽올거리는 김이 가뭇없이 사라지곤 하는 응접실. 그리고, 부인과 며느리께서 번갈아 내온 차와 과일의 풋풋함, 가지런함, 그리고 세밀한 정성. 나는 따뜻한 분위기의 응접실에서 김종길 시인의 따뜻한 시 <聖誕祭>를 떠올린다.
어두운 방 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山茱萸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밤이 어쩌면 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라곤 찾아볼 길 없는 聖誕祭 가까운 都市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흐르는 까닭일까. ― <성탄제> 전문
이 작품의 일부, 예를 들면 ‘산수유 붉은 알알’은 어린 시절 시인의 생체험이다. 성탄제와 산수유, 그리고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은 어떤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걸까. 왜 이 제목이 작품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 싶은 <성탄제>일까. 새삼 설명이 필요치 않겠지만, 실제로 사그라드는 어린 핏줄의 목숨을 위해 뜨거운 부성애를 보인 아버지의 모습은 성스러움 이상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 시는 조용히 음독할수록 ‘서러운 서른 살’, 아니 마흔의 나이에도 불현듯 모든 이들의 아버지의 서느런(=뜨거운) 옷자락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그 힘의 원천은 분위기에서 오는 은은함이다. ‘은은’이란 감춤의 미덕 같은 것. 시각적으로 말하면 ‘보일 듯 말 듯’에 해당하며, 청각적으로는 ‘들릴 듯 말 듯’이다. 은은, 이 시각·청각의 공감각적 언어, 순결한 뉴앙스. 그가 자신만의 앵글로 유형·무형의 사물을 포착하면 김 시인은 최대한 적확한 언어 감각을 동원한다. 시인 나름의 초감각에서 연유한 것이라 해도 괜찮을는지. 작품 속의 함박눈이 주는 흰빛 풍요와 상서로움, 신성성. 이를 배경으로 한 보드랍고 다스한 서정성은 그야말로 은은한 향내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비록 매화가 흔드는 암향은 아니지만, 이 감성이 곧 김종길 시인 특유의 미려한 시적 감각이리라. 그러므로 이 시는 결백을 상징하는 제의적 측면과 강인한 생명력으로 하여, 시적 화자와 독자에게 ‘붉은 산수유’의 강렬한 이미지를 은은·은근한 혈맥으로 굽이치게 한다. 눈은 그러나 결백인가 하면 여백의 의미도 지닌다. 여백은 호시탐탐, 위험에 항상 노출되는 법. 탱탱한 긴장을 유발하는가 하면 그것이 극심해질 때 고독과 회상·창백과 쓸쓸함·무의미 등을 공유하기도 한다. ‘이윽고 눈 속을/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셨다. 이때, 아버지의 차가운 이마에 맺힌 땀방울과 손에 들린 붉은 약재 산수유는 숨결이 흐려지는 아이 눈망울에 어떻게 투사되었을까. 산수유는 관상용으로 높이 7미터 정도 자라는 갈잎 작은 큰키나무라고 한다. 연한 갈색의 껍질, 분녹색 작은 가지의 짧은 털.3) 특히 이 나무는 가을철이 되면서 그 아름다움을 더욱 뽐낸다. 익을수록 새빨간, 정말로 길다란 앵두알같은 귀여운 산수유 열매 탓이다. 그저 미혹迷惑, 미혹…. 누구든 환히 짙붉은 그 빛깔에 그저 미치고 말리.
산수유나무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면서 다시 한번 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가지마다 무수히 달린 산수유 열매는 익을수록 그 아름다움을 더하고 나뭇잎은 단풍이 곱게 든다. 이때 나무에 따라서 노란색의 단풍이 드는 것과 붉은색의 단풍이 드는 것, 녹색과 노란색의 단풍이 섞여 드는 것, 붉은색과 노란색의 단풍이 섞여 드는 것, 주황색의 단풍이 드는 것 등이 있다.(351~352쪽) 모처럼 세한 삼우歲寒三友라도 만난 듯, 혹시 고결한 피의 뜨거운 자맥질을 아버지에게서 느끼진 않았을까. 이 시는 잊히지 않을 소중한 유년의 추억 속으로 더더욱 아름답게 부채질한다. 마치 시인에게는 ‘강렬한 隱隱’의 색채가 어울리는 듯하다. 이 시 한 편으로, 《회남자》의 <雪山訓>에 나오는 ‘一葉之秋(一葉落知天下秋)’(＝하나의 나뭇잎이 지는 걸 보고 천지에 가을이 온 걸 알 수 있다)는 구절을 떠올리면 너무 분에 넘치는 표현일까. 실제로 그의 작품은 곳곳에서 여러모로 그 나름의 특징적 면모를 지니고 있다. 이 혈맥을 흐르는 진한 따스함은, ‘오늘 아침/따뜻한 한 잔 술과/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던//그것만으로도 푸지고/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세상은/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중략…)//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한 해가 가고/또 올지라도//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고운 이빨을 보듯/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라는 시 <설날 아침에>에서도 반갑게 맞을 수 있다. 김 시인은 ‘따뜻한 한 잔 술과/한 그릇 국’에 감사한다. ‘그것만으로도 푸지고/고마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 빛깔의 핵심은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고운 이빨’이다. 일반적으로 ‘잇몸’은 그다지 유쾌한 단어가 아니다. 그렇지만 ‘어린것들 잇몸’에서 금시 생생한 이미지가 튀는 걸 느낀다. 참 경탄할 만하다. 게다가 귀여운 ‘어린것들 잇몸에’서 신기히 ‘돋아나는/고운(어린, 앙증맞은) 이빨’을 상상해보라. 무리 없는 연상 작용이 우리들에게 싱그런 빛의 현상을 무수히 발견케 한다. 드디어 그는 벅찰 정도의 희망이라는 질량을 일궈내기 시작한다.
여기서 시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보자. (나는 그의 지나온 생애를 자세히 정리할 필요를 강렬하게 느낀다.) 가능하면 숨은 내용 중심으로 지난 삶을 들려달라고 하자 김 시인은 잠시 회억에 잠긴다. …'26년 음 4월 5일, 경북 안동군 임동면에서 부친 金文大 씨와 모친 李英姬 씨(《시학》 동인이자 외숙인 고 李秉珏 씨의 누님)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작가 이문열의 가문(동네)으로 부촌인 석보면 원리동에서 자란 그는 어린 5세 때부터 증조부에게 한문을 배운다. 한학에 밝은 증조부는 종길이 학학에 젖기를 원했으나, 외가는 신교육을 베풀어 사랑방에서 베푸는 신학문 사이에서 양자를 다 접할 수 있었다. (이미 어머니는 종길이 만 2.5세 때 조그만 발진같은 종기가 화근이 되어 황망히 돌아가신 뒤였다.) 외가에서 ‘너, 커서 뭐할래?’ 하고 물으면 ‘소설가’라고 대답했다고. 그의 산문 <학문의 길>4)을 보면, 물리학자 金浩吉 박사의 조부인 명망가 겸 집안할아버지 秀山翁이 종길의 한문(천자문) 입학을 집전하셨다고 한다. 그가 신학문에 빠져드니 증조부가 친히 ‘우리 집안의 한 가닥 글의 맥이 오로지 저 애에게 달렸더니, 이제는 글러버렸어라’는 한시를 지어 안타까워 하셨다고 시인은 회상한다. 진보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수재들만 모인다는 대구사범학교 심상과를 입학한다. 학생들의 사상 문제로 항상 시끄러웠던 학교로, 일인들의 감시가 심했던 곳이었다고. 이때 사상 문제로 고민하던 청년 종길은 혼자서 글짓기·독서·동서양 시, 그 중에서도 폴 발레리를 특히 공부한다. 무척 난해했지만, 일역본 발레리 전집을 독파하기도 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에 눈을 뜬 것이다. '43년에는 사범 동기생 李根雨·李相漢 등과 동인지 《銀河帶》를 만들고, 졸업한 뒤 안동 서부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이한 그 해 11월, 현 동국대학교인 혜화전문 문과에 입학한다. 그 곳에서 국보라는 无涯 梁柱東·異河潤·金光燮·卞榮魯 선생 등, 당대 최고인 학자들에게 배운다. 무애 선생은 강의 도중, 온통 백묵가루를 뒤집어 쓴 모습으로 열강하셨고, 한문과 영문학 담당인 변영로 선생은 인상 착의가 유별나셨다. 모시 두루마기 차림의 전형적인 촌로로 맨발에 대님을 맨 채 구두를 신었으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고. 그의 동기생으로 산사람이자 동대 명예교수인 章湖 시인과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高遠 시인이 있다. 해방 직후, 외가에서 未堂 徐廷柱의 《화사집》·유치환의 《청마시초》·《문장》지 등을 읽는 호기를 갖는다. 불어·독일어도 배우고, 시인 보들레르·투르게니에프의 영역본에도 흥미를 느낀 해였다. 이듬해인 '46년 3월, 나중에 뇌염으로 죽은 김필환·북으로 간 김창훈·장호·고원 등, 몇몇 급우들과 《隱花植物》이란 동인지를 만들더니, 5월에는 《석초시집》을 제작하기도 한 《주간 소학생》 동시 현상모집에 <바다로 간 나비>로 입선한다. 이 해는 전국이 콜레라로 들끓었다. 이때 김 시인의 삶에 중요한 반려인 尹石重 선생과 그 곳에서 교정 보던 朴斗鎭·趙芝薰 시인을 만나다. 특별히 6년 연상인 동탁 지훈과는 허교許交(관습상 7년까지 인정했다)하는 사이로, 그는 좌익 이론에 대한 반박이 탁월했다고. 많은 이들이 지훈을 좋아하는 이유는 시의 훌륭함도 있겠지만, 선생이 선비의 길을 밝힌 <지조론>에 입각힌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어서 '47년 1월, 드디어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門>이 차석 입선, 등단하면서 당시 경향신문 주필인 鄭芝溶 시인을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지용 선생(1902~?)은 그를 심사한 분이었다. <향수>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 작은 생각으로 <고향>도 꽤 좋은 작품인데, 특히 거기에 곡을 붙인 채동선의 노래 또한 긴절한 맛이 한결 깊은 것 같다. 일제 말 휘문중학 조선어 교사였던 정지용. 왜놈들의 우리말 말살 정책 탓으로 영어를 가르쳤지만 뜻모를 웃음 지으며 늘 시상에 젖었던 그는 진정 부드럽기 그지없는 호인이었다고 한다. 혜화전문이 동국대학으로 정식 개명이 되면서 1년을 수학한 젊은 宗吉은 영문학에 흥미를 느껴 영시·시론에 밝다는 선생을 찾아 고려대로 편입한다. 수험생 20명 중, 입학자는 그 혼자였다. 거기서 만난 분이 李仁秀 교수였다. 곧 《麥》이란 제호의 작품집을 타블로이드 판으로 내기도 한다. 지금도 부끄러운 객기 한 가지를 소개하자면, 그가 동대 국문과를 떠나면서 무애 선생의 《용비어천가》 연구 내용인 ‘<특수??조사에 관한 리포트>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하여 당신께 슬며시 올린다. 게다가 ‘보탬이 되시거든 활용하시기 바랍니다’고 부기했다 하니 그 당시의 건방진 치기 만만 또한 일품이었다고 하겠다. 내가 조심히, 김 시인이 석굴암 대불을 노래한 <戀慕> ‘해설’을 썼다고 밝히자 반가워 하며 ‘끄트머리가 박두진 스타일이었다’고 대뜸 대꾸하신다.
당신에겐 千年도 한갖 꿈인가? 아 변함없는 당신의 微笑! 微笑짓는 당신의 언저리에서 幽暗이 소리없이 엷어진다. 당신은 소리없이 幽暗을 호흡한다.(2연)戀慕! 당신에게 내가 감히 戀慕를 느껴도 좋으랴? 당신의 眉間의 그 잃어버린 구슬의 자취쯤 내 戀慕의 흰 화살이 날라앉아도 좋으랴? (끝연)
종교 내음을 풍기는 시는 적으나, 한때 김 시인의 관심은 불교였던 것 같다. 이 작품에 나오는 온화한 ‘미소’와 끝연의 ‘유암’에 대해서는, 숱한 상념을 헤매던 끝에 나는 연꽃을 떠올려 이러한 평문을 썼다.
이 ‘미소’는 무엇일까. 시인은 신기神技에 가까운 본존상을 보고 무엇을 환시했을까. 은근함은, 본존의 간단명료한 곡선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더욱 그윽한 맛을 느끼게 한다. 이 그윽함은 동해 쪽을 바라보는 본존의 응시에서 남성적 생동감을 기저로 한 것으로 주변을 수놓은 연꽃송이와 화합하여 고즈넉한 고요를 내뿜는다. 정淨과 정靜이 서로 어울린 모습이라 할까. (…중략…) ‘유암이 소리없이 엷어’진다는 시인의 복수감각은 매우 탁월하다. ‘당신은 소리없이’ 엷어지는 유암·짙어지는 깊어지는 유암을 호흡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유암·소리없는 엷어짐·소리없는 유암을 호흡하기 등에서 화중군자花中君子인 연꽃을 떠올리는 나의 생각은 위험한 것일까.5)
'48년 2월에 지금의 부인 姜信香과 결혼하다. 그리고 11월, 훗날 영국 유학길에 인생의 중요한 만남을 가질 엘리어트의 《황무지》를 이인수 교수의 지시로 번역한다. 불교 성향의 <연모>·<노을>과 기독교 경향의 <성탄제>를 연상하면서, 그의 종교관에 대해 질문해보았다.6) 종교는 굳이 갖고 있지 않아요, 유가 쪽으로 기울어 있지요. 신앙은 없지만 다만 인간의 내면적 종교 성향은 존중해요. 이어서 들려주는 유학 시험 일화는 흥미로웠다. 그땐 오직 자존심 하나로 버틴 젊음이 있었기 때문에 외국어 공부도 가능했다고. 공짜 미국행 유학 시험에서 2점짜리 점수가 틀려 10년간의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으나, 면접시 미 문정관·문교 관계자들이 ‘교수 수험생’들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꼬와 다리꼬고 팔짱 끼고 오히려 거만하게 반문했다가 떨어졌다며 웃는다. 오로지 한국인 교수의 권위 및 기개를 보이기 위함이었다는 것. 이때부터 자존심이 상한 미국보다 영국에 더 관심을 갖는다. '50년, 영문과를 졸업하면서 대학원에 입학한다. 민족의 비극 6·25가 터지고 공부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뒤 통역과 피난 중에 강사·교사를 겸임하다가 '54년 경북대 영문과 전임강사가 되고 나서 <二十世紀 英詩選>을 번역한다. 이때 靑馬 柳致環을 만난 것. 청마와는 한 학기 동안 함께 근무했다. 현 영남대인 청구대학에도 재직했으나 '58년 고대 영문과로 적을 옮기게 되어 서울로 이주하고 다음 해에 <世界抒情詩選>을 간행한다. '60년은 김종길 시인에게 중요한 한 해였다. 영국 문화원 시험을 통과한 그는 셰필드 대학으로 유학 가서 오랜 동반자 윌리엄 엠프슨(William Empson) 교수를 만난다. 일본·중국 등지에서 교수직을 역임한 엠프슨 교수는 시인·비평가·천재적인 언어학자로 ‘사람이 걸작이고 걸물’이었다는 것. 그의 의복은 허술했지만 당당했고 턱밑 수염도 독특했다. 20년 전 양복바지에 혁대도 없고 언동은 재치와 깊이로 톡톡 튀었다. 이때 김 시인의 자유분방한 기질도 싹튼 것일까. '61년인가, 엠프슨이 금강산을 구경하러 어느 암자에 들렀을 때, 왠 젊은 조선인이 영·불·독어 3가지로 번갈아 말을 걸어오길래 깜짝 놀라 ‘한국은 참 취직하기 어려운 나라’라고 생각했다는 것. 그럴 수밖에, 그윽한 암자 등지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낯선 동양인의 모습을 그가 알 리 만무였다. 김 시인은 옥스포드 대학도 추억한다. 착실·온건·검소한 그들의 국민성을 가진 영국은 자존심과 명예심이 대단한 나라로, 당시 <아이시스Isis>라는 교지에 ‘왕실의 존폐’를 논한 논설이 실렸다든지, 교수들의 ‘강의 부실론’을 내세워 대학 당국과 설전이 벌어져 지식인들 사이에서 설왕설래했다는 이야기는, 35년 뒤 오늘의 우리네 대학 실정을 감안해 볼 때 부러운 것이 틀림없다. 그런 점이 옥스포드를 과거에 명문으로 만들었고 오늘에도 변함없는 최고 명문으로 존속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 곳에서 김종길 시인은 엘리어트를 만난다.
브리티시 카운슬 후원 아래 금년 셰필드 대학에 초빙강사로 있는 J.G.김 씨를 소개합니다. 그는 선생과 그 밖의 몇몇 영어 시인들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하였으며 현대시를 비평적이지만 열의있게 감상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광범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국하기 전에 선생께 경의를 표할 수 있기를 그는 바라고 있습니다.
김 시인은 엠프슨의 이 간명한 소개장을 통해 ‘Faber & Faber’사의 엘리어트를 만난다. '61년 5월 7일, 오후 3시, 30분간의 약속. 그의 옛 기억은 매우 정확했다. 비서의 안내를 받아 문을 여니 창밖을 바라보는 엘리어트의 뒷모습이 뜻밖에 거구였다. 돌아보는 그의 얼굴은 준수했는데, 방금 자기 회사에서 갓 나온 《한국 도자 예술(The Ceramic Art of Korea)》을 보는 중이라 했다. 도자기에 관한 얘기를 조금 나눈 뒤, 영어로 번역된 한국시가 있습니까, 라고 그가 방문객에게 묻기에 준비해간 지용의 시 <九城洞>을 보이니 엘리어트가 ‘최고!’라며 과찬했다는 것이다. 이인수 교수의 번역물이었다.7) 김 시인은 그러나 엘리어트 시와 시론에 충격 받은 건 사실이지만, 지적 학문적 경외의 대상이었지 전적으로 그를 닮을 생각도, 따르지도 않았다고 한다. 내 소견으로는 아마 ‘신구 학문’을 어릴 때부터 익힌 탓으로 자연스레 체질화한 열린 사고 방식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57년, 70 노인으로 늘씬한 미모의 비서 발레리 플레쳐 양과의 결혼, 허락도 받지 않고 그의 시를 번역한 점에 대한 사과, ‘좀 앞으로 구부러진 어깨 위에 늙었으면서도 어딘지 늙지 않은 정채를 지닌 그의 근엄한 용모는 사람을 위압하는 듯하면서도 무한히 겸허한 수양의 미를 엿보게’ 한다는 인상 비평도 관심을 끈다. 그는 <하나의 辨明>에서 엘리어트와 ‘첫 해후의 충격’을 밝히곤 속깊은 생각을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 자못 민족주의풍의 이 글을 보자.
나는 엘리엇의 시풍을 처음부터 추종할 생각은 없었다. 그를 찬탄하면서도 나는 그와는 다른 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설사 내가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중략…) 심층적인 것일 것이다. 내가 영시를 공부하고 엘리엇을 전공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와는 다른 동양인으로서 그와는 다른 문화 전통에 속해 있고 그와는 다른 개인적인 체질과 성장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와는 다른 시를 쓸 수밖에 없지 않은가.8) 당연한 견해지만, 영국의 성직자 시인 G. M. 홉킨즈처럼 ‘내가 위대한 고전을 읽는 것은 그들을 찬양하고, 그들과 다른 시를 쓰기 위해서’일 것이다. 문학의 주체성 회복에 관한 김 시인의 글은 오늘날의 작가들에게도 전적으로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진실한 삶을 빙자한 ‘탈바가지 문학’부터 ‘분뇨문학’까지, 도대체 싱그러운 처녀성과 참신한 창의성이 돋뵈는 글들이 요즘 거의 없는 것이 문제다. 오로지 오브제로 채용되는 것은 문학을 빙자한 채홍사彩虹使(?)의 사행심리射倖心理. 아랫구멍으로 황금 분뇨가 ‘혹시나’ 쏟아지길 학수고대하는 구린내들 투성이가 문학판에 너절히 널렸지만 결국은 ‘역시나’일 수밖에 없다. (엄연히 밝히노니, 해당자들을 구치소에 보낼 게 아니라 정신 병원에 보낼 것을 제안한다. 거기서 진짜 섹스의 금단 현상이 어떤 것인가를 맛봐야 한다.
내가 ‘정신주의와 선의 관계’와 ‘작금의 문학 풍향’을 질문하자, 김 시인이 갑자기 목청을 돋군다. 그건 정신주의가 아니라 흉내에 불과해요. 정신이나 선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면서 그들을 잔뜩 부추기는 평론가도 큰 문제지요. 유명세를 잔뜩 동원한 야합 아닙니까. 비평가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원칙주의자여야 해요. 요즘 일부 지면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른바 유명 시인들, 참 문제 많아요. 그저 명리나 세속을 쫓으면서도 도통한 척하고, 그나마 개성미가 돋뵈는 한하운·천상병 류의 궁핍·고뇌 등, 도대체 절실성이 없어…. 시인이 선의 정신에 얼마나 철저한가가 중요한 게 아닌가요. 일본의 ‘하이꾸’가 선과 관련이 깊은데, 아마 이걸 흉내내는 것 같아…. 혹시 경제적 풍요가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닌지. 원로 자신들부터 정신 차려야지! 이렇게 흥분조로 질타한다. 문득 나는 김 시인의 에세이 <돌의 논리>를 떠올렸다. 가슴에 손을 엊고 생각해보라. 우리의 고결과 냉철과 밀도와 중량에 모자람이 없는가를. 우리도 돌처럼 희고 차갑고 모질고 무게 있는가를. (…중략…) 돌의 깨끗함과 차가움과 돌의 경도硬度와 중량 없이는 그것이 간직하는 불꽃과 열기, 탄력과 약동과 포효의 잠재력도 믿을 바 못된다는 것을.9) 그는 진정 뜨거운 시인이요, 교수였다. 이 글은 마치 <청춘예찬>을 연상시킬정도로 호흡이 벅차옴을 느낀다. 얼마나 가슴이 더워오고 탁 트이는 힘있는 글인가. 놀랍게도 젊은이 것이 아닌, 이순이 가까운 13년 전의 글이다. 몇 군데를 여행한 뒤 돌아와, 그는 '63년에 《Five Romantic Poets》를, '65년에는 《詩論》을 간행한다. 번역본 《폭풍의 언덕》을 발간하고 드디어 '69년에 시집 《성탄제》를 상재하는 기쁨에 젖는다. 그 해, 미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을 여행하는데, 시인 로버트 로월·게어리 스나이더 등과 저명한 비평가 클리언스 브룩스·로버트 펜 워런 등과 우리도 흔히 기억하는 거장들과 면담하는 기회도 갖는다. 그러고 보니 김 교수는 당대를 전 세계의 유명 문객들과 화려한 교류를 함으로써 멋진 삶을 체험한 몇 안 되는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74년 제2시론집 《진실과 언어》를 발간하고, '77년에는 시집 《하회에서》를 상재, 다음 해 ‘목월문학상’을 수상한다. '84년 문교부 파견 교수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한 학년동안 영문학을 연구하다. '86년 갑년을 맞아 수상집 《산문》을, 시집 《황사현상》과 시론집 《시에 대하여》를 5개월 사이에 3권을 발간하는 저력을 보인다. 그러나 호사다마인가. '89년 위궤양으로 고대 부속병원에 입원하면서 그는 건강의 이상 징후를 처음으로 느낀다. 피로와 담배 때문이었다. 최근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애란 시인 셰이머스 히이니와의 교류는 인상적이었다고 지금도 술회하고 있다. '91년, 과작인 그는 시선집 《천지현황》을 미래사에서 발간하고 '92년 정년 퇴임을 끝으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그는 4월, 한시 작품을 중심으로 如初 金膺顯의 글씨로 시화전을 개최하는데 그 수익금으로 ‘석영장학회’를 설립하기도 한다. '93년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피선되는 영광을 누리고, 이후는 주로 번역문학에 힘을 쏟아 각종 세미나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
김 시인은 작가들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어떤 기록이라도 절대로 버리지 말고 소중히 간직하라고. 한 예로, 버트란트 러셀은 어느 여인에게 띄우는 편지를 7천여통을 남겼다고 한다. (물론 우리도 청마 유치환과 규수 시인 이영도 여사 간의 순결한 사랑의 편지를 생각할 수 있다. ‘愛慕는 舍利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는 이 여사의 곡진한 사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며 임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한 청마의 내적 타는 그리움. 청마는 39세 장년에서 육순의 노경에 이르기까지 20년동안 이영도 여사에게 약 5천여 통의 편지를 남긴다. 후배문인 누군가가 청마·정운 간의 서간을 정리, 당대의 문단 이면사를 소개해 볼 만하지 않을까.) 서양에는 러셀의 편지만 계속 소개하는 출판사도 있다는데 우리 문인들은 어떠한가. 거의, 오직 작품뿐이다. 우리는 부끄러운 개인사라 하여 무조건 감추고 없애버리는 좋지 않은 습관을 갖고 있다. 왜 꼭 유명인만을 문제 삼아야 하는가,고 김 시인은 반문한다. 쪽지·낙서·잡기 등, 아무 것이나 시인의 기록물은 남기자는 것. 그는 아쉽게도 일제 때의 자기 기록(서간집)이 없음을 매우 서럽게 생각한다. 왜인들은 시인의 정신마저 집요하게 망가뜨려 놓았다…. 그렇다면, 김 시인의 서간문 같은 것은? 윤동주 시인의 친척 윤일주 씨와 부산 친구이자 시인인 許萬夏 씨가 일부 갖고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허 씨는 김 시인의 6년 연하로, 미술에 관한 예술론적 에세이도 발표하고 있다. 허 시인이라면, 청마의 시와 삶을 얘기한 《부드러운 시론》의 저자…? 이 책의 발문을 쓴 이가 바로 김종길 시인. ‘아주 없어진다’는 뜻의 ‘절멸絶滅’이란 단어를 좋아한다는 허 시인. 그 글에는 ‘유난히 지적 호기심이 강하고 다정다감한 우수한 병리학자요 시인’이라고 저자를 소개하고 있다. 허만하 씨는 군 시절 브리핑의 대가였으며 현재 청마 전문가로, 기록적 요소가 짙은 이 책은 세인의 관심을 충분히 끌 것 같다. 이때, 집으로 달려온 전화가 사모님에 의해 전해진다. 허만하 씨였다. 정말 우연치고는 놀라웠다. 문득 <受話器를 놓고 보니>라는 허 시인에게 바친 시구, ‘수화기를 놓고 나니/해운대 가까운 그쪽 바닷가/먼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구료’가 생각났다. 김 시인도 웃으며 인터뷰 현황을 전하고는 ‘자네, 내 편지 몇 통 갖구 있지?’ 하고 묻는다. 그의 시집에는 헌시가 비교적 눈에 띈다. 청마·尹一柱 씨를 비롯하여 ‘절대로 때묻지 않는 詩人 朴在森’·허영자·박양균 시인 등.) 쭦 사회참여적인 시를 발표한 적은? '80년 ‘광주의 봄’ 직후에 쓴 시 <신록>이 있다. 조선일보에 게재했다. <軍에 간 아이에게>는 검열에 걸리기도 했다. 둘 다 시집 《황사현상》에 실려 있다.
그는 노벨문학상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갖는다. 사실상 우리의 문학 수준이 상당하다는 것을 김 시인은 인정한다. 다만 번역 및 세부사항에 좀 문제 있지만, 노벨문학상을 못 탄다고 뭐가 그리 문제가 되느냐는 것이다. 노벨상 감으로 굳이 꼽으라면 단연 서정주 시인이며, 이웃으론 중국 불멸의 ‘반체제 작가 베이다호’라고 못박는다. 또, 오에 겐자부로가 정신 미숙의 아들과 나눈 생체험이 값어치 있는 생생한 문학을 낳았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김지하·이문열·안도현 등을 좋은 작가로 친 그는, 번역에 관한 대화에 이르자 다시 목청이 높아진다. 좋은 번역은 좋은 창작이라는 지론. 그것도 영어 속담인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Slow but steady)’ 해야할 것이라고. 최재서의 따님 최양희(호주 국립대) 교수의 영역서 《한중록》이 현재 영국에서 호평을 받고 있으며, 조선조 후기 시인 삿갓 김병연을 배경으로 한 이문열의 《시인》 또한 각광을 받고 있다고. (이문열은 단편 <시인과 도둑>을 장편으로 개작했다.) 불어로 펴낸 장 노엘 주테의 《춘향전》도 불어권에서 새롭게 읽힌다는 것. <번역 문학의 존재 이유>란 최근 신문 기사10)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우리의 번역 문제에 대한 김 시인의 3가지 사유를 되밝힌 글이었다. 필자 李宗郁은 지난 11월 7·8일 열린 ‘한국문학 번역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한 김종길 시인의 예리한 견해에 한껏 동감한다. 그는 김 시인이 첫째, ‘노벨 문학상에 대한 성급하고 다분히 천박한 꿈 때문에 한국문학의 번역 및 해외출판의 성과가 미흡하다며 동기의 미숙함을 꼬집었다’고 적는다. 둘째는 김수영 시인이 번역으로 산 비참한 삶을 예로 들었다. 생계를 위한 지겨운 번역. 그 시간에 빛나는 시를 써야할 수영이 ‘구걸 번역’에 종사했으니 기기 막힐 뿐이라는 것이다. 아내가 돈쓸 일이 있다고 재촉한 다음날('68년 6월 15일), 술 마시고 귀가하던 수영은 교통사고를 당한다. 주머니에는 번역료 7만원이 들어있었다…. 그해 ‘창비 여름호’에 실린 파블로 네루다의 번역시는 감동적이었다고. 지극히 낮은 처우를 해주는 풍토를 심히 부끄러워한 수용의 시로 <이 韓國文學史>가 있다. 셋째는 번역자(집단)에게 정·재계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식인들의 적극적 참여 문제. 일본 법정대 출판국의 ‘우니베르시타스 총서’를 예로 들며 국가간 문화력의 차이를 아프게 지적했다. 김 시인은 유명 작가와 작품보다 ‘가장 한국적인 문학이 무엇인가’를 찾아 보고, 그를 소개하는 번역에 매달리겠다며 낮게 힘주어 말한다. 그는 모든 면에서 적당주의를 경멸하고 거짓에 대한 결벽증을 갖고 있다. 솔직하고 겸허하게 모지람을 수용하여 채워나가자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아마 진정한 선비로, 어떤 때에도 직언을 서슴치 않았지만 반면에 신중하고 관대했던 동탁 조지훈을 닮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문화면에서도 그는 상업주의와 물량주의를 싫어한다. (그때 신혼여행에서 갓 돌아온 제자 내외의 인사가 있어 동석했다. 선생께서 주례를 서셨다고. 그런데 예식장 음식이 안 맞아 다시 재입원하게 된 동기를 만들어준, 24시간 뉴스 전문 티비 <YTN>에 근무하는 제자였다. 곧이어 고대 국문과 서종택 교수 일행이 방문한다. 약속 시간을 본의아니게 두 시간여 빼앗아 미안한 마음.) 김 시인의 깔끔한 시, 시청각 이미지가 팽팽한 초기 시를 감상해보자.
여자대학은 크림빛 建物이었다./구두창에 붙는 진흙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알맞게 숨이 차는 언덕길 끝은/파릇한 보리밭―/어디서 軟式庭球의 흰 공 퉁기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뻐꾸기가 울기엔 아직 철이 일렀지만/언덕 위에선,/新入生들이 노고지리처럼 재잘거리고 있었다. ― <春泥> 전문
여울을 건넌다.//풀잎에 아침이 켜드는/開學 날 오르막 길.//(…중략…)//은피라미떼/은피라미떼처럼 반짝이는//아침 풀벌레 소리. ― <여울> 부분
‘춘니’란 봄의 진흙이다. 언 땅이 어느새 안에서 녹아 걷는 구두마다 들어붙는다. 삽상한 이미지를 뿌린다. 풀리는 캠퍼스의 녹는 흙, 학기의 시작을 알리는 정구공 튕기는 소리, 연푸른 신입생들의 종알거림…. <여울>의 ‘은피라미떼처럼 반짝이는//아침 풀벌레 소리’ 감상은 점입가경이다. 평자들에 의하면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페시미즘·관조주의·미학주의·허무주의·견인주의·초월주의 등. 그러나 대체로 초기시의 미학성과 후기시의 견인주의·관조주의로 집약된다. 슬픔이 진한 시 <채점>은 두고두고 독자들 가슴을 적신다. 감동의 극치감을 누를 길이 없다, 화사한 수사가 없음에도.
너는 키가 큰 편이었지,/너는 언제나 곧은 姿勢를 하고 있었지.//내가 學期末 試驗答案을 採點한 것은/新聞의 버스事故 記事 가운데서/너의 이름과 寫眞을 본 뒤였어.//90점이 조금 未達인 點數를/네가 받아 볼 수 없는 評點表에/또박또박 나는 옮겨 적었지.(부분)
한편, 미당에 푹 빠진 오탁번 시인은 학부 시절의 은사인 김종길 시인에 대해 이렇게 품평한다.
시작품의 秘義를 정확무비하게 꿰뚫어보는 비평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金宗吉 시인을 든다. 내가 영문과 학생이었을 때의 잊을 수 없는 스승이기도 한 그분은 옆사람이 주눅들 정도로 언제나 시작품이 숨기고 있는 오묘한 비밀, 그 작품을 쓴 시인마저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시적 의미를 정확한 유추와 직감으로 밝혀내곤 하였다. (…중략…) T.S.엘리어트나 W.B.예이츠나 딜런 토머스의 시작품도 사실은 김종길 선생을 통하여 이해하였기 때문에 간혹 다른 이가 번역하고 해석해놓은 것을 볼 때면 시작품이나 시적 담론이라기 보다는 영문학의 문화적 배경론이거나 영어 어휘의 난삽한 번역같이 느껴지기도 했었다.11)
오 교수의 표현이 아니더라도, 김 시인의 비평적 견해는 적확한 것으로 제자와 문인들 사이에 정평이 나있다. 영문학의 경우, ‘영문학’에 대해 제대로 된 인식이 없다는 점을 ─최근 발간한 반년간지半年間誌 《안과밖》에서 김우창 교수도 좋은 지적(국가적 차원의 미흡한 투자와 영문학 교육 내실의 모호성, 그리고 최근 우리나라 영문학계의 토의 및 학문 내용의 의의 미흡을 심각하게 지적12)했지만 ─오 교수도 우려하고 있다. (《안과밖》에 실린 김영희의 <영문학 위기론의 재검토>는 우리 문학계도 꼭 검토할 만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품격이 보이는 다음 작품에 동행하자.
다만 저 재로 사위어 가는 쌀비아 꽃밭과/ 잎지는 플라타나스의 빈 校庭을/온 아침 넋없이 바라보며,//이 서릿발 속에서도 홀로 오히려 오만한,/ 한 떨기 끼끗한 菊花꽃 앞에,/잠시 말을 잃고 목이 메일 뿐.(부분)
이 <국화 앞에서>를 나는 김 시인 자신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이해하고 있다. 시집 《河回에서》는 김흥규의 멋진 해설이 보인다. 김 시인의 작품 전반을 ‘절제와 긴장’으로 값매김한다. 그리고 ‘인내와 초월의 이미지’로 정리13)하기도 했다. 이같은 한恨을 주제로 나눈 자리에서도 김 시인은 시론집 《眞實과 言語》에서 ‘동양에 있어서의 비극적인 순간은 흔히 주인공의 열정적인 참여보다는 초연한 관조 가운데 놓이는 순간이다. 예이츠가 생각한 것처럼 동양에는 비극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동양은 설사 서양의 그것처럼 열정적이거나 야단스럽지는 않을지라도 그 나름의 비극을 가지고 있는 것’14)이라고 밝힌다. 이러한 ‘비극론’은 자신의 시에서 더욱 자명해진다. 즉, 자신이 생각하는 비극의 심지를 불밝히려 한다. 그의 비극은 시적 대상을 늘 감싸거나 따스한 보살핌으로부터 항상 비롯하는 것이다. 김종길 시인과 만나는 동안 내 머리 속은 어느 민족주의자 생각으로 가득찼다.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홍기삼·강영주 교수의 전문적 연구에 의하면, 그는 공산주의자라기보다 민족주의자다.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벽초는 관조주의자가 아닐까. 나 역시 벽초를 좋아한다. 미완성 대작 《임꺽정》에 그린 것처럼 벽초가 ‘반란꾼’이라서. 소설을 읽으면서 다가오는 느낌 중에 꺽정이와 벽초의 운명적 절묘한 만남을 나는 늘 실감한다. 혁명성과 진보적 색채의 어울림, 그가 막판에 정치판 마술에 뛰어들면서도 북에서 '68년까지 득세한 걸 보면 보통의 행운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정치의 끝이 미완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는 그러한 자신이 부끄러워, 평생 애모한 꺽정이와 성급히 결별한 것이 아닐까. 과연 그는 반란아인가? 그렇다면 어떤 반란아인가. 홍명희는 다만 민족을 향한 순수 내적 저항과 반란의 기질을 지닌 존재라고 짐작할 뿐이다. 이 책에는, 잘 알다시피 수많은 등장인물 중에서 귀기貴妓 황진이가 평생 연모한 ‘송도 삼절’의 서경덕·《토정비결》의 이지함·나이어린 이순신도 등장한다. 벽초는 이런 훌륭한 조상을 통해 우리에게 삶의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악인도 많이 등장하지만 그 악인들이 그다지 싫지가 않은 것은 그들 모두가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이며 절대로 젖혀놓을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위가 ‘어떻게, 왜 사는가’에 대한 현명한 여러 답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15) 대담 중에 나는 김 시인 또한 벽초를 빼박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오늘의 풍운아, 젊은 김종길 시인도 늘상 ‘시적 반란’을 꿈꾼다. 학문에 대한 그의 고집은 현대판 민족주의자로서 확실히 특기할만하다. 그리고 이런 경향의 시도 돋보인다. ‘그날 밤 금계랍 같은 눈이 내리던/惡寒의 땅에//오늘은 發熱처럼 복사꽃이 핀다.//목이 타는 봄가뭄,/아 목이 타는 봄가뭄,//眩氣症 나는 아지랑이만 일렁거리고,//앓는 大地를 축여줄 봄비는/오지 않은 채,//며칠째 黃沙만이 자욱히 내리고 있다.’(<黃沙現象> 전문) 이 작품은 모종의 혐의가 짙다. 우리의 정치 사회적 ‘황사현상’은 정말 지독하지 않았던가. 일반적으로 ‘유가적 전통성 인식·생생한 이미지 구현·상징성 제고’ 등이 그의 시적 특질이 아닌가 한다. 그의 시가 김우창이 ‘프로이트의 이마고(Imago)’ 비유에서 언급한, ‘체험에 깃든 감정의 에센스’라는 말도 여러가지를 유추시킨다. 끝으로 그의 중년을 노래한 시를 읊조리며, '96 한 해를 상념의 잔에 기울인다. 한결같음은 한결같지 않음보다 훨씬 처질 것이다. 김종길 시인의 작업이 앞 자리에 놓은 <오천년>처럼 늙지 않고 또다른 변화가 오기를 기대하는 마음뿐이다. 어느날 이마엔 흰 눈발이 흩날리리라!/지금 빗발의 珠簾 밖을 서성대는 저 紅顔의 少年처럼/이 나그네도 다시 애띤 볼을 붉히며/어느 창 밖을 서성댈 날은 영영 없는 것일까?(<中年> 부분). ‘5,000년 전의 한결같은 남자’를 탐색하는 작업은 어려웠다. 인터뷰 시간은 오후 3시 반에서 6시 반, 총 3시간. 부인의 세심한 걱정을 뒤로 하며 댁을 빠져 나오면서, 우리는 당신의 오랜 건강을 빌고 《현대시》 12월호가 나오는 대로 곧 뵙기로 약속했다. 서종택 교수 등과 동행하신 김 시인께서 우리 일행을 끌었지만, 막무가내로 헤어져 나오는 저녁 골목길은 유난히 따스했다. 이미 당신에게 마음의 편지를 띄운 지 오래. 슬쩍 배를 쓰다듬는 오 형을 훔쳐보며 내가 말했다. ‘우리, 저기 돼지 갈빗집 갑시다. 출출허니.’ (1996년 12월호)
註1) 콘라드 슈핀들러, 최몽룡 역, 《5천년 전의 남자》, 청림출판, 1995. 2) 김 시인의 최근작으로, 곧 <창비> '96. 겨울호에 실린다고 했다. 3) 김태정, 《우리 꽃 백 가지》, 현암사, 1993, 349쪽, ‘산수유 편’. 4) 김종길, 《散文》, 정우사, 1986, 70쪽. 5) 김강태, <소리없이 유암을 호흡하다>, 《詩와 佛敎의 만남 짞》, 동국역경원, 1989. 6) 월간 《조선문학》, 1995. 4월호, 13~18쪽. ‘김종길 시인의 연보’ 참조. 7) 김종길, <엘리어트와 인간>, 《산문》, 60~69쪽 참조. 8) ＿＿ , <하나의 변명>, 《조선문학》, 1995. 4월호, 22쪽. 9) ＿＿ , <돌의 논리>, 《산문》, 158쪽. 10) 이종욱, <번역문학의 존재 이유>, 《문화일보》, 1996. 11. 9. 11) 오탁번, <뙤약볕같은 놋쇠 요령과 저울눈>, 《현대시학》, 1996. 10월호, 133~134쪽. 12) 김우창, <한국의 영문학과 한국문화>, 《안과밖》, 창비, 1996. 창간호, 12~13쪽. 13) 김흥규, <世界內的 超越의 비전과 節制>, 시집 《河回에서》, 민음사, 1978. 14) 김종길, 《眞實과 言語》, 일지사, 1974, 207쪽. 15) 최 명, 《소설이 아닌 임꺽정》, 조선일보사, 1996, 24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