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태

커버스토리 / 김영태

‘꽃밭 늙은이’ 金榮泰 시인

― 느리고 무겁게 그리고 우울하게

김강태

홍대 근처 무슨 <락·카페>에 갔다가 문 입구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덩치가 나만 하면 들입다 밀면 되겠는데, 옆으로 퍼진 폼이 엄청났다. 출입금지 이유는 나이 때문이란다. ‘미성년자 입장 불가’의 곤욕을 치른 수없는 기억이 아직도 아픈데, 정말 치욕이었다. 이처럼 형편없이 잘리고 잘리다니. 점잖은 지면에서 욕을 할 순 없지만, (‘개놈!’) 거기만 가면 그저 나이가 죄다. 그러다가, 그야말로 재지Jazzy한 ‘재즈 카페’를 들어가서 기분 풀었다. 왠지 모르게 나는 김영태 시인을 만나고 나서 그 재즈 카페를 떠올렸다. 그를 방문하고 나서도 지금도 난 무엇엔가에 홀려 있다. 표현이 이상하지만, 단적으로 말해 그의 모든 것이 재즈다. 나는 재즈를 모르지만, 그를 보면 재즈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는 재지한 사람이다. 한번 그를 만나 보라.

김영태의 《매혹》은 연애시집이다. 나는 그런 비밀을 안다. 실은 비밀도 아니다. 그가 고백했으니까. 정신적 사랑이었다고 애써 부연한다. 정신적 사랑이라고? 그렇다면 육체적 사랑이 나쁘다는 건가. 이런 이분법은 필요치 않다. 사실 육체 없는 정신이 무슨 소용 있을까. 참한 연애를 하면 진정 아름다운 거지. 나는 ‘접촉 정신’에 가까운 편이지만 그건 실상 논외의 내용일 수밖에. 이 시집을 탐독하고 몰래 뽑은 다음 시는, 시인의 부단한 시작 태도와 사물 포착 능력(응집력)·간결미를 여지없이 드러낸 수작秀作이라 할 만하다.

작은 새

軟豆꽁지가 달린 새, 하나의 물음표로 있는, 그 물음표 속 나의 행방은 어디일까 혹은 魅惑은 물음표일까

― <꽃·69> 연작 전문

시인은 시적 화두를 이런 물음표를 던지며 풀어나간다. 사물의 한 포인트와 모멘트에서 화자(시인)의 존재 이유를 발견한다. 그러다가 “눈물로 만든 초가 있다면/촛불을 켤 수 없겠지/종이로 만든 간이역이 있다면/바람으로 만든 꽃다발이 있다면”(<꽃·74> 부분) 하고 ‘꽃’을 노래한다. 그에게는 꽃을 만나는 일이 눈물겨운 일이다. 그냥 눈물이다…. 그의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내 키보다 더한 원고 뭉치들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다. 몇 뭉치의 책들 높이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은, 그의 굽 낮은 여자 구두가, 마치 토슈즈를 연상시키는 여성스런 구두가 가볍게 마찰음을 냈다. 그전과 다르다면 벙거지에서 바뀐 유럽풍의 새카만 중절모와 함께 내겐 그가 인상적이고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어쩌다 먼 발치에서 본 기억은 있지만, 그의 첫 음성은 시집 제목처럼 《느리고 무겁게 그리고 우울하게》1) 들려온다. 간간이 회색빛으로 섞여 깔리는 비음 ―. 한쪽의 뜨거운 기름 난로 하나, 안락 의자에 묻힌 김영태 시인의 뒷모습이 어수선한 머리털 사이로 일어선다. 구겨진 그의 펜글씨인 양 함부로 누워 있는 머리올들. 새해의 어느 토요일 4시가 가까운 오후, 대학로가 빤히 뵈는 혜화동 로터리. 유공 주유소와 파출소 사잇길을 선택, 약간 오르막으로 약 20미터 전방 쯤의 금환빌딩 302호, 전화 763－9215. (17평 이촌동 집은 793－3738.) 성춘복 시인의 사무실 겸 출판사 《마을》 옆의 작은 방이다. 맞은편에는 <연우소극장>이, 이 건물 4층엔 <현대극장>이 보인다. 토요일은 어지럽다. 대학로가 비로소 스멀스멀 다시 살아나는 시각, 이곳은 이제사 부스스 눈을 뜬다. 어둠의 퀭한 눈알들이.

대화 중에 가끔 그의 유럽풍 검은 구두가 가벼운 소릴 내었다. 하하, 여성용 구두. 김영태의 ‘사탕비누(무용수)’를 향한 힘겨운 안무를 생각한다. 춤의 안무, 시의 안무. 그의 발레를 생각한다. 그러다가 성 전환한 발레리나 김영태를 꿈꾼다. 때로는 현대 무용을, 또는 탭 댄스를 추는 듯한 그(그녀).

그와 나는 동성동본이었다. 항렬도 같다. 다만 약간의 비음만 그렇고, 닮은 데는 전혀 없었다. 1936년 서울생, 그가 시인에 서양화를 전공한 화가라는 점과 무용평론가라는 직함이 방문객의 호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우연이지만, 앞의 그 사실만으로도 난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커버 스토리>를 잘 읽고 있다는 그의 말이 고마웠다. 나는 답례로 그의 그림이 실린 연작시집 《매혹》2)에 관해 말머리를 꺼낸다. 자서인 <노트>에서 시인은 ‘꽃 연작은 매혹의 풀어쓰기’라고 고백한다. 또 ‘스트라빈스키가 만든 <불새>보다 더 아름다운 새가 어두운 정원에 살고 있다면’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더 아름다운 새’는 그의 꽃다운 새 연인인가. 꽃은 애인의 다른 이름, 곧 ‘매혹魅惑’이다. 매혹, 매혹…. 미혹迷惑스럽구나. 줁89년 당시 그는 좋아하는 여인이 있었다. (이 시집은 단시풍短詩風의 꽃 연작시로, 무려 111편에 <序詩>·38·60·83·85 별장別章이 있어 도합 116편이다. 거기에 37쪽에 걸친 50여 컷이 잔잔히 수놓여 있다.) 한 여인에게 바쳐진 사랑 노래. 나는 시집 곳곳을 보헤미안처럼 찾아 헤맨다. 시집 116쪽은 묘령의 여인이 입에 꽃을 문 채 살픗 웃는 그림이다. 단정한 여인의 조용한 웃음. 갑자기 하얀 융단의 결이 느껴온다. 미美의 사역자, 그는 평생 아름다움을 좇는 시인인 것 같다. 늙을 때까지 ‘춤을 보고 쓰고 만나고 여행할 것’이라는 단단한 음성이 나의 마음과 한겨울 구석을 휘젓는다.

여행 대목에 이르자 그는 신이 났다. 미국은 싫단다. 체질에도 맞지 않는 데다가 특히 놈들의 동양인에 대한 왜곡된 시선에 구역질이 난다고. 유럽은 그런 눈이 없다며, 자신은 유럽풍이라고 소개한다. 그는 프랑스 빠리에서 3시간 정도 렌트카로 달리면 브르타뉴 지방 쪽 ‘생말로(＝‘해적의 도시’라는 뜻)’를 꼽는다. 그곳은 아직도 해적의 후예들이 산다고.

시인 샤토브리앙이 태어난

성곽 마을

바다는 저만치

에메랄드빛이다

성벽 어디에 지금도

海賊 후예가 숨어 있을 것만 같은//

팔려온 노예와 사랑에 빠지는

왜 그 있지, <해적> 2인무 바로 그 무대

― <브르타뉴 지방 여행－생말로> 전문

‘에메랄드빛’과 ‘해적’의 대극적 존재의 어울림. ‘팔려온 노예와 사랑에 빠지는’ <해적> 2인무…. 환상에 비극성이 서렸다. 특히 몽생미셸이라는 섬(지금은 육지와 연결)에 가서는 성 밖보다 안의 호텔에 묵는 게 좋다며 적극 추천한다. 온종일 성을 감싸는 안개가 황홀할 지경이라고. 해삼 요리도 기막히다고 한다. 또 빠리 남부의 르와르강을 끼고 돌면 양쪽 별장 겸 성들의 자태가 참 멋지다고 말한다. 시인의 멜랑콜리한 음성에서 내가 언젠가 노래한 지중해가 망막에 얼핏 비쳐왔다. 그의 이국적인 취향은 마치 세룰리언 블루, 코발트 블루 빛을 그냥 닮는다. 프랑스는 그가 그리는 분홍빛pink·진홍색crimson의 나라다. 나는 서양애들이 ‘깊다’라는 의미로 색을 표현하는 데에 매력을 갖는데, 그들이 진노랑을 ‘크롬 옐로우 딥’이라고 하던가. 깊음과 진함. 흐음, 나도 꽤나 서양풍이로고. 할!(어디선가 UFO처럼 날아와 내 정신머릴 후려갈기는 주장자!)그러고 보니 그의 눈빛 또한 묘하다. 푸른 색을 띠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런데 푸른색 고양이 눈빛이다. 묘안석猫眼石? 그렇지 않다. 환상을 보는 거지, 지금. 사타구니가 이상해 온다.

오래 전이지만, 나도 연애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환심용 주제 역시 꽃이었다. 데이트하다가 헤어질 때 그녀에게 나는 짙붉은 거먕 장미 두 송이를 선물했다. 그전 날 쓴 짧은 시 한 편도 장미 사이에 넣어서. 그러면서 자기 전에 이 꽃을 반드시 머리맡에 놓으라고 주문했다. 자작시 <응시 1>과 함께. ‘잠을 청하려는데/침상의 꽃이 촉촉한 눈으로/날 쳐다보잖아요/부끄러워/꽃의 고개와 볼을 살몃 돌려놓았지요’(전문). 한밤에 꽃을 통해 그녀가 자는 모습을 밤새도록 훔쳐보겠다니, 참으로 에로틱한 시다. 누군가 응큼해, 라고 말한다. 그래, 나는 응큼해! 지금도 목련의 크림빛과 아울러 거먕빛을 몹시 좋아한다. 깊은 호흡을 하고 그들 색깔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참말로 그윽한 맛이라니. 취할 듯 말 듯, 나의 에로티시즘은 한껏 거먕빛이다. …어둡고 마냥 끈끈하다.

일찌기 김영태·마종기·황동규 3인 시집 《평균율》3)을 읽었던 내 스무살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10대 말과 20대 초반, 나는 이 시집들을 주황색 표지가 닳아질 정도로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지질이 훌륭했다는 기억도 새롭다. 앞으로 재출간할 예정인데 황동규 씨가 아직은 시기상조라 하여 기다리는 중이라고. 그는 유럽을 좋아한다. 그중 프랑스가 요즈음 에이즈 감염 파문으로 떠들썩하다던데. 그러나 그는 미국을 싫어한다. 깽단이 많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목숨이 날아갈지 모른다는 것이 그의 대對 미국관이다. 줁78년 미국에 처음 가 링컨 쎈터에서 시인 마종기와 일주간 발레를 보았는데 ‘자식덜, 되게 차별하는 눈빛’이었다고. 들은 데에 더 보태서 각색한다면, ‘눈빛이 험하고 멸치 같은 눈시깔로 아래 흘끔, 위로 할끔 쳐다보는데, 내 참 더러워서!’에 가깝다. 좀 바보스럽다. 어쨌든 미국에 대한 인상이 더 입맛가셨다. 그러니 섬애들이 쌀 米자, ‘米國’이라고 허지. 어쨌든 그는 중앙일보에 있다가 ‘자기 방을 줄 것’과 ‘오로지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조건’으로 외환은행으로 옮긴다. 연전에 그만두었다. 힘들어서다. 또 다른 이유는 시인이 무슨 은행쟁이람, 그리고 춤 보기에 환장했으니 시간의 제약을 받아 점잖게 좌석에 앉았을 수도 없었고. 요즘은 줁95년부터 예술종합학교 음악원에서 주당 2시간씩 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올해는 동덕여대와 중대 대학원 무용과에서 ‘무용음악론’도 강의할 예정으로, 바쁘다. 그가 어떻게 소화할 건가가 의문시 될 정도.

나는 망설이다가 여러가지 궁금한 사항을 캐묻는다. (질문한 것도 있고 여러 기사·잡지를 통해 만든 내용도 있고 비틀어진 것들도 있다.) 강태：가족은? 영태：허허, 정식으로 완전히 헤어진 게 아니다. (이하 問：강태, 答：영태) 아내와 두 아들이 미국에 있다. 問：정확하게 말하라. 그걸 어떻게 믿는가. 答：믿어라. 32살 때 대학 2년 후배와 결혼, 두 아들을 낳았고 지금 그 사람은 뉴욕에 있다. 미국 생활이 체질로 현재 인형 디자이너다. 미국 전시를 갔다가 눌러앉았고 뒤에 보낸 두 아들이 이젠 모두 장성해서 미대를 나왔다. 목우木雨는 실내 디자이너고, 김동리 ‘리’자 里雨는 아직도 미술을 전공하고 있지. 그들도 어릴 때 건너가서 우리 말이 좀 서툴다. 아마도 귀국할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내 삶이고 그들 역시 그들대로의 삶의 방식을 갖고 있어,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고 있다.

問：앞으로도 같이 안 살 것인가? 答： 지금 너무 편하다. 가끔 식사 외에는. 問：(거 참, 이상하다.) 정말인가? 答：정말이다, 정말이다. 問：가족이 보고 싶지 않나? 答：허허. 어쩌다 가끔 보러 간다. 이 생활이 그냥 편하다. 춤도 보고 연극도 보고, 시도 쓰고. (그래도 난 참 이상하다.) 問：섹스는? (물어보려다가 그만둔다. 다만 눈빛 물음이다. 그는 환갑을 줁96년에 지냈다. ‘아름다움들’을 하도 당당히 훔쳐봐서 눈빛은 늙지 않았지만. 그래도 염려스럽다. 그걸 어떻게 해결하나. 아내와 20년 전에 헤어지고, 더구나…. 더 묻다가는 경칠 것 같다. 사실 나도 프랑스풍으로 묻는 건데.) 答：(당연히 침묵.) 問：너무 서양 냄새가 많이 난다. 사실 나는 당신의 외모에 좀 당혹감을 느낀다. 이게 소위 프랑스풍인가. 참견할 일이 아니지만. 答：허허. (그리고 묵묵부답. 따지고 보면 실은 김영태 식으로 보면 간섭할 일이 못 된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가 외국에 춤을 보러 잘 나다니는 이유도 있을 것이기에.) 問：왜 작가들은 프랑스를 좋아하지? 장정일이도 그렇고.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JJ는 대체 자기 작품에 무슨 변명이 그리도 많으나. 《작가세계》나 《상상》은 올 봄호에 그의 변을 싣는다던데 기대되는구먼. 구속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풀려난 그가 볼멘 소리로 ‘내 작품은 포르노가 아니고 자기 모멸(혐오)을 드러내는 하나의 형식’이라던데, 그게 참 애매하고 웃겨. 대체 ‘자기모멸’의 글이란 또 뭔고. 설사 그렇더라도 이젠 그런 비루한 소재에서 제발 벗어났음 해. 차라리 김다은의 소설 《푸른 노트 속의 여자》4), 어때? (그러고 보니 걔도 불란서파네.) ‘블루’라는 이름이 비음처럼 흐느적 감겨와서 좋아. 한 남자보다는 두 남자가 한 여자를 좋아하는 스토리, 썩 괜찮더군. 영상문화의 충격성과 메마른 감정의 냉혹성의 교차.5) 물론 사이버 스페이스 안의 애인 이름이 ‘블루’지만(컴퓨터 애인?), 그녀의 소설은 우선 낯설고 생생하고 재밌다. 내가 어느새 컴퓨터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었나.

<나>의 몸은 부풀어올라 투명한 거품이 되어 <블루>의 몸에 달라붙었고, 눈처럼 껌뻑인다. <나>는 여체의 감각들을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여체 속에서 거품의 팽창력을 유지하기 위해 매달린다. 세포들은 황금색을 지닌 벌레처럼 빛을 내기도 하고, (…중략…) 그럴 때면 <나>의 몸, 비누 거품으로 변한 <나>의 몸의 일부가 파열될 뻔한 아찔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중략…) <나>는, 어둠 속에서, 컴퓨터 앞에 앉은 영도로 돌아오고 있고, 몸은 와락 땀에 젖어 있고, 바지는 끈적거린다. N과 블루가 작은 방에서 같이 있는 순간, 영도는 게임 속에 들어가 여자를 만나고 나온 것이다.

― 소설 《푸른 노트 속의 여자》에서6)

JJ는 추한 섹스짓을 언제까지 그렇게 반복할 건가. 온몸 구석구석의 솜털들이 다 일어서는 거 있지. 저질 포르노 연극은, 벗지 않아도 될 부분에서 벗어부쳤다가 아슬아슬한 불빛으로 꼭지 같은 거 보일락 말락, 으이그. 음란 소설 써서 돈 벌기 위한 건 아니겠지? 모르지. 그가 몇 년 전에 앞으로 소설을 쓸 것이라면서 이유는 ‘돈 벌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말했으니까. 그걸 특종 비슷이 인터뷰한 기자도 있더군. 그를 부추기는 자들을 보면 죄다 출판사 관계자던데. 죄다 접싯물에 코 박구 기절해라, 앞머리나 몽창 빠져라.

그런데 프랑스엔 뭐가 있지? (나는 답도 없는 독백을 그냥 허공에 내던진다. 참, 이곳은 그가 무진 잘 다니는 커피집 ‘보헤미안’이다.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얼른 성냥 하나를 집는다. 전화 763－7564. 그러고 보니 옆 좌석에서 황금찬 시인도 ‘중간 여자’를 앞에 두고 멋지게 대화하는구나. 이곳은 노년의 문인들이 예전의 ‘까페 떼아뜨르’처럼, ‘크로이첼’처럼 잘 드나드는 곳인가. 명동의 ‘돌체’나 ‘르네상스’는? 실제로 당시에 이곳에서 미당의 아들 서승혜, 시인·소설가 이제하와 함께 신나게 클래식을 들었다. 그는 라벨·드뷔시 등의 피아노곡에서 음의 여백을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당신의 기호는? 부인은 어떤 사람? 答： 오로지 담배와 커피다. 참, 목기木器 수집을 좋아한다. 이촌동 집에 많다. 춤 보기는 전공이고. (붉은 색의 외제 담배. 권하기에 나는 즉시 마단다. 강태는 철저한 금연주의자니까.) 난 술을 전혀 못하지만, 대신 아내가 술을 무진장 잘 한다. 내 친구가 오면 나는 집에 들어오고 아내가 내 친구랑 진탕 마신다.

問：앞으로의 계획은? 答：내가 지금까지 펴낸 책이 40권이다. 이제 더 이상 무얼 원하랴. 보고 생각하고 쓰다가 갈 것이다. 이 생활이 정말 즐겁다. 발레 보는 일로 스케쥴이 꽉 차 있다. 2월 23일은 존 노이 마이어(함부르크 발레단 예술 감독)를 만나 알렉상드르 듀마 작품인 <춘희>를, 26일은 <오딧세이아>를 볼 것이다. 3월 7일은 독일 부퍼탈 현대 무용단(피나 바우쉬 여자 예술감독)의 발레 공연을 봐야 한다. 그리고 6월엔 유럽쪽으로 나가야 하고. 전람회도 해야 하고. (그는 피아노와 토슈즈를 주제로 전람회도 몇 번 열었다.) 問：행복하겠다. 참, 기사로도 나왔지만, 언젠가 영상을 통해 본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지리 킬리안 안무按舞)에 등장하는 멋진 발레리나를 소개할 수 있겠는가? 答：생각해보자. (그냥 빈 웃음). 問：무용을 알게 된 동기는? 答：대학 1, 2학년 때다. 옛 경기고녀(지금은 미대사관) 옆 외국서점을 자주 들렀다. 화집 앨범 수집 중, 우연히 러시아 무용사진첩에서 발견한 스베틀라나 벨리오소바의 우아한 발레 모습을 보고 그냥 넋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이번 《현대시》 2월호에 발표한 작품이 수상쩍다. 나는 시인에게 강요한다, 원고 달라고.)

모든 눈들이

다 울음은 아니다

눈을 치켜 뜨면 눈망울이 바로

울음인 눈도 있다

서 있는 다리 옆으로

한없이 올라가다 제 키 위로 멎는

아랍풍 물방울 천에 비치는

脚線도 있다

육감적인 제 몸을

안을 듯하다 버리는…

― <발레 모음곡> 전문

(이 작품은 <발레 모음곡> 연작 2수 중 후편인데, ‘남소연에게’ 바치는 시다. 여기서 그의 감수성은 한껏 빛난다. ‘육감肉感’. 이 말이 풍기는 육肉의 감感을 머리로 상상하고 피부로 느껴보라. 참 신난다. 그러나 그의 시적 진실·시인적 진실은 ‘모든 눈들이/다 울음은 아니다/눈을 치켜 뜨면 눈망울이 바로/울음인 눈도 있다’는 독특한 감수성에서 아뜩해지고 현란해진다. 시인 이상李箱이 토설했던, 봉두난발한 천재의 ‘눈을 치켜 뜨면 눈망울이 바로/울음인’ 바로 그 눈이리라. 목소릴 흉내내서 나도 한번 ‘굿바이!’ 실상 작품에서 풍겨지는 현장감 내지 생동감은 주로 그의 잠재된 무한한 미의식을 캐내는 모티프다. 특별히 《매혹》은 그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매끄러운 절편이다. 별명은 ‘꽃밭에 있는 늙은이’. 나는 이를 줄여서 ‘꽃밭옹’으로 부른다. 그의 시는 일반적으로 ‘∼다’로 끝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마침표가 싫다는 것이다. 그런 탓인지 그는 무의미적인 듯하면서도 깊은 의미가 깃든 김종삼 시가 좋다. 또 김춘수가 좋고 박용래도 좋다. 김춘수는 선천적인 시인으로, 언어 감각은 진정 귀재라고 소개한다. 김광균의 회화시도 좋아했다. 김수영은 참여쪽이지만 언어의 테크니션으로 개인적으로 가까웠는데 김영태 시인의 와이프와 술을 잘 마셨다고. 수영의 교통사고가 하도 서글퍼서 ‘花園에 가도 마음 달랠 꽃이 없어/나는 徒步로 그대 무덤 곁으로 간다/무덤은 멀다 노을 아래로/노을을 머리에 이고/타박타박 낙타처럼 걸어간다’는 시 <김수영을 추모하는 저녁 미사곡>도 썼다…. 김종길 시인은 그의 전람회 때면 연락도 안 드리는데 꼭 오신다고 한다. 회갑기념 때도. 나는 계속 묻는다.) 問：좋아하는 화가로는? 答：수화 김환기 선생이다. 問：아, <어디서 무엇이 되어…>? 왜? 答：그분은 나의 스승으로, ‘건방지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남과 스케일도 남과 다르다. 그림이 참 한국적이고. (나는 ‘한국적’이 무얼까를 한참 생각해본다.) 시인 박남수 선생은 내게 ‘시인이 되기 전에 짐을 진 나귀가 되라’고 하셨지. 두 분이야말로 나의 영원한 스승이시다. 問：사실은 난 현대무용이 더 좋던데. 자유분방하고 튀고. 예를 들어 남정호 같은 여자. 싱그럽고 귀엽고 톡톡 튀는 그녀가 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서 강의한다고…? 근데, 사람들은 왜 발레만 좋아하나. 발레와 현대·고전과 발레·현대와 발레 등의 짬뽕춤도 괜찮을 텐데. 答：답을 요구하나? (잘 몰라서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나는 남정호의 안무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귀여운 악마, 창조적이고 돌발적이다. 리듬을 잡아먹을 줄 안다. 시간·공간의 하모니를 가슴 속에 집어넣을 줄 아는 여자다.)

빨래를 하러 나온 처녀들은

빨래 담은 북 속에

머리를 들이박고 下體로 꽃피거나

징검다리 圓舞를 만든다

허리띠를 풀고 유방도 조금……

지린내 구린내가 나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의 그 다섯 님프들은

― <우물가의 여인들－南貞鎬 안무> 전문

다섯 요정의 세상. 눈 앞에 그려진다. 기하학상의 도식이 그려지고 원형이 만들어진다. 거기, 언뜻 빛나는 통통한 유방이 조금…. 또 달빛 배경이 깔린다면. 평론가 김인환은 《남몰래…》 해설에서 ‘그의 글과 그림은 매우 자연스러우면서 또 언제나 새롭다. 자연스러움과 새로움 사이에 눈에 띄지 않는 섬세한 감수성이 작용한다. (…중략…) 물신의 지배로부터 감각의 진실을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그의 감수성은 도취와 환상을 경계하는 비평적 능력과 서로 통한다. 그 비평적 감수성이 서울이라는 폐허의 메마름 속에서 편안한 인습을 거부하는 기쁨과 고통을 빚어낸다. 그러나 그 기쁨과 고통은 순간과 우연에 좌우된다’고 했다.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그러나 김 시인의 감수성을 믿지만, 카메라처럼 사물을 포착하는 시각·촉각적 능력이 더욱 명민한 시인으로 규정 짓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그의 시는 도처에 위험성이 깔린다. ‘감수성感受性이냐, 감각성感覺性이냐’의 문제가 대두될 수 있다. 두 단어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감각성은 시인의 직감이 고여들 뿐이지만, 감수성은 시인이 민감하게 수용하는 능력의 신축성과 맥을 같이한다. 대개 감수성은 즉흥이 배제되므로, 시의 맛을 한층 돋구는 안목을 여러모로 요리할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 즉 ‘감각’이 1차원적 평면이라면 ‘감수’는 2차원 이상의 공간 세계가 된다. 허나, 이 문제에 대해 더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무용가에게도 감수성이 대단히 중요할 것이다.

問：우문이지만, 당신은 왜 춤을 좋아하나? 答：엉터리 질문이다. 그러나 대답하겠다. 연극의 대사 듣기는 고통스럽지만, 춤은 안무자의 주제 의도에 관계없이 유동적인 포즈 그대로건 아니건 내 마음대로 쓸 수 있으므로 좋다. 問：9월말 경에 프랑스의 세기적인 이름 마기 마랭 무용단도 내한한다던데, 그때나 같이 볼꺼나 어쩔꺼나. 答：답을 요구하나? (나는 고갤 젓는다.) 問：당신은 연극적이고 춤적的이고 영원히 보헤미안적이다. 이상하게도 시인 같지는 않다. 용서해달라. 答：괜찮다. (대화 중에 나는 불편한 게 있었다. 그의 말 속에서 반드시 스스로를 ‘저’라고 자칭하는 버릇이다. 그게 속상하고 싫었지만 그는 그게 당위요, 보편적이다. 이를 지적하자, 또 ‘저는 원래 그래요. 습관이 됐어요.’라고 떠듬떠듬 말한다. 유럽풍이겠지. 그 또한 신사로서…. 그러나 초등학교생처럼 또박또박 말대답을 하니 내 마음이 흔연히 놓이면서도 상대적으로 불안하다. 재미있는 것은 시선집 《가을, 계면조 무게》 서문(부분)에는 ‘내 시에 나오는 여러 가지 문화적 사건들, 풍경들은 내가 살다간 그 시대의 흙으로 남길 바랍니다. 눈치 안 보고 나는 내 길이 주어진 길이기에 걸어왔습니다’고 당당히 자술하고 있다. …거리감이 저만큼 거리감으로 있다.) 問：요즘 근황은? 答：오로지 여행·책·무용 감상 등의 꿈을 꾸고 있다. 적금 들어 여행 다닌다. 불면증으로 잠은 두 시에 자고. (그는 로맨틱한 보헤미안이다.) 問：무용에 대해서는? 答：무용평론가가 5명밖에 없어 걱정이다. (그는 <MBC 문화특급> 프로의 무용쪽 심의위원.) 나는 시인들이 무용평을 썼으면 한다. 시인 쟝 꼭또도 무용평을 쓰지 않았는가. 問：신조는? 答：‘겸손’과 ‘공부하면서 살자’다. 또 남의 작품을 존중하려고 애쓴다. 나는 보통 때 사람을 만나면, 내가 지니지 못한 그이만의 아름다움을 훔치려고 애쓴다. 인접 예술에 대한 애정 만들기도 시도하고. (그는 항상 연소자에게도 매우 깎듯하게 존댓말을 쓴다.) 問：신조가 중학생 수준 같아 재미있다. 참 간단하고 좋다. (그러다가 놀란 듯이) 참, 얼마 전에 직접 공연에 참가하지 않았나? 티비에서 봤는데. 答：부끄럽다. 딱 한번 출연했다. 현대무용가 이정희의 안무에서였다. 탱고춤을 추는 역할인데 해프닝이었지, 뭐.

問：어떻게 생활하나? 答：퇴직금을 은행에 넣고 다달이 이자를 타쓴다. 원고료 수입도 있고, 전람회 뒤의 그림값도 있다. 그림값을 비교적 싸게 책정하다 보니 잘 나간다. 팬들도 많다. 음악 감상은 절대 뻬놓을 수 없고, 술은 한 모금도 못 마시지만 담배는 지독히 피운다. 목숨 연장책으로 비타민 C를 식탁에 두고 꼭 먹는다. 問：요즘 노동악법이다, 안기부법 등을 날치기했다 해서 골치 아픈데, 그외 좋은 소식 하나 없는가. 答：있다. 2년 뒤, 현대무용가 정숙경의 부군이 가평(청평발전소 뒤)에다 ‘무용자료관’을 세울 예정이다. 숙박시설 및 무대도 물론 있다. 계기는 자기 와이프 춤이 좋아서라고. 그녀는 모스코바에서 박사학위 등, 많은 공부를 했다. 기대된다.

온종일 나는 그와 춤춘 기억만 난다. 대화가 아니라 음악이며 마치 팅거벨을 만난 환상적인 기분이 들었다. 실은 나는 김영태식 체질에 안 맞는다. 와, 같은 ‘클 泰’자 돌림자인데. 시는 체질에 맞지만 내가 외려 보수적이다. 혹시 그가 사마천을 닮았나? 궁형宮刑을 당한. 그러나 한편 자신의 삶에 철저한 시인 김영태, 그가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어쩜 그는 모든 면에서 프로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현재 원고를 마무리하면서 지금 나는 나의 속내를 점검중이다. 인터뷰를 마치고도 난 아직 그를 모르고 있다. 물론 당연한 것이겠지. 실상 그의 시는 문단에서 잘 뵈지 않는다. 오로지 춤에만 신경쓰는 것 같다. 그는 만남의 증표로 나에게 큰 책을 선물했다. 무용사진첩 겸 소묘집으로 《Ma Vie－풍경을 춤출 수 있을까》.7) 이 책 속에는 줁69년에서 줁96년까지 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난 칠 벗겨진 사람이지만 주어진 운명을 색칠하다 간 칠쟁이로 남고 싶’다는 인터뷰 내용(401쪽)도 있다. 서글픈 저녁빛이 창문 넘어 들어오는 듯한 느낌. 한편 똑 빼닮은, 그가 그린 자기 캐리커쳐도 있다. 그림으로 보면 그는 참 못도 생겼다. 실물을 보면 세련된 멋과 맛이 있다. 휴, 馬夏海가 찍은 욕조 속 쭈그러진 金榮泰라니. 예의 그 복장을 한 채 시름계운 모습으로 빨래처럼 비스듬히 누웠다. 머리 위로 올라간 샤워기 꼭지에서 금방이라도 물줄이 팍, 터질 것 같은, 한쪽 김종삼 모자 같은. 화가·무용평론가 김영태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값은 3만 5천원.

그런데 시가 없다, 문학에 관한 내용이 별로 없다. 시인 김영태가 없다. 실제로 그는 시 쪽으로 《마음의 치료》8)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 시인은 ‘원추형 뉴런’이 특히 발달한 사람일까. 특히 색감이 발달했다.

빛에 반응하는 특수 뉴런neuron(신경계 단위로, 신경세포와 거기에서 나온 돌기를 합친 것이라 함：인용자 註)은 막대형과 원추형의 두 가지가 있다. (…중략…) 원추형 뉴런은 빛에는 덜 민감하지만 대신 색깔에 대한 감지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원추형에는 특히 적색에 민감한 것, 녹색에 민감한 것, 청색에 민감한 것의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뇌는 이 세 가지 색깔의 신호들을 혼합하여 그것이 정말 무슨 색인지를 알아낸다. 만약 적색에 민감한 뉴런과 청색에 민감한 뉴런들로부터 같은 양의 신경흥분을 영수한다면, 뇌는 아마도 우리 눈에 보이는 물체가 보라색이라고 결정 내릴 것이다.

― <마음의 치료>에서9)

김 시인은 줁88년부터 작년까지 만 9년동안 시인의 캐리커쳐를 그려왔다. 《현대시학》에서였다. 이젠 조금 지친다고 했다. 나 아닌 남이 더 잘 그려낼 수 있으므로. 요즘은 《시대문학》에 얼굴을 가끔 그리고 있다. 얼굴이라는 철학을 공부하는 동안 무려 500여명이나 읽었다. 어린 시절을 소개해보자. 그는 金仁基 씨를 조부로, 鐘和 씨를 부친으로 섬긴다. 부친은 일본 미대를 나온 외아들로, 한때 양정고 미술 교사이기도 했다. 조부는 당시 거부 박흥식이 경영하는 <화신백화점> 건너편의 4층짜리 건물주로 <김인기 상회>란 큰 포목점을 운영한다. 줁10년∼줁20년대였다. 줁36년 넉넉한 곳에서 태어난 소년 영태는 청년기까지 음악 펜클럽을 조직하기도 하고 당시 귀하던 SP 레코드판을 다량으로 매입하여 듣는다. 아버지는 섬나라 《문예춘추》를 비롯하여 15종의 잡지를 보셨고, 어린 영태는 그것들을 훔쳐보면서 영화에도 취미를 붙인다. 보통 사람들은 꿈도 못 꾸던, 이른바 부르죠아 가정이었다. 그때 정지용 시집 《백록담》과 《삼천리》·《문예》 등의 종합·문예지를 볼 수 있었다. 당숙에게 한자토를 붙여달라고 떼를 쓰며, 혼나가며 본 것이라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한다. 작가 강신재·파인 김동환 시인을 책을 통해서 안 것도 이때였다. 청년 시절이 되면서 벌써 문단 분위기를 눈치챈 것이다. 중1 때 6·25. 중2에 폐질환으로 1년 휴학, 그래서 동기보다는 2년 늦게 졸업한다. 시인 황동규를 만난 것도 그 시점이었다. 훗날 단대 교수가 되신 김상배 선생이 교지를 담당했는데, 우연히 그가 투고한 시작품을 보고 놀라셨다고. 그의 시어가 이국적 취향인 바, 자연스레 김광균의 《와사등》이란 시집이 맘에 들기도 한다.

줁57년 고교를 졸업한 청년 영태는 ‘불문과냐, 미술과냐’로 고민을 많이 한다. 훗날 숙대 교수가 되신 남평우 선생이 당시 불어를 가르쳤는데 그분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탓이다. 갈등 끝에 홍대 서양화과에 입학한 그는 재학생 때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사상계》(줁59)로 드디어 등단, 《유태인이 사는 마을의 겨울》(줁65/중앙문화사)·《바람이 센 날의 인상》(줁70/현대시학사)·《草介手帖》(줁75/현대문학사)·《客草》(줁78)·시선집 《北호텔》(줁79/민음사)·《여울목 비오리》(줁81/문지)·시선집 《어름사니의 步行》(줁84/지식산업사)·《결혼식과 장례식》(줁86/문지)·《느리고 무겁게 그리고 우울하게》(줁88/민음사)·《매혹》(줁89/청하)·《남몰래 흐르는 눈물》(줁95/문지) 등의 시집을 왕성히 출간한다. 그 사이에 시평집 《변주와 상상력》(줁84)을 고려원에서 간행하기도 했다. 춤판에서 놀다 보니 상복은 별로 없어 줁72년에 <현대문학상>을, 줁82년에 <시협상>을 수상한다. 줁89년 무용평론가회 회장으로 피선되고, 그 해 서울신문사가 제정한 서울문화예술평론상(무용 부문)을 받기도 한다. 전람회도 5번 이상 열었다. …그의 말대로 진정 후회없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평론가 조남현은 시집 《여울목 비오리》(줁81) ‘해설’에서 그의 시가 ‘말수가 줄어들었다’면서 ‘압축과 생략의 묘리妙理를 그 나름대로 잘 터득한 결과’라고 밝힌다. 이때만 해도 그의 시는 그랬다. 예리했다. <걸레>는 그 방면의 대표적인 시다.

자나 깨나 K는 소줏병만 그린다

화살표를 긋는 것도 그의 장기에 든다

출입구가 막히면 화살표는 통로

시든 영혼 같은 紫朱꽃도 그리고

걸레도 그린다

가로 세로 몇 센티

목탄으로 줄을 긋고 숫자를 기입한다

걸레 같은 얼굴로 걸레만 그린다(…중략…)

이 시대는 이를 갈아도 갈다가

산소가 필요하다 걸레

― <걸레> 부분

조남현에 의하면, 이 작품은 김영태의 자조적 ‘자화상’이요 ‘개성’이다. 그의 이런 수법, 환치된 ‘시니시즘cynicism’은 세상에 타협하거나 적응치 못하고 살다간 용래 시인을 그린 작품에 와서 정점에 달한다. 화자와 동일시 현상을 보인 구절로 ‘날 샌 우리/龍來 성님과 나/뜬세상 저물녘에 마주 앉아 아무래도/아무래도 살짝 나간 우리’(<龍來 성님> 부분)가 있다. 정말 ‘아무래도 살짝 나간 우리’라는 구절이 꽃물 같은 은은한 독소(!)를 내뿜는다. ‘걸레!’라는 단어가 마치 기립박수나 반장의 ‘차렷!’ 구호 같지 않는가. 그래, 우리들에겐 산소가 필요해.

다음 작품은 자기를 감추고 침묵하고 피해 망상에 젖은 화자를 ‘도망자’로 비유한 인상적인 시다.

이렇게 도망쳐보기도 하고

저렇게 없어지기도 하다가

제자리에서 제자리로 나는

내빼고 있다

옆구리에서 옆구리로

희미한 쑥색에서 짙은 감색으로

허우적거리는 무당벌레가

맴도는 물가에서 다른 잎사귀로

빵에서 죽으로

거리에서 주운 향기에서 문풍지 사이로

비웃음에서 새끼치는 비웃음

― <도망자> 부분

또, 시집 《남몰래…》에서 김인환 교수가 밝힌 것처럼 김영태는 ‘삶이 아니라 기억을 따라가며, 경험의 내용이 아니라 경험의 흔적을 기록’10)해오고 있는 것 같다. 그의 경험론은 독특한데, 시에서 나는 은근미를 발견한다. ‘응큼미’라고 하면 책責할까. 그는 시 속에서 날른다. 시인이 뿌리는 수리검은 날카롭고 불현듯 허허로운 허공을 깬다. 깊숙이 날아간다. 챙강, 창강, 피아니시모 또는 아팟시오나토로. 시를 순식간에 춤 동작으로 바꾸는 그는 미의 연금술사 같다. 날랜 시, 시에도 이런 게 있구나. 작품 <나비>는 가벼운 시적 대상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여리나 섬세한 솜씨의 극치다. 섬섬 옥수의 손놀림이다.

나비는/풀밭을 지나

징검다리를 건넌다

몇 번씩 뒤돌아보아도

하늘은 무대의 背景같이 개어 있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

망설임이 잠시 비친다

내 손바닥 안에서/파닥거린다

나비는/떨고 있다

떨림이 번지다 멎는다

― <나비> 부분

그는 《춤》《객석》《무용예술》지 등에 매달 130여매의 글을 쉬임없이 써오고 있다. 공연평 등을 계속 썼으나 이젠 좋은 안무가를 집중적으로 연구, 소개하는 중이다. <이정희論> <배정혜論>을 썼고 곧 <남정호論>을 《무용저널》에 발표할 것이라고.

젊은 시단에 대해 묻자 ‘정서 부재不在’라는 말 한 마디. ‘시란 감춤의 미학으로, 보다 새로운 언어를 확대하려는 몸짓이 필요하다’며 열띤 변을 토로한다. 答：억압 상황에서 펼친 유하의 《무림일기》는 좋지만 《압구정동…》은 별로였다. 실험적인 것도 너무 좋아하면 탈이 나는 법이다. 나는 의외로 사회성이 있는 시를 좋아한다. 그건 당신도 몰랐을 거다. <물수제비> 같은 시가 대표적이다. 問：어? 당신이 갑자기 近園金瑢俊 선생11) 같구나. 수필 쓰던 화가·교수·미술평론가 말이다. 파이프 담배를 즐기던 그의 수필에 반했는데. 줁48년에 수필집이 처음 나온 뒤 절판됐다더니, 얼마 전에 그 회사(을유문화사)가 다시 복간했더군. 그는 진정한 민족주의자야, 어쩌다 북으로 갔지만.

(근원은 매화와 난초의 고집스런 향기가 있고, 가을 소식을 제일 먼저 전해주는 ‘구와꽃(＝왜국화·당국화)’에서 진정한 ‘평이平易의 철학’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나는 근원 선생이 ‘훨훨 자유스럽게 넓은 화단에 피지도 못하고 제법 값 높은 화분에나 좋은 흙에 담기지도 못했건만, 깡통 속에서, 자배기쪽 속에서 오히려 아무런 불평도 없이 낭만浪漫하게 자유스럽게 그 개성을 충분히 발휘하는’12) 그 꽃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짙은 수염에 돗수 높은 안경의 근원 김용준은 말한다. ‘높은 예술을 산출키 위하여서는 화가에게 물질적 여유의 필요는 없다. 차라리 빈핍과 곤고와 불우와 모든 불행이 뒤얽힌 역경에 있을수록 좋다. 다만 한 가지 절대로 필요한 것은 그들에게 예술적 자극이 있어야 하고 마음의 여유와 제작의 여유는 충분히 있어야 한다’13)고. 아직도 이 말은 낡은 사고思考가 아니다. 우리는 물론, 젊은 시인들도 분명히 새겨들어야 할 가르침이다.)

그를 만나보면서 《접촉》14)이란 끈끈한 책을 생각했다. 시인 김영태는 방문객에게 끝없이 ‘관계’하려는 내음을 풍긴다. 콧속에서 실실 새어나는 짧은 소리마저 끈끈하다. 대화 중에도 지속적으로 친친親親, 농밀성을 풍긴다, 《털 없는 원숭이》의 저자 데스먼드 모리스처럼. 나는 이전에 《털 없는…》을 읽고 기실 인간의 동물학적 행위 양태에 무지 흥에 젖은 적이 있다. 동물의 여러가지 기이한 ‘Body touch’ 등의 접촉을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미래에도 인간은 결코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없다는 슬픈 마침점이다. 오히려 침팬지류보다 못한 습속과 어렵고 영악한 삶의 방정식들. 또한 자꾸만 비정상적으로 변모하는, 퇴행하는 잉여인간 저들. 무지막지하게 말해서, 우리 인간들은 특히 유사한 고등동물(!) 앞에서 까불지 말라고 일러두고 싶다. 인간이라고 뻐기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의 살의 결을 따라 만지고 부비는 ‘접촉’이란 참신한 속성의 것. 음－, 저 부드러움. ‘우리의 친밀한 만남은 언어적, 시각적 요소뿐 아니라 후각적 요소도 포함되어 있는 바, 결국 사랑이란 만지는 것, 보디 터치를 의미한다’15)는 이 말은 섹스만 뜻하는 건 아니리라. 관계하려는 그 무엇, 모든 것의 출발은 유형·무형이든 모두 다 ‘접촉’하려고 한다. 이미지로 접근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회적 금기나 억압으로부터 일단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접촉’은 매우 진실하기에. 이것은 부드러움을 생명으로 하면서, 고등동물 중 가장 색정적인 인간에게도 영원성의 가치를 가진 오브제다. 그래서 우리는 좀더 나은, 완벽한 친밀성을 지향한 숙고가 필요하다. 인간의 당연한 몫인 탓이다…. (그도 나도 너도 쟤도, 우리는 인간이자 유인원이 아니었던가.) 나는 제인 구달 여사의 침팬지 연구에 감동을 받는다. 그녀는 줁60년 26세(줁34년생)의 나이로 탕가니카 한 호숫가에서 침팬지들과의 삶을 위한 캠프를 쳤다. 그로부터 36년간을 그녀는 침팬지들과 하염없는 삶(＝사랑)을 나누고 있다. ‘발문’을 쓴 이문웅 교수에 의하면 야생 침팬지 무리에 섞여 있는 그녀를 ‘선녀’라고 칭한다. 책 《제인 구달》16)을 접하면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는 환경을 자연히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자연에서 숲이 먼저 죽을지도 모르는 일. 나무의 ‘수관은 투명해지고, 바늘잎들이 떨어지고, 가지가 부러진다. 허약하고, 병들어 죽은 나무가 증명하고 있다. 숲이 죽고 있다. 먼저 전나무, 가문비, 소나무 그리고 낙엽송, 그 다음에 너도밤나무, 느릅나무, 붉은떡갈나무, 보리수. 조용한 죽음’17)이라는 유르겐 포익트Jurgen Voigt의 경고는 인간의 진화에 따른 텃세 및 소유욕에 대해 새삼 돌이키도록 만든다. 이를 염려한 제인 구달의 행동과 실천일까. 침팬지 꼬마 제이에게 젖을 먹이듯 살포시 껴안은 그녀의 ‘친밀한’ 사진은 완연한 자애慈愛, 그 모습이었다. 그녀는 야생 침팬지 연구가 목적이 아니다. 연구 목적이라면, 그건 인간적 침팬지에 대한 절대 모독이다. 아프리카 맹수들의 위험 속에서 홀로이 빛나는, 아아, 구달의 지순한 침팬지 사랑. 인간의 처음을 우리는 유인원類人猿이라 했던가. 그들과의 한없는 공존·평화·사랑. 그녀 앞에서 ‘사랑’이란 결코 인간이 버릇처럼 남발하는 불쌍한 수식어가 될 수 없다. 사랑은 친친하고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눈물겹다.

나는 이제서야 최명희의 《혼불》 제1권을 넘기기 시작한다. ‘혼불’이란 그 또한 불멸하는 사랑의 불이 아니겠는가. 마음으로 껴안고 몸으로 느껴 생각하기. 나는 또 가리라. 사랑의 멋진 소비를 위하여, ‘신들린 사랑’을 위하여.

(1997년 2월호)

1) 김영태, 《느리고 무겁게 그리고 우울하게》, 민음사, 1988.

2) ＿＿, 《매혹》(그림시집), 청하, 1989.

3) 김영태·마종기·황동규 공저, 《평균율》, 창우사, 1968. ‘《평균율》2’ 시집은 1972년에 출간.

4) 김다은, 《푸른 노트 속의 여자》, 청아출판사, 1996.

5) 김치수, <새로운 감각,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 위의 책 해설. 141쪽.

6) 위의 책, 104∼107쪽 인용.

7) 김영태, 《풍경을 춤출 수 있을까》, 눈빛, 1996.

8) Scott K. Veggeberg/박은숙 역, 《마음의 치료》, 김영사, 1996.

9) 위의 책, 71∼72쪽.

10) 김인환, 《남몰래 흐르는 눈물》 시집 해설, 128쪽.

11) 김용준, 《풍진 세월 예술에 살며》, 을유문화사, 1988.

12) 위의 책, 23쪽.

13) 김용준 책의 소제목 <회화적 고민과 예술적 양심> 193쪽에 실렸음.

14) Desmond Morris/박성규 역, 《접촉》, 지성사, 1994. 이 책의 원제는 《Intimate Behaviour》로, 번역하면 ‘친근한 행동’ 정도. 저자는 동물 행태학자로 동물의 보호 및 행태 연구에 위업을 쌓는다.

15) 위의 책, 7쪽.

16) Jane Goodall/박순영 역, 《제인 구달》, 민음사, 1996. 그녀는 침팬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혹독한 모성애를 입증하기도 했다.

17) 유르겐 포익트/박시룡 역, 《진화의 붉은 실》, 민음사, 1994, 1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