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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김요섭
늙음에 대한 조용한 투쟁 ─ 싸르트르, 싸르트르的인
김강태
자기의 펜pen은 자기 육체의 한 부분이다―카프카 金耀燮을 ‘그’라고 푼다. 이름 요섭은 애굽의 총리대신을 지낸 요셉에서 따왔다. 기독 집안탓이었다. ‘그녀’는 물론 李寧熙이며, 두 사람 사이에서 난 젊은 유리를 ‘그니’라고 푼다. 이렇게 그·그녀·그니는 분당 효자촌에서 다복하게 산다. 그날은 비가 조금씩 왔다. 수서에서 분당, 비를 약간 맞는다. 깔끔한 비. 오후의 공기가 차고 깨끗하다. 흥미롭다. 사실은 부인 이영희에게 관심이 더했으므로. 불현듯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계획을 한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여자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도 젊은 여자가. 3마리의 토끼다. 어, 그게 아니다. 한 마리 퉁실한 집토끼, <아마조네스>에나 나옴직한 매우 덩치 큰 여전사가 또 있었다. 15년을 주욱 모셨어요. 샐쭉, 웃는 부엌 엄마의 이빨 하나가 거멓다. 하나가 빠졌거나 썩었거나 둘 중의 하나. 김요섭은 토끼다. 옥토끼다. 정말 큰 귀가 쫑긋, 당뇨에 약간 젖은, 맥주와 독한 국산 보드카를 한 모금씩 들이키는 분당 토끼. 예서 그는 어떻게 방아를 찧나. 보드카를 보니 내 몸이 움찔해지고, ‘소주는 서울에서 제일 사나이다운 잘난 사람들의 국어’라고 시작되는 그의 <燒酒論>이 생각난다. 소주를 마시며 진실한 자유주의를 그리는, 소주에 아름다이 취하는 ‘국어의 신’을 만난다.
사막의 모래알이 하늘의 별처럼 빛을 獲得하는 自由主義의 方法論에 대하여廢鑛村 보리밭이 기다리고 있는 한 차례의 눈에 대하여아직 밀린 외상 술값에 대하여 놀부에 대하여 元均에 대하여 불티를 튀기면 國語의 神의 살결이 은빛으로 빛나고 소주 파는 집에서 취하여 나오면 진눈깨비는 멎고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한울 대신에 내려오는 눈송이들
왠지 ‘분당’ 하면 고조선 시대로 일컬어지는 ‘한사군’이 새로 이쪽에 설치된 느낌이다. 수서·분당 등의 이름을 지나 복정·모란역만 해도 덜한데 ‘야탑’이란 명칭에 이르면 더욱 기이해진다. 거기서 한 정거장만 더 가니 서현역. 이른바 ‘신한사군’의 설치? 근방 효자촌엔 토끼만 사나. 여기가 달나란가. 달나라 흙은 냄새가 이런가. “흙, 흙이 운다 나비 잡던 소년의 휘파람이 스민/어느 無名戰士의 피도 이슬과 함께 흘러든/봄이 묻은 제비의 따뜻한 날개도 분지러져 묻힌/깨어진 된장독의 장덩어리도 섞인/흙, 흙을 씹으면 내가 기울어지는 흙”이란 구절이 보이는 <荒土>에 낯설은 모습으로 내가 선다. 지금은 봄, 그런데 이전의 황량한 땅이 질박한 넓이로 있다. 날으는 제비는 없다. 그러고 보니 이곳 분당은 대륙이다. 두 시간을 달려왔다. 시 <눈에 덮인 童話>의 나라, 분당 효자촌. 요섭이 촌장이구려.
머리가 크고 간이 큰 아이들은 어유등 환한 기와집 김치굴로 밥도적으로 소문난 대구젓 도둑가고눈이 큰 나랑은 얼음 강판에 얼어붙은 푸른 별을 깨뜨려내어 오드득빠드득 시린 이빨로 별빛이 묻었던 얼음을 깨면서 몰이꾼들의 모닥불 탐즛한 흰 산맥을 보면은,산꿩이가 산꿩이가 자꾸 울고 참 많은 바람이 먼 대륙에서 왔다 어딘가 산꿩이 소리 없나. 창 밖을 내다본다. 방금 싸인 받은 계몽사 판 《김요섭 詩集》이 참 정갈하고 감촉이 보드랍다. 푸짐한 책 선물, 무겁고 기쁜 마음. 산꿩이 대신 내 마음이 푸드등! 이곳은 누가 뭐래도 동화의 나라다. 대화를 나누다가 막판에 그를 무시하고 그녀와 슬쩍쿵 얘길 나누니 자꾸 성가시게 끼어든다. 그는 사실 좀 늙었다. 가끔 눈이 쏟아질 것만 같은 약간의 아픔, 당뇨끼(氣)가 있으므로 사물이 뿌옇게 보여 답답키만 하다. 나중은 딸 그니와 얘기를 나누었다. 그니는 젊다. 놀라운 건 그니가 아직 시집을 안 갔다는 사실. 이름은 유리, 패션 칼럼니스트다. 그런 명칭도 있던가. 그렇다면 나도 ‘문예 칼럼니스트’라고 할까. 관심이 간다. 약간 으름장을 놓아 그니 명함(☏ 0342-707-9636)과 책을 얻는다. 이름하여 <김유리의 매력적인 옷입기─옷 잘 입는 여자 일도 잘 한다>(조선일보사). 허, 그림도 자신이 그렸다. 아마튜어 수준에서 벗어나 프로 쪽이다. 부끄러워 싸인도 안 해주기에 투정부려 겨우 받아낸다. (친절한 유리, 이제사 은밀히 들려주는 얘기지만, 명함은 바꿔야 해. 덜 감각적/매력적이므로. 혹시 재생지 썼니, 고맙게도.)영희라는 이름은 나도 많이 안다. 바둑아, 바둑아. 영희야, 이리 오너라.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 단골 손님이었고, 줁70년대 <토요문학동인>인 동화 작가, 또 오래 전 특별학급생 제자…, 그리고 한자는 다르지만 내 딸애 믿음이의 첫번째 이름이 하마터면 영희일 뻔 했다. 1912년생 김윤식 씨가 손녀딸이라 섭운한 듯, 내심 표정을 감추고 지어온, 고심 끝에 얻은 이름 영희. 그때 나는 경악했다. 아버지, 제발 좀…. 여인 이영희는 실상 상층부가 허연 토끼와 함께 산다. 남들에게 <신토끼당>에 새토끼로 영입된 듯 보여 그녀는 가끔 손해 본다. 그런데 4살 차이라니. 당신이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녀는 조선일보에 ‘노래하는 역사’라는 부제로 《萬葉集》을 새로 소개한 그 李寧熙다. 한국 민족의 우수성을 일본 고대 문헌을 통해 증명한 것으로 지금도 여러 입에 회자膾炙하는 《노래하는 역사》 바로 그 책. 그녀는 시인 천상병과 더불어 등단도 하고 같은 《竹筍》 동인, 줁48년에 시로 추천받았다. 줁5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공식기관을 통해 최초의 여류 동화 작가가 공식적으로 탄생된다. 국회의원도 했고 상복도 많았다. 이름이 남자 같은 여자, 그래서 가끔 오해받는 여자 이영희. 그녀는 ‘썬 파워’다. 요즘도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작품을 쓰는 여자. 남편과는 정 반대다. 그녀 집은 그래서 불빛이 잠잘 날이 없다. 아주 최근에 4권짜리 소설 《달아 높이곰 돋아사》가 두산동아에서 출간됐다. 그녀는 멀리 봐서 젊게 보였다. 머리 허연 김요섭의 부인이라고 하기엔 그녀가 너무 젊다. 그런데 가까이서 봐도 젊었다. 한 50줄? 젊음의 무슨 비결이 있나. 강짜 부리지는 않을까, 등의 별의별 생각이 들어 슬쩍 물으니 김요섭은 그저 허허, 웃는다. 둥기둥, 현악의 실타래들이 흘리는 금슬이 꽤나 좋아뵌다. 내 앞에서 어린애처럼 말다툼하는 듯, 그 모습이 흥미롭더라니. 떼를 쓰는 김요섭. 조금 우기다가 지는 척, 이기는 이영희. 둘이는 천상 부부다. 서재를 보여달라고 해서 들어가니 노산 이은상 옹의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서체의 중심이 강하나 부드럽다. 시제는 <붓銘>. 미당 서정주 님은 그의 회갑 때 글씨를 주셨다. <벼갯모 싯구>의 부제가 ‘두 연인에게’였다. 호오, 연인이라니. 말곳말곳하던 의식이 이냥 삽상해지는 게 마냥 좋다. 저기, 서가에 신석정 님의 서한이 있구나. 제목이 <신량新凉>, 서늘함이 새롭게 느껴짐? 초가을에 쓴 편지다. 한석봉 서체로 비치는 맑은 선비 글씨. 가을 서체라고 명명할까. 시 <햅쌀>이 주는 분위기 같은.
이슬을 위하여 서리를 위하여 들꽃을 위하여 가을바람은 불어서 가을에 부는 남녘바람은 불어서 햇빛을 깨뜨리고 나와 있는 햅쌀 마을은 금빛의 도리깨질을 했다
한마디로 ‘신량’한 이미지의 옷 벗은 낟알들이, 이슬처럼 투명유리로 내려와 부딪는다. 톡, 톡, 토독 톡. 이런, 빛 뿌림. 많이들 알지만, 요섭은 약 30년 가까이 닦은 서예를 즐긴다. 한때 추사 김정희의 무뚝뚝한 글씨도 스스로 탐문探問, 익혀보았다. 거실과 서재에 그의 글씨가 문득문득 보이는 듯. 한쪽에 100 권에 가까운 저술이 끈으로 수십 권씩 묶여 있다. 색깔이 누릿누릿. 아뜩한 글씨들이 눈 앞에서 움직이더니 내게 문득 악수를 청한다. 돌아간 노산이, 석정이, 내 등을 툭 치며 ‘이보게’ 한다…, 쩌릉쩌릉. 오후 늦게 도착, 약 4시간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촐촐해져서 간식 자리에 끼어앉는다. 선명히 그/그녀/그니를 마주볼 수 있었다. 저녁 특식은 딸 유리가 만든 떡볶이. 쫄깃쫄깃, 맛있었다. 제법 통통한 떡볶이를, 휴, 부엌어미가 우려낸 맛깔난 곰탕 국물과 함께 열댓개 쯤 먹었다. 야무진 유리, 그니의 몽니는 옹다문 입술 끝과 콧날에 있다…. 콧날이 길고 입술이 돋보이는 그니. 그리고 어머니 영희와 번갈아 비교해본다. 닮지 않은 듯, 하지만 닮았다. 푸성귀 내음의 지성미와 함께 고집이 또한긋 괜찮았다. 둘의 뿔테 안경이 모두 다 크고 시원하다. 외딸로 갓 설흔 넘은 듯. 외국 유학도 다녀온 유리의 신상 명세를 지면에 자상히 밝히니 기혼자만 빼고 뭇남성은 청혼, 신탁해도 좋을 것. 딸의 장래를 걱정하는 아버지 요섭의 반 진담조 ‘몰래 부탁’이다. 이렇게 그/그녀/그니가 새 집에, 부럽게들 화사히 산다.
김요섭은 싸르트르(1905∼1980)다. 본인도 부담스러워하고 누구도 입을 삣죽하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는 한국의 지성 싸르트르가 되고 싶어 한다. 회의적인, 회의적인. 이영희는 언뜻 보기에 루 살로메(1861∼1937)를 연상시킨다. 20세기 최고로 손꼽는 지성들―니체·릴케·프로이드·바그너 그들이 성질나게도 살로메의 지성과 열정, 뛰어난 미모와 감성의 치맛자락에서 하느적 놀았었지. 싸르트르가 45년 정도 늦게 태어났기에 망정이지 그도 그녀 곁에 있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력은 당대 최대의 지성인들에게 뛰어난 영감inspiration을 심어주었다는 데에 있음이 정설이다. 실제로 루는 훌륭한 철학적 사유를 할 줄 아는 학자요, 문학적 감성이 대단한 작가이기도 했다. 청혼했다가 거절 당한 니체가 실토했지, ‘루’와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역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는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릴케 또한 무엇엔가 홀렸는지 정신없이 고백한다, 두 번에 걸친 그녀와의 러시아 여행이 너무 인상깊었다고. 프로이드는 그녀가 평생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준 여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루 살로메가 쏜 화살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큐피드의 화살은 아니었을텐데. 사진으로 보는 루의 눈빛이 그윽하고 깊다. 21세의 사진 속, 검은 야회복을 몸매에 맞게 입은 그녀는 이미 몸과 정신이 무르익은 듯 고혹적이다. 로마에서 만난 철학자 파울 레는 그녀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해 자살하기도 한다. 루의 눈·코·입술이 모두 도드라졌다. 아름답다, 또 ‘육감적이다’라고 쓰려다가 만다. 내 몸의 일부도 굼틀댄다. 무엇보다도 나는 화가 치민다. 달리 보면 그녀는 바람둥이다. 남자가! 남자가, 꼬였으므로 그랬겠지만. 허기사 금세기 최대의 지성인들에게 꼬심 당하는 것도 영예스럽지 않은가. 관우의 날랜 적토마 앞에서 많은 승부사들이 갈대처럼 수없이 꺾였다. 어째서 하느님은 공평치 못할까. 그들 모두를 동시대에 살게 했다니.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 ‘우째서 이런 일이!’ 이영희가 썩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지기知氣와 재기才氣가 넘쳐뵈는 그녀는 젊었을 때 뭇남자들 가슴을 많이 설레게 했을 것 같다. 안경 너머의 이영희는 당차고 거침없고 욕심 많은 반면 신중하고 또한 사려깊게 보인다. 젊은 시절 둘 다 열화같이 그랬겠다. 작품 <소>의 “하늘을 이 뿔로 치받아버리고 싶소/하늘이 흘린 푸른 피에/머리를 흠뻑 젖어보고 싶은 노여움이 있소” 이렇게, 화가 이중섭처럼. 김요섭은 다만 싸르트르를 흠모한다. 그 날 대화 중에 주된 내용도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맏형격인 싸르트르 얘기였다. 줁64년 노벨문학상 수상 거부, 철학적 주저로 유명한 《변증법적 이성비판》, 20세기 문학의 핵심인 삼부작 《자유에의 길》은 분명 21세기에도 잊을 수 없는 화젯거리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참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가 싸르트르의 화두로, 젊은 시절 읽은 일기 형식의 정음사 판 《구토嘔吐》는 내게도 가히 충격적이었다. 싸르트르는 ‘존재의 우연성’을 제시하며 서사적 화자인 역사연구가 로캉탱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대상들은 우리를 건드리면 안 된다……하지만 그것들은 나를 건드렸으며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이제 나는 깨닫는다. 내가 해변에서 그 자갈을 손에 들고 있을 때 느꼈던 것을 또렷이 기억하게 됐다는 것을. 그 경험은 달콤하고도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얼마나 불유쾌한 기분이었던가! 불유쾌했던 기분은 그 자갈로부터 나의 두 손으로 스며들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나의 두 손으로 일종의 메스꺼움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이 ‘일기 소설’은 문의 손잡이에도 극도의 혐오감을 보이기도 하는데, 그의 사고는 모든 사물이 존재 이유나 가치가 없다는 것이며 이에 절망하던 로캉탱은 마지막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소설 쓰기를 희망하면서 ‘구원’을 의도하는 장면이 끝이다.
나 역시 존재be하고 싶다. 정말로 나는 다른 무엇이 되고 싶은 생각 따위는 해본 적이 없다. 그런 욕망은 내 인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모든 노력들의 배후에서 나는 같은 욕망을 발견한다. 존재를 나에게서 몰아내자. 존재의 비만함을 짜내어 없애버리고 말려버리자. 그럼으로써 내가 정화되고 강해지도록…….
김춘수의 <꽃>이 연상되는 첫 구절―, 하지만 이러한 식의 욕망이란 ‘의식’에 해당되므로 싸르트르는 ‘인간적 자유’ 쪽으로 천천히 그 가치를 부여한다. 의식은 무無이기 때문에 욕망 또한 거품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나의 본질’을 찾는다, 사려깊은 자아를. 이것이 가장 뜻깊은 선택 행위라는 것이다. 다만 로캉탱이 고통스럽게 되뇌는 욕망이란 미래를 지향하는 희망이라는 자유? 자신을 자유로부터 도피시킨다는 것은 그의 경우, 상투적인(일반적인) 불성실이 아닌 그만의 ‘불성의不誠意’를 의미한다. 즉, 이 말의 진정한 이해는, 자유의 도피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진정한 탐구라고 강변한다. 싸르트르식 불성실이란 곧 인간 존재에 대한 적극적인 기술記述description인 것이다. 문제는 그 뒤에 나타나는 공포나 불안 같은 개념이 주는 개인의 심리적 정황이다. 디아네 콜린슨Dian Collinson이 스크랩한 ‘책세상’ 편 <철학의 큰 스승─싸르트르론>은 이처럼 늘 사색을 요구하며 새롭게 읽힌다. 한편 우리의 6·25 전쟁 당시 싸르트르가 공산주의로 기울자, 어떠한 폭력이라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반항적 인간》의 까뮈와 결별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폭력 혁명을 당연시하는 마르크스주의를 까뮈와 메를로 퐁티가 용납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요섭이 우익 진영의 작가라는 점. 그런데 사르트르의 휴머니즘을 좋아한다. ‘문예출판사’ 편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초판본보다 신장판본의 번역 문장이 훨씬 나은데, 전에 나를 흥분시킨 책으로, 싸르트르와 까뮈의 명쾌한 논쟁이 참으로 신난다. 그는 또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통해 회색주의자 지식인 일반을 통박한다. 자신의 권한 밖까지 ‘참여’하여 사회적 모순과 싸우는 자만이 진정한 지식인이며 나약한 민중의 대변자가 돼야 한다는 점도 부각시키는 싸르트르에 김요섭은 반해 있다. 요즘의 그는, 프랑스 젊은 지성들이 예전에 <70歲の自畵像>이란 제목으로 싸르트르를 집중 조명한 일어판 기사에 관심을 표명한다. 번역과 해설자는 海老坂 武. 부제가 멋지단다. ―‘늙음에 대한 조용한 투쟁’. 스크랩한 기사가 노오랗게 변하여 복사본 글자형이 어지럽다. 사진 속 싸르트르의 안경과 눈빛이 범상치 않다. 어느덧 그도 지난 해에 고희를 넘겼다. 고희를 맞은 작년 그 날, 경기 파주군 파평에서 예술원 세미나가 있었고, 김요섭 회원은 <꿈의 언어로서의 동화의 우주>란 제목으로 세미나를 정신없이 준비하고 있었다. 그 날, 발표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갑자기 조병화 선생의 음성이 들린다. 기습적으로 김 회원의 고희 축하 케익을 마련한 것. 그리고 입원한다. 원래 그는 세미나 발표 뒤엔 생생한 의욕으로 외려 몸이 개운해져 건강함을 느끼던 터, 급기야 ‘고희’라는 데 충격을 받은 탓이다. 싸르트르가 그랬다. ‘죽음이란, 죽음을 얘기할 때는 이미 그들은 죽은 것’이라던 그는 평소 죽음을 인정치 않았다. 매우 패기만만한, 서서히 죽음을 인정하는 투였으리. 싸르트르는 말년에 각성제 후유증으로 반 실명 상태가 된다. 묘하게 김 시인도 지금 뿌연 눈밖 세계에 당혹스러워 한다. 당뇨 탓으로 눈이 너무 나빠졌다고. 그러나 아직은 생의 의욕에 가득차 있다. <梅花>(전문)에서 보인 그의 가슴은 죽음을 생각할 겨를없이 이처럼 뜨겁다.
흰 눈이 무겁다 瞬間이 터지는 소리 梅花나무 속에서 터지는 소리
흰 눈이 무겁다 할아버지들이 할머니들이 두 손으로 받은 햇빛처럼
죽음에 취한 대지 안쪽에서 銀빛 불덩어리로 피어난 뿌리
바람이 나뭇가지에 靜止된 채 한 瞬間이 터진다 梅花나무 속의 時間
매화나무 속 우주. 매화나무 속 시간을 다스린다. 눈의 무게를 못 이겨 실존의 몸부림 치는 순간이 몽오리에서 현란히, 아찔하게 터진다. 예리銳利·간명簡明·숨 막히는 침묵沈默이 내내 내 속을 맴돈다. 식물 매화는 시적 화자에게 있어 <시의 신작로>를 가는 유일무이한 길이다. 비로소 깨는가, 깨닫는가, 빛의 통과!강태：좋아하는 작가는. 요섭：러시아의 안톤 체홉이다. 강태：그는 서민적인 단편 작가로 유명한 걸로 알고 있다. 이를 자랑으로 여기기도 했다던데. 좋아하는 이유는. 요섭：그가 지닌 페이소스pathos 빛깔이다. 이에 매혹을 느껴 6·25 때 격전지였던 왜관 과수원을 배경으로 작품을 쓰기도 했다. 강태：페이소스라면, 우리말의 ‘파토스 개념’인가, 아니면. 요섭：…(청각이 나빠 못 알아들은 듯). 강태：그는 우리에게 매우 친근한 작가였다. (체홉의 작가적 배경은 우리 현실과 참 흡사하다. 우리도 훌륭한 단편들이 많았지 않은가. 낮은 계층의 해학적 비겁성, 풍자성 등은 차라리 비극적이다. 그는 10대 때 파산, 전공은 의학이었지만 생업을 위해 기고문 투고, 작품에 미쳐 얻은 결핵도 마다고 사할린 섬의 유형수들을 취재, 나중 그의 작품에 깊은 사회성을 입히기도 한 점 등. 밀도 있는 문장력도 탁월했다. 그가 난민을 위한 사회 활동에 종사한 건 당연하다. 죽기 2년 전 어느 여배우와 결혼한 점이 인상적이다. 요양 중 44세 쯤 몰歿.) 요섭은 또 괴테를 만나고 싶어 한다. 두루 아다시피 실제로 역작 《파우스트》는 그의 20대인 ‘질풍 노도의 시대Strum und Drang’이란 격변기를 지나 80대까지 60여년을 걸친 끝에 죽기 1년 전에 탈고 했다는 점에서 놀랍기만 하다. 게다가 그는 다른 작가와 달리 철저히 자기 경험의 고백과 참회 속에서 대작을 이룬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생생한 체험의 소산. 자신이 친구의 약혼녀를 사모한 일의 부끄러움, 친구가 유부녀를 사랑하면서 자살한 사건 등의 ‘절망적 사랑의 체험’이 작품의 모티프다. 누구나 롯테같은 여성과의 사랑을 한번쯤은 동경했고 세기말을 맞이하여 자살을 충동질한 책으로도 유명하지 않은가. 이 작품은 나중에 프랑스의 로맨티시즘을 불붙였다. 헤아릴 수 없는 고통 끝에 탈고하면서, 괴테가 현실에 대해 진지하고도 메피스토펠레스적인 통찰력과 해학 및 풍자를 지닌 끝에 ‘영원히 여성적인 것’에서 인류의 실질적 <구원>을 깨닫는다. 괴테는 살아 움직이는 치열한 생명성을 지향한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도 ‘파우스트적 충동’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김요섭은 아직도 괴테류類의 <떨림>에 젖고픈 욕망을 갖는다. 그 회로에 자신의 낡아가는 신경섬유를 접맥시키고 싶다, 불꽃 점화를 댕기고 싶다…. 괴테의 경우, 그것은 엄청난 인내였다. 그리곤 말할 수 없는 환희로 이어진다. 과학자 아이작 뉴턴이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내가 여러 가지를 발견했지만, 내가 비로소 발견한 것은 <인내>’라고. 언젠가 나는 평론가 장영우를 비롯한 몇몇 지기知己들에게서 김요섭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소릴 들은 바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 그들 부부는 ‘북한고고학술총서’인 《고구려 고분 벽화집》을 보고 있었다. 슬쩍 넘겨 보니 ‘朝鮮畵報史’ 부분. ‘책값이 엄청 들어요.’ 원고료가 다 책값으로 들어간다는 밉지 않은 엄살이다. 요섭은 요즘 엘리어트의 《황무지》 스타일의 ‘장시에 이야기 섞은 담시’를 고쳐쓰고 싶어한다. 일종의 대하 서사시다. 1부가 <얼굴이 없는 얼굴>. 6·25를 중심으로 엮었다. 2부는 <푸른 흙의 戀歌>. 이 작품은 전에 국립극장에서 무용극으로 올려졌지만, 모든 면에서 부끄러운 공연이었다. 배역이나 춤이 수준 이하였다고 지금도 못마땅해 한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로서 앞으로 재구할 때 고구려 벽화에서 얻은 영감을 접목시키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3부는 장시집으로 나온 <빛의 뿌리>. 너무 우익(?) 냄새가 강하지만 앞으로 다시 구성한다니 기대해 봄직하다. 이 시집 머리말에서 그는 말한다. ‘오늘날 우리의 문학자들은 분단된 민족의 언어 속에서 하나의 신화를 창조할 의무가 있다’고. 그는 민족 분단을 아파하고 진실로 통일을 갈망한다. 이 꿈(갈망)의 실현이 바로 ‘신화 창조’라는 것이다. 시인 김용범은 시집 해설에서 서사 구조의 긴밀성을 언급하며 태초 ‘언어의 탄생’·‘춤의 기원’ 등의 묘사를 통해 시인 내부의 원형성을 논하고 있다. 시인이 추구하는 세계는 ‘신화의 모태 공간’이라는 것. 그를 둘러싸는 정신의 중량을 이기기 위해 그는 사고의 뿌리를 캐간다. 시 <體重>의 “끝끝내 무거운 내 精神의 重量을 달 수 없는/體重器 위에/戰爭과 내가 얹혀져 있다”는 자기 고백에서 그는 끝없는 시의 광맥(빛의 뿌리/흙의 뿌리)을 찾는 것이다. 김요섭 시인은 20대부터 희곡을 쓰고 소설도 발표한다. ‘27년 함북 나남에서 태어난 뒤, 줁41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동화로 입선, 등단한다. 왜인들에 의해 <신춘>들이 사라질 때 그는 매일신보 한글판에 시·소설 등 모든 쟝르에 작품을 투고하는 객기를 부린다. 어떤 것이든 당선되면 그 길로 나가겠다는 심사였다. 문학적 자전自傳 《눈보라의 사상》에는 ‘신춘문예 동화 입선이란, 그것도 14살의 영광. 이것과는 반대로 연달은 중학 입학시험의 낙제, 그것도 세번이나 씹는 패배감. 이 둘이 부딪히는 갈등은 겉으로 별로 나타나지 않았으나 무의식 속에 극단적인 두 성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턱없는 교만과 또 한편으로는 자신감없는 나약한 태도’라는 구절이 보인다. 그는 ‘저돌과 냉소, 묵살로, 때로는 한없는 무력감 속에서 쓰러져 있기도’ 한다. 요섭의 이 점이 나중에 이영희에게 매력으로 작용한 모양. 그들의 만남은 결국 ‘죽순 시인 구락부’ 대표였던 이윤수 시백詩伯에 의해서였다. 그는 이 선생의 젊은 날을 ‘하얀 살결에 깨끗하게 깎은 면도자국이 파랗게 보이’고, ‘말할 때 때로 청순한 소년처럼 수줍어 할 때도 있었’으며 ‘정직하고 곧은 성미’였던 분으로 기억한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 ‘상화 詩碑’도 김소운 선생과 함께 달성공원에 세운 건 유명한 일화다. 그분은 《죽순》의 열매로 이 잡지로 데뷔한 요섭을 크게 꼽았다. 곧이어 줁47년 청진교원대학에서 시와 동화를 중심으로 동인 활동에 참가하다가 월남, 이후 전쟁 나기까지 이영희도 참여한 《죽순》에 작품을 열심히 발표하고 동화를 《소학생》 잡지에 집중적으로 게재한다. 둘의 만남에 대해 요섭은 자서전에 이렇게 적는다. ‘《죽순》에 내 <해바라기>가 실린 1949년 7월호를 보면 추천에 이화여중 5년, 이명자(李明子)의 <弔歌>란 시작 1편이 있다. 이 시작은 당시 이화여고에 교사로 있던 조영암(趙靈岩) 시인이 자기 제자 작품을 추려 보내준 것이다. 바로 이 학생이 그 뒤 내 아내가 된 이영희(李寧熙)’라고. 시는 소년 때부터 써왔으나 김종한·이용악·백석의 시를 좋아했다. 본디 집안에 문학적 배경이 있었다. 손윗매부도 문학애호가, 아버지도 아들을 그냥 놔뒀으나 어머니는 반대한다. 이때 교회 교사가 자신을 주목, 문학과 조선사 이야기를 들려주어 한국어에 눈뜰 수 있었다. 물론 일본어 수업만 받았을 때였다. 감탄스러운 일은 전쟁 이후로 지금까지 일기를 쓰고 있다는 것! 놀랍고 무척 반가웠다. 일기 일부를 유일하게 박두진 시인에게만 다방에서 보여드린다. 나도 일기라면 어느 정도 자신있는데. 중학 시절부터 띄엄띄엄 나부랑이글과 시 쓰기를 시작,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첩과 일기가 벽장에 가득한데, 실컷 모은 중학 시절의 기록을 어떤 충격으로 아낌없이(?) 태운 적이 있었지. 맹목적인 그리움 때문이었지, 아마. 나는 그에게 <일기초日記抄>를 산문집으로 내면 어떻겠는가, 제의한다. 그는 말없이 웃는다. ‘내 일기는 특정인의 이름이 없다. 청년기는 사색의 강행군으로서, 오늘날은 사고의 구축을 위해 일기를 쓴다.’ 그중에는 미당과 동리를 대상으로 쓰기도 했단다. 작가에게 삶의 기록은 너무도 소중한 것. 카프카·도스토예프스키를 이해하는 데도 일기가 매우 큰 영향을 주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줁47년엔 노총신문에 평론 <한국노동운동의진로>를 싣고 전쟁의 혼란기를 겪다가 줁55년에 와서 문예지 《문학예술》의 편집장이 된다. 그 뒤로 펜클럽과 문협 등지에서 작고큰 일들을 하게 되는데 줁79년 제4차 세계시인대회 사무총장을 끝으로 줄곧 작품 활동에 주력하다가 줁93년에 와서 영예의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된다. 소천문학상(줁65)을 필두로 5월문예상(줁68)·대한민국문화예술상(줁78)·시협상(줁81)·펜클럽문학상(줁83)·서울시문화상(줁86)에 이어 줁87년에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 주요 시집만 약 20권이 되는데, 첫시집 《體重》(줁54/문성당)·《빛과의 關係》(줁73/보진재)·《달을 몰고 다니는 진흙의 巨人》(줁77/동서문화사)·《銀빛의 神》(줁80/동화출판사)·《검은 시간이 무덤을 파고》(줁83/청하)·《맥》(줁87/한국문연)·《63억 광년을 산 이슬》(줁94/가꿈)을 출간한 뒤 《김요섭 詩選》을 지난 2월 2일 계몽사에서 찍었다. 이 책 머리말에서 시인은 ‘인류가 자기 고향을 상실하고 있음’을 아파하며 ‘이제 더 이상 시를 쓴다면 호랑이가 담배를 피워 물던 날의 시를 쓰고 싶다. 또 칠순의 고갯마루에서 글자가 쓰여지기 이전의 흰 종이와 같은 시도 구상한다. 이것이 내가 만난 최초의 빛인지 모르겠다’며 깊은 심경을 토로한다. 쉽지 않은 고백록이다. 그의 마음은 아이와 어른이 각각 들어가 있다. 샘물을 할퀴어내는 아이가, 이를 조용조용 흘려보내는 어른이…. 왜 이렇게 내안이 소슬해지는 걸까. 요섭 시인, 그가 늙어가나. 그 외에 《꽃잎을 먹는 기관차》 《이슬꽃》 등의 숱한 동화집과 《現代詩의 宇宙》(줁85/문학예술사)·《현대 동화의 환상적 탐험》(줁86/한국문연)·《눈보라의 사상》(줁91/한국문연) 등의 평론집이 있다. 1982년엔 룩셈부르크 신유럽사에서 불어판 번역시집 《子午線》을 출간해서 주목받는다. <시는 모닥불>이란 제하의 산문(에쎄이/전문)을 함께 읽자.
진실에 대한 갈증으로 몸부림치는 젊은 얼굴들이 있다. 그 얼굴들이 비춰보고 서로 알리려는 진실이나 정의감 같은 것을 詩는 모닥불되어 그 얼굴을 비춰 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시가 모닥불이라면 시는 자기와 자기 둘레의 어둠을 불사를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젊음들이 모닥불에서 횃불의 불씨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의 詩란 모닥불은…….
이렇게 그는 시인의 진실을 요구한다. 진실한 시가 모닥불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시인의 사명을 진실성에 둔다. 진실이라는 거울. 이 말은 <시를 쓰는 보람은 무엇인가>에 대해 ‘시는 無償의 행위이거나 시는 공허의 한 면’이므로 무한한 자유를 누릴 자기만의 작업에서 신성과 고귀성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우리의 시에는 육체가 없다’고 같은 평론집 《현대시의 우주》에서 단언한다. 시의 ‘정신과 함께 육체도(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 <빛과 사랑>의 제목. 어쩐지 그의 시와 글 곳곳에는 ‘빛’이 자주 등장하더라니. 시집 《63억 광년을 산 이슬》의 산문은 다음과 같이 ‘빠른 빛’을 그리고 있다. ‘새에게는 날개가 있다. 인간에게도 날개가 있다. 그 날개의 이름은 이미지이다. (…중략…) 빛보다 빠른 존재가 있다. 바로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이미지의 세계다. 이미지는 빛보다 빠르다. 인간은 빛과 같이 빠른 로켓을 타고 일생동안 달려도 은하계를 빠져나갈 수 없다. 그러나 이미지의 세계는 한 순간에 150억 광년을 달릴 수 있다. 원시 우주가 형성되던 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한다. 그 말씀이 이미지이다.’ 그러니 그가 빛의 원래를 좇다가 ‘광속’과 ‘신화’를 찾을 수밖에. 평론가 이상섭은 <神話>(전문)에 ‘呪文과 원초의 세계’란 꼬리표를 달며 소개한다.
나무에서 물결이 그것은 별과 모래다 밧줄에서 契約이 그것은 별과 모래다 보리에서 울음이 그것은 별과 모래다 群衆에서 수염이 그것은 별과 모래다 都市에서 乳房이 그것은 별과 모래다 乳房에서 흰달이 그것은 별과 모래다 뒤로 굴러간다 자전거를 탄 흰달의 街路 푸른 도깨비불 바퀴에 휘감긴 여름의 어둠 붉은 도깨비불 바퀴에 휘감긴 여름의 母音
이상섭의 놀라움은 우선 이 작품이 비문非文(＝비문법적 구문)임에도 너무도 자연스레 정상으로 비친다는 데 있다. ‘여섯 개의 이미지의 쌍은 필연적이면서도 우연히 연결되’는데 ‘시 자체의 매혹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거듭 찬탄을 금치 못한다. 진정 이미지와 알레고리의 충돌이 새롭다. 이렇게 그는 쉬임없이 파격을 찾는다. 그래서 작금의 문청들에게도 단호한 태도다. 해방 전 지식인들은 회의적이었으나 문제 추구 의식이 없어 결단을 못 내렸으나, 오늘날 젊은이들은 회의적이지 못한 반면, 결단과 행동이 먼저 이뤄진다는 진단. 나아가, 진실성을 바탕으로 우리 젊은 시인들이 우선 ‘회의적 인간’이 되자는 것이다. 불문학자 민희식이 가장 좋아하는 시는 요섭의 산문시 <봄밤의 피>다. 아주 격정적으로 읊는 이 작품의 본질은 무엇인가. 새벽녘, 시인은 우주를 마주 향해 앉았다. ‘벽을 무찌르고 몰려든 바다’에서 ‘벽’은 어둠일 터요, ‘바다’란 몰려오는 빛이 혹시 아닐까. 화자인 그가 온몸으로 쏟아지는 빛을 마주했구나! 새벽, 어느 먼 마을 위에 눈이 내리고 있는가. 아무런 배반도 없는 순종의 마을에 두려운 새벽닭도 지금 울고 있는가. (…중략…) 드러누워 있다는 것은 그대로 내가 언덕이 아니면 짐승! 짐승의 뼈다귀가 되어 있는 것 같애서 놀라 일어나 앉으면 벽을 무찌르고 몰려든 바다. 나는 바닷속에 앉은 사람. 내 손에 잡히는 것은 이 무슨 증거인가. 마른 명태! 어느 먼 마을 위에는 눈이 내리고 있는데 새벽닭은 울고 있는데 명태를 찢고 있다. 바다를 질근질근 씹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의 시는 점차 넓고 큰 우등불, 곧 빛의 뿌리 모습을 띤다. 시인 이형기는 존재치 않는 것을 존재시키는 창조의 원동력의 또 다른 이름이 ‘상상력’이라며, 웅장한 시 <달을 몰고 달리는 진흙의 巨人>을 소개한다.
우리들이 만들고 있는 것은 정적 달 속을 뚫고 흐르는 강물의 정적을 아기 울음소리가 꽃잎을 흔드는 정적을 (…중략…) 우리들이 만들고 있는 것은 1억 광년쯤 달려온 빛의 화살을 다시 지구를 뚫고 죽음 속을 뼈와 살 속을 1억 광년쯤 달려간 빛의 끝
분명 이 작품에는 이형기의 말대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거인이 시의 상상의 공간 속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색다른 이법理法을 보인다. 이만큼 김요섭의 시는 스케일이 크다. 이 작품은 또 시간과 빛을 등장시킨다. 그의 논문 <한국시의 시간>을 보면 시간의 불가역성으로 하여 인간이 반성적 성향을 띠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조프家의 형제들》에서 한 구절을 인용한다. ‘시간이나 기한期限의 비밀은 신의 영지英知, 신의 선견先見, 신의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니까.’ 요섭 시인이 질투할지 모르지만, 여기서 사뭇 땡기는 부인 이영희를 소개해보자. 줁31년생, 9남매 둘째딸로 태어난 그녀는 집안이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일찍 시작한다. 필경사, 왜말로 이른바 ‘가리방’을 직직 긁으며 한글학회 일을 거들었다. (그런 탓인지 지금도 그녀는 글씨가 매우 정자체正字體로 일관한다.) 대학원 학비 탓이다. 그러는 사이에 한국일보가 창간, 신춘문예 처음으로 동화 부분을 개설하자 몇 달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상금에 눈이 어두워(!) 즉시 투고, 당선하면서 최초의 공식적인 여류 동화작가가 된다. KBS R.에서 ‘창작동화’가 새로이 편성·방송되고 수없는 청탁으로 정신없을 정도였다. 곧 한국일보 기자가 되면서 숱한 동화를 쓰게 된다. 곧이어 시에 접목시켜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한 환상의 세계를 그린다. 이른바 ‘환상동화’. 영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특히 영시·영어사 공부에 주력한다. 미국 쪽이 아니라 영국 쪽이다,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문학적 생체험이 초서Jeoffrey Chaucer(1340경∼1400)의 최후 작품 《캔터버리 이야기 The Canterburry Tales》가 아직도 눈에 선하고, 제임스 죠이스·키이츠에게도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의 논조는 힘있고 분명하다. 학창시절 늘 ‘특대생’이던 그녀는 명문 이화여고 출신. 당시는 문학적 분위기가 쟁쟁했다. 木月 선생이 국어를, 훗날의 스님 조영암 선생도 국어를 담당했는데, 특히 목월과 월북 시인 李秉哲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너스레. 이병철은 어느 여류 시인과 애인 관계였지만 내용은 오프-더-레코드, 답답케도 상대 이름을 영 밝히지 않는다! 《월북작가 대표문학》(권17)에서 <이병철 편>을 보니 “삿사치(샅샅이)/어둠을 털고 내려와”란 <새벽>의 한 시구가 눈에 확 익는다. 시 <거리에서>의 “한손이 좀 부끄러웠음인가 내가 내 등 뒤에 숨으려는 나를, 헐벗은 틈에서 새삼 보았니라,/어서 굵다란 첫획을 그을 붓과 잉크를 사가지고 건너 가자”란 대목이 사뭇 의연하고 선동적이다. 1·4후퇴 직후 부산 ‘피란 대학’ 시절 만난 이들로는 시인 박인환, 현 포항공대의 박이문 등이 있었다고. 일본어에도 달통했다. 문학예술 아래 학문이 존재(위치)하는 법임을 유난히 강조한 그녀가 이 시대에 진정한 시인이 부족해서 걱정이라고 하자 김요섭 선생도 즉각 동조한다. 나는 그녀의 표정에서 대시인 초서를 만난다. 담대하고 발랄한 그의 문학적 분위기를 자꾸만 느낀다. 돌아와서 나는 책장 구석에서 묵은 ‘초서’를 꺼낸다. 그의 생존 시기가 14세기 후반이었다니. 생애 네 번에 걸쳐 몰아친 흑사병이 영국 인구의 태반을 말살해버린 무서운 때였다. 이어서 농민들의 반란, 교황과 교회의 부패, 라틴어 성서를 영어로 번역한 위클리프 사건 등을 돌이켜 보면 정말 끔찍해진다. 끝으로 중요한 대사건―초서를 위시하여 영어로 시작詩作을 시작한 시인들의 배출 등. 일종의 《아라비안 나이트》 같은 미완의 설화문학집 《캔터버리 이야기》에 감명받은 알도우스 헉슬리도 <초서론>을 썼을 정도. 이 텍스트의 비평적 연구에 몰두하던 드라이든(1631∼1700)-영국의 고전주의를 확립한 시인-은 다만 ‘여기에 신의 풍요가 있구나!’라는 절규로 중도에 그치기도 한다. 물론 매튜 아놀드가 초서를 ‘높은 도덕적 진지성’을 찾을 수 없는 시인이라고 했지만, 내가 단편적으로 읽은 기억으로도 아놀드의 시선은 정곡을 찌른 것 같지는 않다. 책의 ‘프롤로그’에 나오는 “4월달 달콤한 소나기가/3월의 가물을 속속들이 꿰뚫고/꽃을 피게 하는 습기로/온 세상 나뭇가지의 힘줄을 적시어 주면/서녘바람 또한 잣나무밭/애송이 가지에 감미로운 입김을 불어넣어 준다”는 시구는, 당대를 떠난 훨씬 이후의 수사와 서정이 서려있다는 설說과 엘리어트(1888∼1965)의 ‘교향악’ 《황무지》(1922)를 연상시킨다는 지적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말하자면 초서는 이미 수 세기를 앞질러 간 것이다. 웨스트민스트 사원에서 영원히 기숙하는 초서는 시와 산문에 있어 전통성과 현대적 진취성을 동시에 띤 작가로, 평생 진실한 카톨릭 교도로 전통성에 젖어 있으면서도 현대성을 지향하는 ‘튀는 성향’은 매우 놀랄 만하다. 이영희도 마찬가지고 김요섭 시인도 마음이 무진장 열려 있다. 어찌 보면 청淸나라 말기의 저널리스트이자 개혁주의자 양계초를 닮았다. 요섭이 곁에서 약간의 어눌한 말투로 내게 묻는다. 내가 되레 묻겠는데, 저번 《현대시》 정월호 <커버 스토리>에서, 왜 김남조 선생더러 ‘거미’라는 표현을 썼소? 재미있다고 했다. 10대 시절 초서 그는 어느 백작 부인을 모시는 아이였다. 중세 프랑스 화제작이며 우화(＝寓意)문학인 기욤 드로리스의 《장미 이야기》(前篇)는 평생 애지중지하던 장편 연작 시집으로, 나중에 번역까지 하는 애착을 보인다. 약 15년 동안 쓰인 이 작품은 매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처녀를 상징하는 것으로 시인의 20대 꿈이 그 바탕이라 한다. 열락·환대·거절·수치·질투 등의 묘한 인간의 마음 일부들이 나타나 방해·현혹·수감 등을 그린, 인간의 애욕을 나타낸 작품. 한 마디로 싱싱한 감수성에 입각한 싱싱한 연애시인 것이다. (후편은 그로부터 40년 뒤, 쟝 드 묑이란 시인이 ‘합리주의적 비판정신’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이것은 15·16세기에 ‘여성 논쟁’을 야기시키기도.) 이 작품은 환상수법을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다. 나는 문득 눈치챈다. 작가 이영희는 초서를 통하여 《장미 이야기》를 읽었을 것이다. 동화의 환상적 요소는 바로 그의 또 다른 재현이 아닐까. 이것은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만남이었다. 초서가 30대 초반 두 차례의 이태리 여행에서 프랑스 취미를 갖게 된 까닭은 단테의 《신곡》과 복카치오의 인간희극 《데카메론》 등을 접하면서부터. 이영희가 그를 통하여 많은 것을 얻은 걸 부인할 순 없다. ‘불어가 11세기 영국으로 건너가 영어가 됐어요.’ 1066년 프랑스 기욤 공(노르만디 공작)은 영국을 치면서 한 달도 안돼 색슨 왕 해럴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그가 윌리엄 1세가 되어 재위 20년 만에 영국을 완전 정복하면서 자연히 불어가 바람 불기 시작, 본토의 앵글로 색슨 원주민어와 함께 섞이는 동안 오늘의 영어가 굳어진 것처럼, 일어 역시 우리말이 기원전 3세기 일본으로 건너가 영향을 끼친 게 확실하다는 신념이 《만엽집》을 번역하게 된 동기다. (이 진부하달 수 있는 이야기 전개는 이영희는 물론 김요섭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나도 신문에 1주일마다 연재된 <노래하는 역사>를 애독했었다. 이때 국내외의 반향이 대단해서 여러 학자들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신문 지상을 통해 돌올히 말한다, 그런 이론異論에 대해 공개 토론하자고. 글로 주고받는 지상 논쟁은 쓸모 없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져널리스틱 센스가 기막힌 방우영 사장의 후원에 힘입어 서희건 문화부장과 임보길 편집부장 등과 대담한 뒤에 토론 기획도 했지만, 성사되지 못한 것은 반론을 펼치는 학자들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희：난 이 고서에 있는 껍데기 말고 ‘두 (가지) 뜻double meaning’을 찾고자 한다. 혹시 이 책에서 우리 시의 원형을 찾을 수는 없을까. 일인들은 세계 보존 능력이 세계 제일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이 노래를 중세 일어로 오역誤譯(?)하여 남게 한 일종의 기적의 노래 아닌가. 내가 지금 ‘오역’이라고 언급했는데,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도 있고 견딜 수 없어) 현대 감각으로 새롭게 살려낸 것이다. 강태：그렇다면 저들이 천삼백여년 동안의 자존심에 의표를 찔린 것 같은데. 그리고, 학문 세계에서 딴 견해가 있을 수 있지 않나? 그들의 생각에 결정적으로 문제 있는 부분이라 한다면? 영희：해석상 부분적인 잘못은 있을 수 있다. 앞으로 공동적으로 연구하면 해결된다. 그러나 그들은 고대 일본어를 잘 모른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중1 때까지 살았고 이대를 다닐 때부터 영어와 한학을 쭉 공부해왔다. 그리고 정치 감각도 필요하지. 난 한국일보에서 장치부 기자노릇도 했다. 《만엽집》은 일본식 이두吏讀로 쓰인 4,516수의 우리식 <향가> 같은 노래다. 내가 그 독법讀法을 새로 발견한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의 기록이 없지만 그 책을 보면 가야·고구려·백제·신라 이두가 나온다. 살핀 결과, 백제 사투리가 나오더라니까. 일본 작가명이 거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혹시 아나, 그들 태생이 우리 삼국 중의 하나인지. 상류층 엘리트의 노래에서 우리 숨은 역사가 나오고 한일 고대 교류사가 나오는데, 우리 사학자들도 이제부터라도 1,300년 전의 비사秘史 《만엽집》에 본격적인 관심을 쏟아야 한다. 내 생각은 분명하다, 우리 고대어가 일본에 가서 일본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제대로 해석해서 우리 시의 원형을 찾겠다는데 도와줄 생각은 않고. 말하건대 일본어는 고대 한국어의 또 하나의 방언일 뿐이다. 예를 들어 7, 8세기 일어는 우리 방언과 비슷해서 부분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다. (이쯤 되니 나도 신난다.) 강태：저간의 일본 사정은? 영희：줁89년부터 소위 ‘천황제’ 옹호 기간지인 《문예춘추》에서 《또 하나의 만엽집》이 나오면서 해마다 1권씩 총 7권이 출간되었다. 원래 그들의 자존심이 대단하지 않나. 그런데도 내게 호의를 보였다. (일곱 권을 보인다.) 나에 대한 일본인 후원회가 2천명이고, 현재 나는 <또 하나의 만엽집을 읽는 모임회> 회장이다. 강태：혼자서는 정말 외롭고 힘들지 않을까. 공동 연구 등은 고려하지 않나. 그외의 에피소드는? 영희：현재로는 나의 학설이 기존의 시각에 대해 파격이라 외롭다. ‘후계자설說’도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걸 모조리 토해내면 자연스레 연구자들이 나올 것이다. 다만 고대 일어 연구만으로는 안 된다. 교류사와 역사를 알아야 하고, 특별히 <문학적 상상력>이 없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강태：그 책은 나도 흥미롭게 읽었다. 우선 쉽고 전개하는 방법론에 수긍이 간다. 읽다 보면 그렇지, 그렇구나, 무릎을 치게 된다. 속히 학문적인 검토가 활발히 전제돼야 할 것 같다. 시인들에게 공부를 권할 만하겠는데. 요섭：내가 일어를 안다고 해서 이영희가 아닌 김요섭이 썼다고 한때 말들이 있었지, 허허. 강태：남편 요섭을 어떻게 만났나. 영희：그때 공식 기관 <동화작가협회>의 간사장이 그였다. 마해송·강소천 선생 등이 낀 써클 7인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때 기억으로 그의 시니씨즘이란 매력에 반했던 것 같다. (혹시 지적 환상 같은 건 아니었나. 시 <꼭두각시 환상>은 “판타지는 꿈꾸는 것의 실현/하나님도 판타지 놀이를 즐겼다/그는 자기 이미지대로 흙을 빚어서 영혼을 불어넣고 꼭두각시인 사람을 만드셨다/우리는 헝겊으로 꼭두각시를 짓고 꿈의 씨앗을 지푸라기와 함께 집어넣는다”고 전개된다. 앞에서는 ‘꼭두각시에게도 눈물이 있다’고 의미롭게 표현한다. 역시 환상적 이미지다.) 난 강소천 씨가 주간인 새벗사에서 근무하던 중이었고. 강태：동화란? 영희：시를 모르면 동화를 못 쓴다. 시인은 동화를 쓸 수 있지만 작가는 동화를 쓰지 못한다. 소설의 기호와 동화 언어의 기호가 다르기 때문이지. 나는 동화를 썼기에 소설이 가능하다. (그녀는 《달아 높이곰 돋아사》 출간을 의식한다. 예전에 東里 선생이 손자를 위해 동화를 쓰려고 했으나 잘 안 된다는 얘기를 그녀 자신에게 한 바 있다고. 하지만 요섭에게 늘 심려되는 중요한 사안은 나라와 겨레다. <國語의 主人>(전문)이란 시를 보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 뿐이다. 국어에 ‘꽃이름 제대로 달아보지 못한’ 나로서, 우리로서도 어찌할 바 없다.)
돌은 한국의 향기를 뿜고 아침은 한국의 김을 피우고 하늘은 한국의 침묵을 닮고 얼굴은 한국의 시름에 반짝이고 나무는 한국의 울음을 울고 꽃이름 제대로 달아보지 못한 國語 지금은 열무김치 맛이 들 무렵 네 이빨은 푸르다 가난한 새여 가난한 새여 알파벳처럼 날아라 아무리 한국말로 꽃을 불러도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비극성을 껍질로 털어내는 느낌. 여기서 나는 김요섭의 환상적 동화의 세계를 감지한다. 역시 부부가 서로에게 영향 주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부부 문인의 장단점에 대해 묻자 이영희는 직방 ‘부부는 전공이 달라야 한다’고 역설한다. 도움이 하나도 안 돼요, 서로의 작품에 무관심해요, 그게 옳을 것 같아요, 사고방식까지 같아질 위험이 있으니까…. 이때 요섭이 끼어들며 말한다. 솔직하게 ‘자기는 나보다 돈을 잘 버니까 (큰 소리친다)’라고 투덜거린다. 이에 영희는 아랑곳 않는다. ‘부부 문학인들은 서로 <독립 사단>이 되라고 주문하고 싶어요.’ 그리곤 남편 요섭을 향해 곱게 눈을 흘기는 사이, 부부가 옆에서 티격대는 모습에도 딸 유리는 새침떼며 조용히 밥 먹는다. 나는 말다툼(?)이 재밌어서 내외의 얼굴을 번갈아 보느라 정신없다. 잘 살펴보면 실은 영희가 요섭을 넉넉히 껴안는다. 요섭이 영희에게 늘 판정패할 거 같은데, 그래도 그는 그녀에게 할 말은 다 하면서 겉으론 지지 않는다. 다만 영희가 좀더 센 편인 걸. 나도 그녀를 당할 재간이 없을 것 같다. 그냥 부럽고, 노인네들의 사랑 놀음이 징해서(?) 그냥 떡볶이 하나를 포크로 찍어먹는다. 내가 지금 부인 영희를 통해 남편 요섭을 읽는구나. 송구하다. 내가 지금 누굴 취재하러 왔지…? 그래도 할 수 없네. 여기서 나는 그들 부부가 문학적으로 훌륭한 반려자임을 믿는다. 서로가 은연중에 나누는 정신적 교감은 시와 동화, 소설과 역사 인식 등으로 버무러져 있다. 정제精製냐 혼탁混濁이냐, 이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그 사이에 솔잎내나는 딸 유리가 오도카니 턱을 받치고 있다. 그의 초반기 동화는 사실성이 받침이었다. 타고르 시집 《초승달The Crescent Moo》이 계기로 돌연변이로 환상성에 몰입했으나 지금은 사실적인 세계로 되돌아왔다. 실제로 시 <종이배>는 천진무구한 어린이들의 공상 세계를 얼마나 아름다이 그렸더냐. 괴테의 자서전 《시와 진실》에서 말한 ‘나비와 같은 인간(＝활기차고 재능 있음)과 꽃과 같은 인간(＝사려 깊음)의 참뜻’을 되짚는다. 요섭·영희가 이 두 가지를 다 지닌 걸까. 굳이 정리한다면, 오늘날도 그의 작품은 환상어린 현실에 사회 고발성과 비판성이 동시에 가미되어 나타난다. 요섭의 정갈한 멋이 영희의 우아한 맛과 어우러져 그들 나름의 태깔을 은은히 비쳐주는 듯. 넉넉한 영희가 미려히 흔들리는 요섭 곁에 잔잔한 그리메로 있다. 따숩다. 댁을 나올 때 우산을 잊고 가져오지 못했다. 정분情分을 남긴다. 요즘 나는 고전을 다시 읽고 있다. 깨달았다. (199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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