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이하석

커버스토리 / 이하석

여일한 인품- '대인 이하석'

김용락(시인/ 문예미학사 대표)

이하석 시인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글 쓰는 과정 중에 자칫 '추켜올려 죽이거나 아니면 깎아내려 죽이는'(魯迅)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고 보면 긴장된다. 더구나 이선생님(이하석 시인에 대한 평소 나의 호칭이다)은 십 수년을 내가 가까이서 모셔온 분이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앞으로도 수십 년은 대구에서 얼굴을 맞대며 살아가야 할 처지이다.

이렇게 속으로 다짐하면서 글을 이어가지만 아마 이 글은 그에 대한 상찬이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칭찬(?)받아야 할 장점이 훨씬 많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글을 쓰기 위해 한 열흘 정도를 이하석에 대해 생각하고 그에 대한 2차 자료들을 읽었다. 평소 자주 만나고 많은 일을 함께 한 적도 있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을 한 인간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기도 드문 일이다.

그는 대인이다. 이때의 대인이란 소위 깡패사회의 덕목인 패거리, 의리나 호방으로 위장된 허세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여일하며 경계를 가늠하기 어려운 넓은 인품의 소유자이다. 그 이전 알던 세월은 두고 1987년 10월 대구경북민족문학회 때부터 오늘까지 14년 가량 아주 가까이서 그를 지켜보았는데 어떤 사안을 두고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거나 한번도 누구를 심하게 욕하거나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야말로 언제나 담담하고 편안한 표정으로 나즈막하게 이야기하곤 한다.

80년대 격랑의 세월, 그가 근무하고 있는 지방일간지에서도 민주화운동과 언론노조운동이 심했다. 항심을 잃기 쉬운 그 급박하고 힘드는 현실 가운데서도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예의 다정한 톤으로 말을 이어나가곤 했다. 이런 태도는 그가 속깊은, 아니 자기 방식의 철학이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가볍게 휩쓸리지 않는 미덕, 누구나 갖기 어려운 그의 뚜렷한 장점이다 (최근 문단 일각에서는 감옥을 20년은 살아야 인간된다는 말이 회자 된 적이 있다. '인간된다'는 다소 폭력적인 언어구사는 반드시 바람직한 표현은 아니지만 말하는 사람들의 생각의 일단을 가늠케 해주는 지표는 된다. 이 말은 20년 감옥 산 신영복 선생의 출옥 후의 여일한 자세와 10년 정도를 산 김, 박아무개 시인의 출옥 후 문학적 행로를 비교하면서 한 비판이다. 사람은 누구나 변하기 마련이고 변한다는 것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출옥 후 현실의 변화와 새로운 깨달음을 과장되게 선전하면서 이전의 삶의 태도와는 너무 다른 생각과 행동을 보이고 있는데 대한 비판이다. 나 역시 정치적으로 진보주의자건 보수주의자건 간에 사상이나 삶에 있어서 급격한 변화를 보이는 자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런 그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는 한국 시문학에 있어서 자기 자리를 확립한 시인이다. 인간적인 품격이 이 정도에 이르지 않고는 문단에서 그만한 명성을 쌓기 어렵다. 이 말은 문학과 삶의 기계론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인품이 있는 인간이 반드시 좋은 문학을 한다는 말이 아니다. 문학은 꽤 하는 데 인간이 졸품인 경우를 주변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이런 경우는 한국문학이 속고 있는 경우이다. 문학 수준도 있고 인간적 수준도 있는 행복한 결합을 그에게서 확인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소위 후배복이 많다. 대구만 한정해서 봐도 좋은 시인들이 그를 따른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단번에 알만한 시인들이 그 주변에 모여서 공부하고 있다. 그 모임의 이름은 '시오리'인데 나는 가끔 빈정대는 기분으로 이하석 계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구성원들의 문학적 수준이나 열정은 인정한다.

후배들이 그를 많이 따른다는 것은 그의 문학이나 삶이 후배들의 모범이 된다는 뜻이다. 나는 시오리 멤버는 아니지만 그를 따르는 후배 가운데 하나이다. 흔히 한국 문단에서 대구는 시의 도시, 시인의 도시로 불린다. 그 근거의 일각에 그가 있다. 70년대 <자유시> 동인을 결성하여 한국문학과 대구지역의 문학에 끼친 그의 영향은 평가할 만하다. 이때의 영향이란 통론적인 의미이다.

각론이라 할 수 있는 대구문학에 대한 그의 기여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하석의 시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모더니즘이다. 첫 시집 《투명한 속》에서 보여준 '냉혹한 사실주의'는 그를 한국 모더니즘시의 중요한 일원으로 만들었다. 첫 시집 이후의 시세계 역시 첫 시집으로부터 이탈이나 단절이라 할 수 없다. 이점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여일한 그의 성격과 상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대표적 모더니스트라 할 수 있는 그가 대구지역의 민족문학이나 문화에 기여한 공이 누구보다 크다면 많은 사람이 의아해 할 지 모른다. 문학적 실천과 정치적 실천과의 괴리(?), 이 문제는 좀 복잡하다. 사실 문인은 작품활동 자체가 그 자신의 정치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쓰는 작품을 통해 대 사회적 발언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하석의 경우 작품은 환경생태문제, 실존문제를 탐구하데 비해 사회적 삶은 민주화운동의 일선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70-80년대 정치적으로 보수반동의 근거지로 불리는 대구에서, 그리고 보수적이라는 언론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현재 그는 영남일보 논설위원이다) 그가 보여준 민주화운동이나 지역운동에 대한 기여는 사실 쉬운 게 아니었고, 자기 헌신이 전제되지 않고는 취하기 어려운 결단이었다.

60년대 서구에서 사르트르와 까뮈가 보여준 사회적 실천 가운데 까뮈의 입장, 즉 예술가(작품)로서 사회참여는 반대하지만 일반 시민으로서 사회참여는 역사적 필연이라는 자세를 이하석에게서 본다. 물론 이하석이 작품을 통한 사회적 실천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이 소위 민중문학, 참여문학의 범주에 드는 것은 아니다.

이하석에 대한 나의 구체적 인상기를 편년체적 방식으로 기술해보자.

내 기억 속에 이하석이 처음 각인된 것은 70년대 말쯤이다. 내가 다니던 대학의 문학행사장에 그가 나타났다. 그의 고교 후배이던 박상봉, 김헌택 등의 문청들이 목련나무 아래서 그를 에워싸고 다정스레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당시 그의 첫 시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갓 나왔고 해설자가 김현이라는 것 때문에 나도 그에게 가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별로 숫기가 없던 나는 그냥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들의 대화를 부러운 마음으로 지켜본 기억이 있다. 이것이 그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고 보다 분명하게, 아니 그를 진지하게 인식한 것은 1982년 봄이었다.

나는 대구의 <사랑마당>이라는 일종의 까페식 공간에서 개인 시화전을 한 적이 있다. 대학 은사이신 신동집 시인이 《현대문학》에 내 시를 추천하려다가 주간 조연현이 죽으면서 추천규정이 바뀌는 바람에 대신 문덕수 시인이 운영하던 시문학에 추천을 받으라 해서 싫다고 거절했다. 그걸 애석하게 생각한 친구들이 추천받으려고 써뒀던 시를 모아 시화전과 "송사리떼를 몰고 하늘로"라는 시 20편이 실린 작은 시첩을 만들어 주었다. <사랑마당>은 서울에서 데모하다 쫓겨온 서강대 출신의 김 아무개라는 친구가 관리를 했는데 당시 의성에 살던 판화가 이철수가 장판지화라고해서 장판지에 '동학군 떡 사먹다' 등의 그림을 그려 첫 전시회를 하고 다음으로 연 게 내 시화전이었다.

영남일보가 언론 통폐합되면서 매일신문의 기자가 되었던 이하석이 이태수 시인과 함께 격려차 내 시화전에 나타났다. 아마 이태수 시인을 따라왔던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동향출신이라고 이태수 시인을 더 열심히 따라 다니던 시기였으니까. 내가 문단에 등단하게 좀 도와달라는 식의 말을 했더니 그가 "김형 이렇게 시화전하고 시집내면 등단이지 뭐 특별히 등단할려고 해요"라고 말했다.

그는 지나가는 소리로 했는지 몰라도 받아들이는 나는 좀 달랐다. 간혹 자신이 시인이라고 거들먹거리거나 시인을 뭐 대단한 벼슬쯤으로 생각하는 문인들이 없잖아 있다. 신통찮은 시인일 수록 이런 의식이 강하다. 등단이라는 제도를 그가 별로 신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이 한마디가 나에게는 강렬하게 인식되었고 내가 그를 괜찮은 시인으로, 문학의 근본을 생각하는 시인으로 믿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사실 우리나라는 등단/ 비등단을 엄격히 구분해 문학하는 사람끼리도 서로 차이를 두곤 하는 악습이 있는데(이건 일제식민지 잔재이다) 별로 바람직하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문학행위가 갖는 최소한의 제도적 요건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은 결국 글쓰는 이 자신의 문제이고 삶에 대한 근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근래 등단을 둘러싸고 돈을 먹었니 안 먹었니 심심찮게 나도는 추문들을 접하고 보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시인이라는 게 국가고시처럼 자격증도 아니고 글쓰는 주체가 수준 높은, 진정성이 있는 그야말로 '문학'만 하면 되는 것이지 등단이라는 형식에 집착하는 것은 아무래도 공소하게 느껴진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여기 저기, 이 장르 저 장르 공모상에 응모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불신을 갖고 있다. 쓰고 싶으면 그냥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이하석을 이야기하는 자리에 내 신변잡담을 장황하게 늘어놔서 독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하석 선생을 보다 가까이에서 모시게 된 일을 조금 더 이야기해야겠다. 1987년이다. 나는 안동에서 3년여의 교사생활을 청산하고 대구에 올라왔다. 알다시피 1987년은 6월항쟁, 8-9월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던 그야말로 준혁명기였다.

나도 6월 항쟁 중에 최루탄 사이를 뛰어다니면 돌도 던지고 화염병도 던지며 나름대로 역사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뛰었다. 그러다가 생각이 미친 것은 대구에도 문학운동단체를 하나 건설해 민주화운동에 보다 조직적으로 기여하자는 것이었다. 이 생각은 당시 서울에서 일고 있던 민족문학작가회의 재건운동 등에 일정한 영향을 입은 것이었으며 또 하나는 그 해 한국문인협회 김동리씨 등의 주동으로 대구의 모호텔에서 전두환정권의 4·13 호헌조치에 대한 지지대회가 있었다. 이것은 민주화에 대한 명백한 반동이며 더구나 대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데 대해 대구를 근거지로 문학활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 개인적으로도 4·13 반대 서명 건으로 인해 학교를 그만두게 된 사연이 있었다.

나는 선배인 배창환 시인 등과 의논한 끝에 대구에 민족문학회를 만들기로 최종 결정했다.

대구는 흔히 순수의 본향이라 불렸을 정도로 순수문학이 전부였다. 이런 문학풍토에서 처음 '분단시대'라는 이질적인 문학동인이 생긴 게 1984년 이었으므로 민중문학적 시각을 가진 문학선배가 없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민족문학회를 건설하기는 해야겠는 데 의지할만한 선배도 없고 해서 고심하다가 앞서 언급한 바처럼 평소 신뢰를 갖고 있던 이하석 선생을 만나 대강의 뜻을 말하고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대구라는 지역적 특수성, 언론사 간부라는 직위, 그리고 이전까지 모더니즘 계열의 문학을 해온어려운 여건과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민족문학회에 참여했다. 그래서 1987년 10월 13일 '대구경북민족문학회'가 창립되었고, 영남대 교수인 정지창 연극이론가와 함께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후 현재까지 대구민족문학회 대표, 민예총 대구지회장 등 민족문학운동과 지역 문화운동의 병풍역할을 해왔다.

나는 문학적 이념이나 미학적 방법론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결단하기 쉽지 않은 시기에 민족문화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도도한 대열에 뛰어들어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마다 않고 맡아준 이하석 선생께 지금도 존경심과 개인적인 고마움을 갖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하석 시인이 민족문학회의 주요 일원이 된 데 대해 의아한 생각을 갖기도 했다. 그의 문학세계와 80년대의 극성(?)스럽던 당파성문학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개인적으로 이하석이 어떻게 민족문학회 대표냐고 노골적으로 물어오는 사람도 여럿 있었고 나 역시 어떤 때는 그도 좀더 민중적인 시를 썼으면 좋겠다고 혼자서 생각한 적이 있다.

80년대 후반 지역에 민족문학 붐을 일으키려는 목적으로 민족문학계열 문인들의 초청강좌가 자주 있었다. 한번은 문학평론가 정호웅 교수가 염무웅 교수에게 이하석 시인의 시가 민족문학이냐 아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염교수의 답변은 이하석의 시가 민중문학은 아닐지 몰라도 분명 민족문학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고 답변했다. 무엇이 민족문학이냐에 대해서는 좀더 따져봐야 할 문제이지만 가능한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운 시기에 자신의 문학관과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대의에 공감하는 자세, 치열한 문학정신과 좋은 작품으로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는 시인, 그가 바로 이하석 시인이다. 나같은 농땡이를 사무국장으로 데리고 10여년을 함께 일하면서 한번도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던 광대무변한 인품, 이런 것들의 복합체가 바로 이하석의 진면목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하석 시인의 작품에 대한 내 견해는 지난해 중반기에 실천문학사가 기획한 한국의 대표시 해설집(출판사의 경제적 사정 때문인지 예정과는 달리 현재 이 책은 나오지 않고 있음)에 실으려고 썼던 글을 말미에 붙이는 것으로 독자들에 대한 예를 차리려고 한다.

폐차장 뒷길, 석양은 내던져진 유리 조각

속에서 부서지고, 풀들은 유리를 통해 살기를 느낀다.

밤이 오고 공기 중에 떠도는 물방울들

차가운 쇠 표면에 엉겨 반짝인다,

어둠 속으로 투명한 속을 열어 놓으며.

일부는 제 무게에 못이겨 흘러내리고

흙 속에 스며들어 풀 뿌리에 닿는다,

붉은 녹과 함께 흥건한 녹물이 되어.

일부는 어둠 속으로 증발해 버린다.

땅 속에 깃든 쇠조각들 풀뿌리의 길을 막고,

어느덧 풀 뿌리에 엉켜 혼곤해진다.

신문지 위 몇 개의 사건들을 덮는 풀. 쇠의 곁을 돌아서

아늑하게, 차차 완강하게 쇠를 잠재우며

풀들은 또 다른 이슬의 반짝임 쪽으로 뻗어 나간다.

- <뒷쪽 풍경 1> 전문

먼지 속에서 뒤척이며 찢어진 신문에서 떨어져 나와

푸른 여자 먼지 일으키며 날아갔다.

비고 우그러지고 벗겨진 채 햇빛에도 바랜 채

뒹굴던 깡통들 뻔뻔하게 흙 속에 처박히고,

풀들 어쩌다 깡통 속에 다리 뻗쳐

부르튼 다리로 깡통들 뚫어 버린다.

나비 올 때쯤 기약도 없이 꽃피는 민들레, 저 혼자

씨앗 흩이고 쓰러진 후, 그 곁에 내던져진 채

몇 개의 사건들 기억해 내려고 심각해진 남자들의

찢어진 얼굴들. 그 얼굴들만 휴지로 빠져 나와

바람에 사라지는 것들 속에 저절로 섞이며,

혹은 모든 사건들 속에서 평온하게

따로 미끄러지면서.

- <뒷쪽 풍경 2> 전문

1980년 10월 우리 시단에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아주 독특한 시집이 출간됐다. 제목은 《투명한 속》, 저자는 이하석으로 1948년 경북 고령에서 출생하여 경북대 사회학과에서 수학하고 자유시동인으로 활동하는 시인이라는 이력을 달고 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이 시집의 앞표지 안쪽 날개에는 다음과 같은 짧은 도움말이 실려 있다.

"강인한 금속성 이미지와 황량한 대지적 공간과의 결합을 통해 그의 시들은 약소 민족의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삶의 슬픔을 노래하면서 우리의 땅이 풍요해지기를 가열한 의지로써 호소한다"

이 짧은 진술은 《투명한 속》을 이해하는 큰 나침반이다. 실제로 시집에는 <부서진 활주로> <폐차장> <연탄재들> <병> <깡통> <못> 등에 대한 시들이 실려 있고 이 시가 내보이는 세계는 강인하면서도 황량한 '금속성'을 띠고 있는데 이 금속성은 이 시집을 지배하는 주조음이라 할 수 있다. 한국시사에서 산업화나 문명의 폐해를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그리고 일상적 사실성이 주관적 감정을 배제한 채 극도로 투명하게 드러낸 시집이 당시는 물론 새로운 세기를 앞둔 90년대 말에도 우리 시단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말그대로 《투명한 속》은 아주 독특한 시집이다.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현도 이 점에 동의하는지 그의 시세계를 '광물질의 상상력'이라 명명하면서 "그의 시는 대로 서정 시인의 시라기 보다는 광물질 조사원의 관찰 기록 같아 보인다"거나 "인간의 가짜 욕망을 자극하는 소비 물자의 형태"를 시화했거나 "소비 사회의 풍요함이라는 신화의 허구성을 인식"한 것이라는 식으로 평가했다.

김현의 이런 지적은 이후 이하석 시 평가의 전범을 이뤄 대부분의 이하석에 대한 비평(연구)이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하석하면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 혹은 파괴된 환경에 대한 고발하는 식의 평가가 주류를 이룬다. 지금까지 이하석의 작업에 대한 평가로 정당한 일면이 있는 지적이다.

나는 이 지면에서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이하석의 시를 이해해 보려고 한다. 굳이 나누자면 그의 대부분의 시는 사유방식을 언어활용이나 낯설게하기 등과 같은 형식주의나 신비평의 잣대로 재는 게 더 섬세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측면이 크다. 그런데 나는 사유의 내용을 우선하는 역사주의적 비평 방식을 적용해 보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투명한 속》은 1980년 10월에 출간되었고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시집의 自序에 의하면 79년 12월에서 80년 7월 사이에 쓴 시들을 손질한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렇지만 문학사적으로도 1980년은 매우 중요한 해이다. 여기서 길게 언급할 여유는 없지만 이전 70년대까지의 낭만적 민중문학(비판적 리얼리즘)이 과학적(운동적)민중문학으로 바뀐 해이다. 그 배후에는 90년대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공식적 명칭을 얻지만 당시로는 광주사태, 혹은 광주학살이라 불리던 피의 5월 광주항쟁이 있다. 그의 시는 정확하게 이 기간을 통과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시집에는 광주관련 아무런 시적 징후를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이하석의 시가 광주문제에 대한 어떤 기미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작품의 질이 떨어진다거나 윤리적으로 비판받아야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1910년대 러시아는 볼셰비키혁명의 와중으로 모든 사회분위기가 정치적 상상력으로 충만했다. 그 때 혁명운동의 심장부였던 모스크바 대학에서 일군의 학생들이 당시로는 너무나 비정치적인 언어학이나 민속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싹이 되어 나중에 러시아 형식주의 미학이론으로 발전했던 예를 생각해보면 어느 시대나 당대의 주류적 관심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창조적 사유를 내장한 소수파의 진정성은 존중받아야한다는 생각을 나는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하석 시 이해의 열쇠 역할을 하는 표지글에서 "약소민족의 냉혹하고 비인간적 삶의 슬픔을 노래"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이 시집에 실린 시 가운데 가령 군대의 임지로 유명한 <원통리> <비무장지대> <임진강> <기지촌> 등에서 보인 시인의 현실인식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들도 자세히 읽어보면 분단이나 민족문제에 대한 감수성보다는 철책이나 지뢰 등의 금속성이 자연과 불화를 빚고 있는데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생태주의적 상상력이 우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찬비 내려 눈 녹는 오월, 묻혀있던 쇠들 솟아나/ 골짜기 마다 죽인다 죽인다는 말들만 짙어진다."(<원통리- 1>)에서나 "송사리떼 물 속 쇠덩이 밑에 헤엄칠 때,/ 쇠의 녹물은 흘러 물 밑바닥 태우며/ 송사리 뱃때지 할퀸다."(<임진강>)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 때문에 터졌던 포탄껍질들이 눈 속에 묻혀 있다가 만물이 소생하고 빛나는 신록의 오월 골짜기마다 죽음의 그림자를 두리우고 있고 예민한 생명력의 표상으로 읽히는 송사리떼의 뱃때지를 할퀸다.

이 시에서 '쇠'는 신동엽이 <껍데기는 가라>에서 절규한 "모든 쇠붙이는 가라"는 반외세나 반전사상을 매개한 다소 추상적인 쇠붙이 보다 민족문제와 관련하는 한 더 추상적으로 읽힌다. 이 시에서 쇠는 한국전쟁 이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민족현실을 환기시키거나 동족상잔과 분단현실의 배후에는 강대국이 있다는 점을 독자들에게 인식시키기보다는 동족을 살해한 무기의 잔해인 그 '쇠'가 생명감이 충만한 신록의 오월 산골짜기에 살기등등한 "죽인다"는 말을 짙게 하고 여린 송사리 뱃때지를 할퀴는 그야말로 자연파괴와 생명파괴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 점에서 이하석의 시가 '약소민족의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슬픔을 노래'했다는 진단은 비약된 평가인 것처럼 보인다.

차라리 영국의 시인 예이츠는 시인은 예언자이다고 말한 바 있지만 이하석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산업화의 개발의 부정적인 얼굴에 누구보다 먼저 주목했다는 점에서 생태주의의 예언자적 시인으로 파악하는 게 더 바람직할 것 같다. 사실 이 점에 관한한 그는 어누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우리 시단에서 환경파괴나 생태문제를 문학과 연관지어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1989년 소련과 동구의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고 국내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확립되어가기 시작하면서 80년대에 우리 문학과 지성계에 만연했던 맑시즘적 사고에 대한 대안적 사상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태문제가 전면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1990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 좌담 <생태계 위기와 민족 민중운동의 사상>과 1991년 "녹색평론"의 창간 등이 생태문제를 우리 사회의 주요담론으로 확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때부터 문학에서도 환경문제 생태문제를 다루는 시들이 본격 출현하고 이에 따른 논의도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범주에 해당하는 시들에 대한 명칭도 다양하다. 생태시, 공해시, 환경시, 생명문학시, 환경생태시, 생태환경시 등의 이름으로 불린 시들은 자연이나 환경 파괴를 사실적으로 묘사 고발하는 시와, 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산업문명이나 자본주의의 원리를 비판하는 시, 문명이나 자연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바꾸고 새로운 삶의 관점을 제시하는 시(남송우, <생태환경문학론의 전개양상과 생명시에 대한 전망>)로 유형을 나눌 수 있다.

이미 1970년대부터 생태문제 환경문제에 주목하는 시들이 대거 발표됐던 독일 같은 경우는 인간과 자연이 동등하다거나 지연과 인간의 융합 등과 같이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탈피하는 입장을 생태주의로, 기존의 체제를 두고 과학기술의 효율적 관리로 환경오염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입장을 환경주의(송용구)로 구분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명칭들이 엄격한 구분없이 혼용되고 있다.

《투명한 속》에는 산업화로 인한 환경파괴나 이의 찌꺼기인 병 깡통 코카콜라 유리 페인트 바브민트껌 못 등을 등장시켜 환경파괴를 고발하는 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타이프라이터>같은 시에서는 전면적이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속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엿보인다.

같은 지역에 살기 때문에 비교적 자주 만나는 이하석 시인에게 자신의 대표작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뒷쪽 풍경- 1, 2>라고 대답했다. 따라서 이 글은 시인의 자선 대표작에 대한 해설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시의 제목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왜 뒷쪽 풍경인가. 흔히 앞은 긍정적인 이미지로 쓰이는 반면 뒤는 부정적인 뜻으로 많이 쓰인다. 이 시는 현대문명, 혹은 산업화의 뒷쪽 풍경에 대한 천착이다. 문명의 앞면은 인간을 편리하고 안락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런 문명의 이면에는 인간의 지속 가능한 삶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파괴와 폐허가 있고, 그 정체는 산업쓰레기와 비인간적 삶이다. 이러한 문명의 이중적인 면을 시인은 놓치지 않고 있다.

<뒷쪽 풍경 1>의 풍경은 폐차장이다. 부서져 고물이 된 쇠조각이 땅 속으로 스며든다. 이 땅 속에 깃든 쇠조각들이 풀 뿌리의 길을 막는다. 산업화의 노폐물인 쇠조각과 자연의 기표인 풀뿌리의 대결이 이루어진다. 그 쇠붙이는 풀뿌리에 엉켜 (정신이) 혼곤해지고, 현대문명의 또 다른 상징인 신문지를 풀은 왕성한 성장으로 덮어버린다. 그리고 풀은 땅 속으로 채 스며들지 못한 땅 표면의 쇠를 잠재우며 또 다른 이슬의 반짝임 쪽으로 뻗어나간다.

<뒷쪽 풍경 2>에서도 풀들 어쩌다 깡통 속에 다리 뻗쳐 부르튼 다리로 깡통을 뚫어버릴 만큼 생명력이 왕성하고 강한 풀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이 두 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시인은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설정하고 이 대립에서 풀의 승리쪽에 손을 들어준다. <뒷쪽 풍경 1>에서 "완강하게 쇠를 잠재우며/ 풀들은 또 다른 이슬의 반짝임 쪽으로 뻗어 나간다"는 구절과 <뒷쪽 풍경 2>에서 "다리로 깡통을 뚫어 버린다"는 구절을 이의 증거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하석은 이 시에서 문명의 뒷쪽 풍경과 산업화의 폐해를 냉정하고 투명하게 고발하고 있지만 긍극적으로는 자연이 산업화와 문명의 찌꺼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적 세계인식을 보이고 있다.

70년대는 소위 개발독재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때이다. 개발과 수출지향의 경제정책으로 생겨난 부의 분배는 불균등하여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자연환경도 숱하게 파괴되었다. 그 70년대 끝머리에서 당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환경과 생태문제에 깊은 천착을 보인 이하석을 우리문단에서는 생태(환경)문학의 선구자로 평가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