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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김광림
窓, 그 矛盾의 정원에서 펼쳐지는 現實과 心像의 변주곡
장경기
낡은 문풍지에서 서낭당 기와 냄새를 음미하던 美의 司祭무심코 창 밖에 시선을 주었다. 창유리는 자신의 희디흰 머리조차 비춰주지 않았다. 유난히 투명한 허공이었다. ‘다시는 밖으로 나갈 수 없으리라. 다시는……’ 그는 마치 형장에 서 있는 사형수처럼 마음 속으로 되뇌이고 있었다. 창 밖은 이미 건너와버린, 돌아갈 수 없는 신기루처럼 여겨졌다. ‘窓이란, 사형수가 絞首의 순간에 짚어보는 공허를 틀에 끼워 놓은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1)끌리듯 창문 쪽으로 다가간 것은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세상을 만져보듯 유리창에 손끝을 미끄러뜨려 보았다. 먼지들이 손끝에 묻어났다. 그것들은 지나온 세월의 흔적 같은 것이었다. 그 미미한 먼지 중 어느 알갱이 속엔가 자신의 유년이 비밀의 정원처럼 간직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굳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는 이미 그 알갱이 속을 선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외할먼네 기와집은 채소밭 너머 가시울타리 개구멍을 빠지면 거기 있었다 심심하여 들르면 외삼촌 주려고 남몰래 간직했던 엿이며 떡이며 누룽지랑 조금씩 떼어주며 외할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동태철이면 새벽마다 우유 한 병 나르는 심부름을 했다 어업조합에서 숙식하는 외삼촌은 내 언 손바닥에 따뜻한 동전 한 닢 얹어주었다. 한 번은 외할먼네 들렀다가 엿 먹고 바지 벗기우고 어리둥절했다 외할머니는 지린내 나는 내 고추를 꺼내 들고 주문 외듯 <나라는 데는 안 나고 왜 여기 났노>하며 눈다래끼에다 부벼대었다 이 바람에 고추는 빳빳이 서고 괜스레 마려운 오줌기만 자아냈다”2) 고향인 함남 원산 언저리에서 피어나는 기억이었다. 이어 개성 송도중학교 시절, 그리고 평양종합대학 역사문학부 외국문학과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듯 유소년시절에 대한 기억들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를수록 자신에게는 그런 추억을 더듬어갈 수 있는 고향땅이 허락되지 않았음을 더욱 절감해야 할 뿐이었다. 이곳 임진강변인 적성 땅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신의 추억들은 오랜 이끼에 덮힌 채 묻혀 있는 것이었다. ‘그때문이었을까? 창 밖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신기루처럼 여겨진 것은?’창에는 어느덧 구름들이 가득히 고여 있었다. 어즈러이 섞이며 온갖 형상을 지어내는 구름들이 새삼 자신의 지나온 생을 재현해보이는 것만 같았다. 넉넉한 모습의 具常이 유난히 인상 깊게 떠오르는 이유는, 종교로 삼아온 詩만큼이나 오랜 知己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가 맨처음 세상에 내비쳐진 것도 그와의 인연으로부터 였다.
낡은 문풍지에서 서낭당 기와 냄새가 풍기다 보고 또 보고
이윽히 들여다 보면 아슬 아슬 옛 이야기가 생각나다
해 묵은 風紙 위에 빗자욱이 서려 千年 묵은 壁畵 맛이 돋아오르다3)
1948년 구상과 박두진이 《연합신문》에 실어준 그의 첫 작품인 셈이었다. 낡은 문풍지를 보고 또 보고 이윽히 들여다보며, 대상(존재)과 그에 대한 究極的 인식을 객관적 언어로 나타내고자 집착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런 진진함과 사색이 채 봉우리를 맺기도 전에 전쟁은 그를 엄습했고, 그의 스무살은 포화 속을 서성여야 했다. 전우들의 비명이, 피가, 고향 사람들에게 총을 겨눠야 하는 모순의 현실이, 그의 ‘문풍지’를 얼룩지게 했다.
“장미의 눈시울이 가시를 배앝은 가장 참혹했던 달 유월은, 포탄의 자세들로 터져간 내 또래 젊음들은 바리케이트로 넘어져 갔다. 포복처럼 느릿한 155마일 휴전선의 겨드랑 쑥밭길, 지금 꽃과 과실과 새의 털 그리고 노래를 장만하며 있을 너와 나와의 사랑 찬 계절을 짓밟고, 1950년 戰車가 밀리던 해의 가슴팍 무너진 6월은 캐터필라의 두 줄기 자욱만 남기고 갔다”4) 꽃도 무너지면 두려운 것. 이제 參與인가 美인가 예민한 스무 살 시절, 젊은이들이 몸으로 바리케이트처럼 바쳐질 수밖에 없었던 잔인한 6월 전쟁, 그 한가운데를 지나온 그에게 전쟁은 거부할 수 없는 커다란 화두로 엄습해 왔다.
일없이 부러진 가지를 보면 그 다음의 가장이가 안됐다
요행히도 전쟁에서 살아남았을 땐 우리는 어쩌다 애꾸눈이 아니면 절름발이였고 다음엔 찢기운 가슴의 어느 모퉁이가 허물어졌을 것이다
몇 번째나 등골이 싸느랗게 휘어졌다가는 도로 접목 같은 세월을 만났다
새털의 악보를 타고 하야라니 내리는 것은 눈보란가 꽃보란가
꽃도 무너지면 두려운 것 요즈막엔 사랑도 목을 졸라대는 미안한 기별의 나날이다5)
꽃의 꺾임!
처음 인간에게 들킨 아름다움처럼 경악하는 눈 눈은 그만 꽃이었다
애초엔 빛깔 보다도 내음보다도 안 속으로부터 참아 나오는 울음 소릴 지른 것이 분명했다
지구를 꽃으로 변용시킬 신의 의도가 좌절되기에 앞서
수액을 보듬어 잉태하는 생성의 아픔 아픈 개념이 꽃이었다6)
전쟁과 꽃과 음악 사이에서 하나의 상심하는 접목으로 서성이고 있던 20대, ‘참여인가. 美인가.’ 시를 현실의 메시지 쪽으로 돌리느냐. 아니면 예술적인 ‘이미지’ 쪽으로 심화시켜 나가느냐를 놓고 한동안 갈등해야 했다. 그만큼 전쟁은 그의 20대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것이다. 생의 깊은 시름에서 오히려 더 밝고 청량하게 틔워낸 이미지들의 잔치그러나 그는 역시 낡은 문풍지에서 ‘서낭당 기와 냄새’를 음미해내는 美의 사제였다. 그런 그의 천성에 확연히 불을 당긴 이는 박남수 시인이었다. “박남수씨를 만나면서부터 이미지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고 그때 <심상의 밝은 그림자>를 쓰게 되었지요. 그 때부터 난 예술지상주의적으로 가는 것처럼 보였어요” 아가는 손바닥을 턴다.
純粹에 부디친 꽃씨가 떨어진다.
앞자락엔 한아람 풀내음이 안긴 채,어느새 뜰에 고인 햇살이 그득히 視力 앞에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7)
두번째 시집인 《심상의 밝은 그림자》에 나오는 <陽地>라는 시다. 밝은 것을 생각했던 것은 그만큼 현실이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홀홀단신 월남한 그에게 생활은 각박했다. 자살에 대한 생각도 많이 했다. 그런 절박감 속에서 자신을 구원해준 것이 바로 시였다. 시는 그에게 이미 종교였던 것이다.
아가는 죄그맣게 웅켜쥐었던 ‘원죄’를 놓았다 영혼을 햇살에 담아 가지고 날아오르는 비둘기8)
생의 시름 속에서 오히려 새순처럼 틔워냈던 시들은, 이 순간 저 창 밖의 구름들만큼이나 평화스럽고 맑은 심상의 풍경들이었다. 현실의 비극성과 고통이 크면 클수록 시의 심상이 더욱 맑아지는 그의 역설적 방법이 빚어낸 시는 얼마나 밝고 청량한 이미지들의 잔치였던가!
건반 위를 달리는 손가락
울리는 象牙海岸의 海嘯
때로는 꽃밭에 든 향내나는 말굽이다가
알프스 山頂의 눈사태
쪵
안개 낀 발코니에서 유리컵을 부딪는 泡沫이다가
振幅의 소용돌이를 빠져나오는
나긋한 휘나레 그 화음을9)
1 도마 위에서 번득이는 비늘을 털고 몇 토막의 단죄가 있은 다음 숯불에 누워 향을 사르는 물고기 고기는 젓가락 끝에선 맛나는 분신이지만 지도 위에선 자욱한 초연 속 총칼에 찝히는 영토가 된다
2 날마다 태양은 투망을 한다 은어떼는 쾌청이고 비린내는 曇天과 같아10)
군더더기 없는 투명한 언어세계. 고도로 세련된 지성의 작용에 의해서 맑고 단단한 심상, 곧 이미지로, 또는 그러한 이미지의 무리로 응결시키려한 산물들이었다. 1957년 전봉건, 김종삼과 함께 했던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에서 부터 이미 그의 영역으로 자리잡아갔던 이미지즘! 1960년 중반에 이르면서는 이를 기반으로 한 주지적 서정을 확고하게 자신의 앞길로 놓게 된다. “주지는 다분히 지성적이지만 서정은 감상적입니다. 그러므로 내용과 표현이 일치하지 않는 셈입니다. 그러나 사고(지성)에 의해서 지탱된 서정이어야 한다는 것이 조건부입니다. 내용으로써의 대상이 과학이 아니더라도 표현형태는 과학적일 수 있습니다. 표현형태가 과학적이고 형이하학적이더라도 내용은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내용과 표현형태가 일치하지 않는 데서 아름다운 시의 세계를 전개해보려는 것입니다. 되도록 틀리는 두 개의 것 속에서 하나의 아날로지를 발견하여 독자의 흥분과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써 경이감을 자아내는 흥미를 노리는 것입니다.”낮선 언어와 언어가 부딪쳐서 만들어내는 언어간의 긴장이나 역동적 관계를 통해 충격이나 경이의 관계를 조성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언어의 새로운 창조성과 그를 통한 시 미학의 즐거움을 제시해주고자 했던 것이다. “모더니즘은 어느 의미에서 오히려 동양에서 그 출발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즘은 唐詩에서 본받은 것이며, 쉬르는 동양의 禪的인 발상에서 이뤄진 것이 아닌가도 싶어요. 다만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만 왔을 뿐, 우리의 것으로 만들지를 못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모더니즘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본래의 우리 것을 되돌려받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청량한 이미지에 침투해오는 현실의 무거운 그림자 주지적 방법론의 확대와 사물에 대한 근원적 탐구의 심화!그것이 그가 열어보이고자 했던 세계였다.
사막이 없는 나라의 메마름 잡음으로 그득 찬 도시에서는 햇빛을 받아들일 겨를도 없다 모래불을 일굴 겨를도 없다 줄기찬 隊商을 거느리지도 못한다 하이웨이를 달리는 올페의 잔등은 서늘하다 모두가 즉흥적이다 파장난 곡마단이다 회오리치는
사막이 없는 나라에서는 막연한 갈증에 사로잡힌다 일요일 때문에 목이 갈한 종소리 신앙을 휴대하고 다니던 종교가 익사 직전에 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영혼만이 이를 구할 수 있다 육체를 떼어버린 사람을 찾아야 한다 한밤중 정신병원에서는 미처 격리되지 않은 웃음이 터지고 있다 태엽이 끊긴 벽시계가 공간을 알리고 있다 화가 李仲燮은 사막으로 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아랫도리를 게의 예리한 발톱에 찝힌 것이다 물린 순수의 피나는 異蹟을 담배 은종이에 나타내었다11)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 독경 소리 오늘은 철늦은 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 열두 암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한 노승 눈매에 미소가 돌아12)
단순한 사물(대상)에 대한 천착으로부터 인간의 무게가 담긴 쪽으로 시세계를 확산시켜갔던 것이다. 그만큼 삶을, 현실을 깊숙이 응시해야 했다. 현실은 더 이상 맑고 밝은 심상을 잉태해내는 자궁으로만 머무르기를 거부했다. 시 속으로 침투하며 짙은 갈등의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小寒에서 大寒으로 치닫는 사이 新正과 舊正 사이 지난 해 크리스마스와 오는 부활절 사이, 집과 집 사이, 짐승과 사람 사이, 이승과 저승 사이를 한 乞人이 서성이고 있었다. 노크를 잊은 天使처럼 남루의 관을 쓰고서, 그가 자는 곳은 아무도 모른다. 그가 먹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밤바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가난한 창가에 기대 서서 눈 비비며 잠시 聖經 한 구절을 소리나지 않게 읽고 가는 일 뿐이다.”13)현실과 心像 사이의 가파른 갈등과 팽팽한 긴장 자신의 시세계속을 더듬어보던 회상에서 문득 풀려나 다시 窓을 의식했을 때는, 이제까지의 가볍고 발랄하던 구름 속으로 어두운 먹구름들이 밀려와 탁하게 섞여들고 있었다. 구름 속에는 행정고시의 문턱을 넘어, 방송국을 넘나들던 자신의 모습이 희끗희끗 보이기도 했다. 흰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 은행 한켠에 앉아 하루하루를 결재하듯 도장을 찍어대던 손들도 보였다. 생의 한가운데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40대 시절, 그에게 70년대는 난무하는 구름들만큼이나 亂世였다. “나의 시는 나의 生活史와 매우 깊은 연관을 맺고 있지요. 곧 생활의 고통을 시로 승화시킨다고 말할 수 있어요. 나는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공무원, 은행원, 편집인, 교수 등 다양한 직업을 가져보았어요. 삶의 한 방편으로 택했던, 또는 택함을 당했던 직업들이지요. 그러니 어느 의미에서의 평탄한 삶은 아닐 것입니다. 사고무친으로 월남하여 생활을 하자니, 이러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생활이 어려워 죽을 자리까지 봐두기도 하였으니 말입니다. 나의 <葛藤>은 우리 부부의 어려웠던 생활의 단면이 투영된 작품입니다.”
빚 탄로가 난 아내를 데불고 고속버스 온천으로 간다 십팔 년만에 새삼 돌아보는 아내 수척한 강산이여
그동안 내 자식들을 등꽃처럼 매달아 놓고 배배 꼬인 줄기 까칠한 아내여
헤어지자고 나선 마음 위에 덩굴처럼 얽혀드는 아내의 손발 싸늘한 인연이여
허탕을 치면 바라보라고 하늘이 저기 걸려 있다
그대 이 세상에 왜 왔지 ―-빚 갚으러14)
고통의 미학! “정말 종교가 필요한 사람은 고통받는 자이지요. 행복한 사람과는 관계 없어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에게 종교가 필요하듯이 예술도 고통 있는 자가 하는 것이지요.” 울적을 분산시켜 놓은 것은 한마디 ‘땅꾼이 독사를 놓쳐 버렸다’는 소문이었다 부르르 車體가 떨고 있었다.15)
부르르 통체로 떨고 있는 그의 생! 이런 현실적 존재의 극적인 양상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서 현실의 어려움과 괴로움을 그는 예술의 원천으로 삼았다. 삶이 고통스러우면 그럴수록 시는 그만큼 깊어 갔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그가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전부였다. 엄연한 현실 속에서, 이미지를 통한 사물의 새로운 시적 리얼리티를 표출해 내려는 견고한 의지를 시속에 관철시켜 나갔던 것이다.
예술지상주의에 다름 아니었다. 눈사태가 난 大안데스領에 무더기로 추락해서 살아 남은 사람 그 속에서 단 한 사람의 눈시울에 처음으로 비쳐 든 푸름이듯 석달 열흘 눈보라를 헤치고 나온 옹긋싹이다
海拔을 알 수 없는 생활의 峽谷에 갖혀서 지금의 나는 너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16)
“분명 나는 아름다움이나 진실을 말하기 위해 시를 쓴다. 하지만 기존의 미적 개념을 답습하거나 箴言을 일삼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충격적이거나 驚異感을 자아내는 것에서 나는 美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美意識에는 ‘곱다’든가 ‘예쁘다’는 개념보다 ‘다이내믹하다’든가 ‘놀랍다’는 개념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내 딴에는 自然의 美보다 事實의 美에 눈을 돌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실의 미 추구! 그로 인한 현실과 심상 사이의 가파른 갈등과 팽팽한 긴장! 창, 그 모순의 지대에서 방황하는 경계인 자신의 시적 여정을 여기까지 짚어왔을 때, 창에 갇혀 있는 구름들은 그 무렵의 갈등을 반영하듯 스스로를 찢어발기거나 제 자리에서 머무른 채 각혈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들을 끝내 풀어주지 않는 창! 그것은 현실과 심상 사이의, 주지와 서정 사이의 끝내 화해될 수 없는 불협화음 같은 것이기도 했고, 남북한 휴전선과도 같은 존재였으며, 이승과 저승 사이의 불투명한 막 같은 것이기도 했다. 창은 한마디로 먼 유년시절부터 자신의 혈관 속을 흐르고 있는 모순이었던 것이다. 자신은 창에서 이쪽으로 혹은 저쪽으로 가보기도 하고, 또 저쪽에서 이쪽을, 혹은 이쪽에서 저쪽을 동경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다시 창이 되어 그 경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그런데도 분명히 존재하는 기이한 모순 같은 것이었다. “예금을 모두 꺼내고 나서 사람들은 말한다. 빈 통장이라고 무심코 저버린다. 그래도 남아 있는 0이라는 數値, 긍정하는 듯 부정하는 듯, 그 어느 것도 아닌 남아 있는 비어 있는 세계, 살아 있는 것도 아니요 죽어 있는 것도 아닌 그것들마저 홀가분히 벗어버린 이 조용한 虛脫, 그래도 0을 꺼내려고 은행창구를 찾아들지만 推辱할 곳 없는 現世, 끝내 무결할 수 없는 이 통장, 분명 모두 꺼냈는데도 아직 남아 있는 數値가 있다.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세계가 있다.”17) 창을 가로질러 희디흰 빛살이 엇갈리듯 날아가는 것을 본 것은 이런 생각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창은 이윽고 자신의 내부를, 그 모순의 세계를 열어보이는 것인가? 비늘 투성이의 희디흰 빛살들이 창에 가득히 퍼득이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해토무렵>이란 시를 떠올렸다.
病床에서 갓 일어난 햇살이 바람과 장난치고 있다 解土는 雜記帳처럼 부산하다 얼었다 녹는 질퍽한 생각에 자꾸만 엉기어붙는 春泥18)
팽팽하게 대립하고 갈등해오던 현실과 심상과 시인인 자신이 화해의 장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던 무렵의 시였다. 문득 더이상 염색할 필요가 없어진 희디흰 머리가 창유리에 희미하게 비쳐왔다. 갈등의 시적 여정 속에서, 생을 앞질러 먼저 쇠해버린 것만 같던 머리가 어느덧 생의 연륜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셈이었다.
현실과 심상이 화해하는 고원의 지대에서 열리는 신세계-사랑갈등의 세계에서 풀려나면서 그에게 열려온 세계는 사랑이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먼지가 일었다. 누군가 뒤따르며 자꾸 말을 건네온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유카리나무 잎새 하나 힘없이 떨어지고 해질 녘 예루살렘을 등진 나귀의 눈망울이 젖어 있다.19)
먼 곳 새소리 湖面 그득한 햇살 고달프고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듯 바람이 아아 예서 그는 사랑을 배웠구나20)
단단하게 여문 시적 방법론으로 오랜동안 감싸고 있던 시의 속살을 내비칠 만큼 그는 넉넉해진 것인가. 그의 시세계는 이로써 더 넓은 세계로 확대되면서 더욱 깊어져 갔다.
“갈릴리 호숫가 다문다문 피어 있는 黃菊 코르넬리아 꽃잎이 가볍게 흔들린다 먼 곳 새소리 湖面 그득한 햇살 고달프고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듯 바람이 아아 예서 그는 사랑을 배웠구나21)
“요즘 광림의 시에는 觀照가 보여” 오랜동안 서로를 지켜봐왔던 시인 구상의 말이었다. 그렇듯 무르익은 그의 투명한 詩魂은 이제 어디를 그윽히 응시하고 있는가.
모순의 지대에 머물 수 밖에 없는 총체적 아이러니의 화신“칭얼대는 손자를 아랑곳없이 조간 사회면에 눈길이 쏠렸다가 돌연 반도에 통증이 일었다 이중섭의 게발이 찝은 듯
일찍이 어머니의 젖꼭지를 깨물던 조상대대의 관습 그대로 돋아나는 이빨이 근지러워 손자는 나의 凸부를 문 것이다.
순간 나는 자지러질 수도 뉘에게 호소할 수도 더더욱 며느리 앞에선 아프다 할 수 없는 아픔을 잔뜩 움켜잡아야만 했다
새삼 어린 것을 두고 ‘강아지 같은 것’이라 한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났다 (귀여움에 겨우면 물릴 수도 있다는)
어수룩 멍청하다간 떼일 수도 있다는 이 어처구니 없는 수난을 지금 반도가 치뤄야 하다니 남모르게 나는 목매일 수밖에”22)
한마디로 총체적으로 아이러니하다. 시를 역설과 아이러니의 언어 예술로, 그러한 언어의 결정으로써의 ‘심상’으로 만드는 데 있어서 독특한 영역을 개척해 왔던 그의 판토마임!일찍이 ‘현실참여냐, 美냐’의 갈림길에서 美를 택하였고, 美를 발견하려 존재들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던 한 모더니스트가 결국 발견한 자화상이 분단 한국이라니. 세상을 진지하게 응시할 수밖에 없었던 한 투명한 詩魂이 도달한, 커다란 아픔의 울림이자, 한국현대사의 희극적인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끝내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경계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窓으로서의 그의 존재! 그런 그에게, 서정이되, 서정에만 몰입할 수 없는 주지적 서정이라는 모순의 지대, 버리고 싶어도 끝내 버릴 수 없는 0과 같은 기인한 모순의 지대는 가장 절실한 현실이요, 어떻든 견뎌내야 했던 사색과 방황의 무대였던 것이리라.
“따분해서 그렸고 배고파서 그렸고 그리워서 그렸다. 한지에도 그렸고 시험지에도 그렸고 널판지에도 그렸다. 은박지엔 철촉 자국 책뚜껑엔 G펜 자국 장판지엔 연필 자국 자국자국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렸다
부리에 꽃물이 들도록 연방 지상에 꽃잎을 쪼아 떨어뜨리다가
홀연 날아가버린 이상한 새.”23)
김선생 근황은? 임진강이 멀지 않은 경기도 적성땅에 새 집을 지었다. 지난 해의 일이다. “이곳에서 살면서 지금까지의 시를 보다 심화시키는 작업을 하려고 해요. 보다 깊은 관조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합니다.”그러나 그의 은거는 허락되지 않는다. 우선 그가 결성의 始原이 되었던 ‘아시아시인회의’가 그를 자꾸 불러내는 것이다. “20세기 말이라는 시대적 현실 속에서 소외되는 시의 문제, 나아가 왜소화되는 인간의 문제를 시라는 문학을 통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공동으로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외약적으로도 아시아 각국을 참가시켜 중국, 인도, 싱가폴, 태국 등 그 범위를 넓혀나갈 예정입니다.”1) 詩<窓> 전문 絞首의 순간에 짚어보는 공허를 틀에 끼워놓은 것이 창이다 그래서 창은 피차의 갈증을 넘보는 버릇이 있다 유리를 닦으면 노골적으로 묻어나는 생각 정직하게 먼지가 쌓여 세월이 눈에 보인다 좀처럼 창을 벗어나지 못하는 구름이 있다 제자리에 머물러 각혈하거나 끝내는 자신의 존재를 찢어발긴다 이 조용한 봉괴를 무관하게 지켜볼 때 비로소 창이 내부로 열린다 창을 가로질러 한 쌍의 새가 엇갈려 날고 있다 어린 시절의 그물을 맞들었다 - 막 동해에서 생선 같은 아침해를 건져낸다 금시 비늘투성이의 창이 된다. (1996년 6월호)
2) 詩<內省的 17>에서 3) 詩<문풍지>에서 4) 詩<다릿목>에서 5) 詩<傷心의 接木>에서 6) 詩<꽃의 문화사>에서 7) 詩<陽地>에서 8) 詩<無心>에서 9) 詩<音樂>에서 10) 詩<석쇠>에서 11) 詩<沙漠>에서 12) 詩<산9>에서 13) 詩<乞人>에서 14) 詩<葛藤>에서 15) 詩<소문>에서 16) 詩<안데스領의 푸름>에서 17) 詩<0>에서 18) 詩<解土무렵>에서 19) 詩<황혼>에서 20) 詩<사랑4>에서 21) 詩<사랑4)에서 22) 詩<半島의 아픔>에서 23) 詩<李仲燮 생각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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