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이태수

 

 

 

꿈과 말의 화육(化肉)으로서의 시

 

 

 

손진은

 

 

 

 

 

1.

이태수 선배, 그는 훈풍같은 사람이다. 상대방을 시원하고 편안하게 해주면서 정작 그 사람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게 하지 않는 사람. 그는 1974년에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래 7권의 시집을 냈을 정도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우리 시단의 중진이자, 70년대의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이지만 특히 대구 문학의 창(窓)이라 말하는 것이 여러 모로 어울릴 것 같다. 유명 무명의 많은 선후배 문인들이 그를 통해 문학을, 인생을 비춰 본다. 문단에 발을 들여 놓았거나 지망생이거나간에 그에게는 차별이 없다. 처음 만나는 문단의 선후배들을 아연 감격시키고 마는 그 아량과 부드러움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를 두고 나는 자주 생각에 잠기곤 한다.

나에게도 시인에 대한 기억은 여럿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뚜렷한 것은 새벽의 그의 차 속에서이다. 7, 8년전쯤 되는 걸로 기억하고 있다. 오세영 교수의 강연이 끝나고 뒷풀이가 새벽까지 이어졌지 싶다. 대부분이 취했지만 그는 별로 취해보이지를 않았다. 그러면서 시인 지망생을 포함한 몇 사람의 문인들을 자신의 차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주는 일을 맡고 나선 것이다. 운전 중 그는 자주 졸았고, 그때마다 옆에 타고 있는 사람이 깨우느라 오히려 황송해지는 그런 죄스러움까지를 동반한 끈적이는 시간을 거쳐서야 우리는 인근 도시를 거쳐 대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런 선한 마음의 빚 같은 걸 몇가지씩은 짊어지고 있을 것이다.

문인만이 아니다. 미술, 음악, 무용을 하는 예술인들이 그의 주변에는 많다. 그의 시는 자주 예술가곡으로도 불리고 시립무용단의 대본으로도 각색되기도 한다. 음악과 무용에 대한 열정은 일주일에 2, 3차례씩은 공연장으로 그를 데려다 놓고, 미술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일찍이 《분지의 아틀리에》라는 제목의 책으로 나타났지만, 시를 포함한 인접 예술분야의 글들을 책으로 묶어내자면 대여덟권은 족히 되지 싶다.

1년 남짓한 인근도시에서의 파견 근무를 제외하고는 30년이 되어가는 세월을 한 도시의 한 직장(매일신문 기자, 문화부장, 논설위원 등을 거쳐 현재 편집부국장)에서 밥벌이를 하고 시를 쓰고 문화활동을 하면서 지속되고 있는 이러한 영향력은 그러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일상에서는 거의 의식되지도 않는 매력들을 발산하고 있다. 이는 단적으로 그가 2년째 회장을 맡아오고 있는 대구시인협회의 일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여기서도 시인은 소집단은 자연스럽게 두면서 문학적 경향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끌어안는 일을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능력으로 해냈다. 인위나 획일을 거부하면서 물 흐르듯이 스며드는 일상 깊숙이 배어 있는 시인의 이러한 자세가 튀지 않으면서도 항상 자기 목소리를 뚜렷하고도 개성 있게 내어온 그의 시에도 적용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2.

시인은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를 좋아했다. 그림 그리기에 더 소질이 있었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미술대학 진학을 포기하면서 자연스럽게 글쓰기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지만 그의 전공은 국문학이 아니라 철학이었다. 어린 시절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선배가 철학을 전공하고 있었고, 또 깊이 있는 시인이 되려면 철학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계산도 깔려 있었다고 한다. 일찍이 아버를 여읜 가정의 장남으로서 시인은 대학 시절을 힘들게 보낸다. 그러나 역으로 꿈과 현실 사이에 놓인 거리 때문에 겪게 되는 갈등이 그의 문학에 자양이 되기도 한다. 그는 자주 어울리던 친구들이 대부분 문학 자체를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멋부리기나 분위기 만들기에 기울어져 있는데 반발한다. 이런 인식은 자연 문학서적보다는 철학서적에 매달리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사르트르·야스퍼스·하이데거·키에르케고르 등 실존철학자들의 책을 통해 사유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런 영향은 시집 《그림자의 그늘》에 실린 초기시들에서도 드러나는 바이지만, 시인의 습작기는 문장 그 자체보다는 그 그릇에 담아야 할 알맹이, 혹은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뼈대의 시학’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게 된다. 이러한 기초작업은 수사에 촉각을 세우고 방법론을 익혀 나간 등단 시절부터는 메시지가 불거져 나오기 보다, 은연 중에 메시지를 드러내되 정서적인 울림으로 다가설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열매를 맺는다. 어떤 메시지라도 정서화해서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체득하게 된 시인의 시가 부드러워지고 표현방법도 쉬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학시절 김춘수, 신동집, 박철희 같은 분들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고, 황동규, 이승훈, 권국명 등의 시들을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시에 촉매제 역할을 한다. 철학과에 다니면서도 김춘수 교수의 시론과 문학개론 강의는 2년에 걸쳐 들을 정도의 열정이 시인에게는 있었다. 김춘수의 아름다운 언어, 황동규의 지성과 감성의 균형감각과 수사, 이승훈의 난해하면서도 첨예한 언어감각, 권국명의 무가적인 끈적함과 어둠 등이 알게 모르게 그의 시에 자양이 된다. 그러나 4학년때 《매일신문》에 투고했던 <겨울 목탄화〉등의 시가 최종심에서 낙선하고 말면서 대학시절의 등단의 꿈은 무산된다. 그리고 입대. 시인은 군복무 중에도 1백여편의 시를 쓰지만, 제대한 뒤 모두 파기해버리는 호기를 범하기도 한다.

시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은 제대 후에 다시 지펴져 바로 74년에 등단(《현대문학》)하게 되고, 75년 이하석 시인과 그의 발의로 결성, 76년 박정남, 박해수, 이경록, 이기철, 이태수, 이하석, 이동순, 정호승 등 대구 출신의 패기만만한 젊은 시인들이 창간 동인으로 참여한 동인지 《자유시》(그후 7집까지 발간된다)를 내게 되면서 그의 문학은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된다. 《자유시》는 한국시사에서 중요한 동인지로 자리매김되고 있는데, 이 동인지에 실린 시인의 작품이 문단의 매우 좋은 반응을 받으면서 그의 문학의 입지점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3.

한없이 투명한 동시에 한없이 깊어지는 견고한 정신의 드높은 경지, 이것이 그가 시라는 언어의 구조물을 통해 접근하고자 하는 세계이다. 정신적 순결성과 이미지의 명징성이 조화롭게 일치를 이루며 만들어가는 시적 지향.

시인은 어떤 때도 언어를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이 점은 그의 시에 나타나는 현실과의 거리 조정에서 드러난다. 민중시로 일컬어지는 일군의 작품들과 실험성이 강한 시들에서 언어가 도구로 전락되는 현실을 본다. 그는 시의 경박성과 이념성, 산문성을 배제한다. 그러면서 철저하게 언어의 예술성, 언어의 미학을 중시한다. 시는 어디까지나 언어예술이며 따라서 말을 새롭게 빛내고 말의 새로운 힘과 그 본래성을 찾는 일을 저버려서는 안된다고 하는 인식에 시의 젖줄을 대고 있다. 말하자면 시인은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거나, 현실의 부정적 측면을 현상적으로 고발하거나, 언어를 비트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언어와 현실인식을 함께 밀고 나가는 작업을 일관되게 수행해 왔다. 그는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지만 현실에 함몰되어 미적 거리를 상실하지도 않는다. 현실과의 관계를 늦추지 않는 긴장이 시인의 시를 지켜 온 동력이라면 동력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시인의 시를 빌어서 하면 더 좋을 것이다.

 

부드러운 힘 안으로 무르익어, 건드리면 부서질 듯 투명하고 아름다운, 유리알 같은 시, 결코 구부러지지 않는 그런 시를, 빈 듯 그득하고 속이 차서 터질 것만 같은…… 곡식과 양념을 곳간 가득 채우고 심지가 가득 박힌 그런 말들의 마을, 그 한가운데서서 눈보라 뒤집어쓰고도 중심을 잡고 있는, 일회용 반창고가 아니라 밤하늘의 별, 개울에 흘러가는 물소리 같은 시를, 이 땅에 뿌리 내리고도 하늘로 발돋움하는, 어둠이 아니라 어두울수록 더욱 영롱한, 마음 가난한 이웃과 서러운 내 누이의 창에 조그마한 촛불이 되어 주는 시, 그런 시 한 편을 쓸 수 있었으면, 들꽃처럼 호젓이, 학처럼 고고하게, 하지만 다정하고 낮게 스며드는, 없어도 그만, 있으면 한없이 그윽한 시를 쓸 수만 있다면…… 발바닥까지 하늘로 밀어올려 주는, 어둠을 흔들어 깨우며 불빛이 되는, 이윽고는 나의 따뜻한 무덤이 되어 줄 그런 시 한 편을 빚을 수만 있다면, 유리알의 시를……

─ <유리알의 시> 부분

 

부드러움과 힘, 비움과 채움, 부서짐과 견고함, 비틀거림과 안정, 지상과 천상, 일상과 초월, 어둠과 밝음, 존재의 부재, 고고함과 다정함 등의 양극의 무늬가 스며 서로 간섭하면서도 밀어내는 극점에 그의 시의 입지가 마련된다. 더 이상의 췌언이 필요하겠는가. 부드러움의 힘, 생명력 있는 영속성의 아름다움, 이웃의 마음을 맑히는 빛을 갖춘, ‘심지가 바로 박힌 말들의 마을’이 그의 언어관의 정수다.

시인의 문학은 항상 저 건너편에 펄럭이는 깃발이 아니다. 일상에 발딛고 있으면서도 초월에 몸을 담그는, 그래서 일상과 초월이 만나는 지점을 찾는 일은 현실에서는 획득할 수 없는 것이며, 이 점을 시인 자신이 깨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롭고 고독한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의 형상화, 시인의 표현대로 하자면 ‘꿈’의 공간, ‘지금’ ‘여기’에서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세계가 반짝이는 공간이 그의 시다. 이는 결국 그의 시가 억압적인 현실에 대한 강력한 거절인 동시에 그 거절의 의지가 경화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부드러움의 미학을 안으로 다져 왔음을 말하는 것이 된다. ‘문학의 자기 충족적 특성과 심미적 완결성’(민현기)으로도 말해지는 이런 그의 출발점에 초기의 시들이 놓인다면 그 무르익은 향기들이 최근의 ‘안동시편’ 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면 초기작부터 그의 시를 일별해 보기로 한다.

 

무서워요. 눈 뜨면 요즈음은

칼날이 달려와요. 낮과 밤

꿈 속에서도 매일 목 졸리어요.

누군가 자꾸

자꾸 술만 권해요.

 

거울을 깨뜨려요.

구석으로 움츠리며 낮술에 젖어

얼굴 버리고 걸어가요. 요즈음은

아예 얼굴 지우고, 깨어서도

잠자며 걸어가요.

─ 〈낮술〉 부분

 

모호하면서 감성적인 자의식이 주조로 되어 있는 첫시집 《그림자의 그늘》에 실려 있는 이 시는 향후 이 시인의 시세계를 함축적으로 예고해 주고 있다. 능동적 삶을 박탈당한 채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허둥대는 피동적 자아의 일그러진 모습이 소름끼치는 어법으로 예각적으로 드러난다. 자아를 잃고 가상으로 떠내려가면서 살아가는 실존적 방황, 낭만적 우울이 가미된 이 유형의 시는 당연히 그 속에 거칠고 타락한 세계에서 벗어나 순결하고 밝은 이상적 공간에 안주하려는 예술적 갈증을 내장하고 있다. 시인에게 현실과 꿈은 항상 상반되는 상태로 공존한다. 오히려 현실에 대한 무력감 절망감이 고조되면 될수록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꿈으로의 몰입 역시 고조된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의 표제가 《우울한 비상의 꿈》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울한 상황 속에서도 날아오르고 싶은, 날아오르지는 못하더라도 눈을 하늘로 들고 싶은 현실 초극의 궤적은 ‘하늘’, ‘비행기’, ‘새’, ‘달’, ‘별’, ‘구름’처럼 수직상승의 의지를 동반하는 이미지를 통해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시인의 상승의지가 휘발성의 언어 그 자체로 날아가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 그래 그래, 아빠는

구름 잡으로 가는 바람,

바람 잡으러 가는 구름이란다.

바람이 불거나 꽃이 지고 있을 때

봄이 와도 봄은 오지 않는 강가에서

몸을 비트는 나무들.

그래 그래 그래, 아빠는

잠들 때도 머리는 동쪽으로 두는

한 그루 나무란다. 가슴에는

등불 하나 달고, 불꽃이 일렁이는.

그래 그래 그래

아빠는 이즈음 목이 칼칼한

말거지란다.

─ 〈다시 사월에〉 부분

 

바람, 구름과 함께 나무를 이미지의 다발로 잡은 시인의 의도에 주목하게 한다. 시인은 나무를 통해 인간이 바람과 구름처럼 바로 대지를 박차고 허공으로 떠오를 수 없는 존재임을, 육체라는 감옥에 갇힌 물질적 존재임을 몰각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세계 내 존재’로서의 위치를 수락하는 것이다. 이 시인이 추구하는 힘은 상승의지와 맞물려 있고 이 상승은 투명한 비상의 공간을 지향하고 있지만 우울한 대지와 굳건히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아울러 ‘목이 칼칼한 말거지’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시인의 비상에의 욕망이 ‘말’과도 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시인의 대부분의 시들은 초월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언어를 통한 세계의 갱신의지를 함묵적으로 담고 있기도 하다.  

 

말이여, 너 찾아가는 밤엔

말들이 일어나 어지럽게 또

말 발굽 소리 내며 말 발굽 아래 떨어지고,

말이 낳은 말들이 윙윙대며

말 하나의 말문을 막고 자물쇠를 채우고

말이여, 오랜 기다림과 시린 발목과

말이여, 가슴과 손바닥에 내려서

말의 홍수에 둥둥 떠 흐르는 말을 지우고

말이 말하고 있을 때, 나에게

말해 다오, 온몸으로 타오르는 말을 위하여,

말의 마을에 말의 알몸들 불러서

말의 잔치를 벌이고

말의 제사를 올리고, 엎드리어

말을 버리고 말을 만날 때

─ 〈말을 버리고 말을 만날 때> 부분

 

말을 찾아가는 길은 어지러움과 허위, 위선으로 가득 차 미친 말(馬)처럼 윙윙대며, 홍수처럼 둥둥 떠 다니는 엄청난 말의 욕망과 힘에 저항하는 길이다. 그 도정은 시린 발목을 거쳐야 얻을 수 있는 견인의 길이며, 가슴과 손바닥에 내리는 순결의 세계이기도 하다. 시인의 참된 언어에 대한 신뢰는 말이 스스로 말을 하는, 알몸의 말이 어우러져 춤을 추고 제사를 드리는, 말을 버리고 말을 만나는 역설적인 깊이까지를 담지하고 있다. 현실이나 상황에 대한 대응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새롭게 고양시켜 줄 말에 대한 추구, 말의 새로운 힘과 미학찾기를 아울러 시도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결국 거친 세계에 저항하는 길은 같이 거칠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연약하고 부드러운 세계를 통해서 라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우울한 비상의 꿈》이 상승에 대한 욕망을 담고 있는 시집이라면 《물 속의 푸른 방》은 제목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하강의 욕망을 다루고 있는, 깊이 침잠하여 새로운 꿈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몸짓이다. 여기서는 ‘섬’ 이미지가 새롭게 제시되고 있다. 현실은 여전히 암울하고 뒤틀려 있지만 다른 켠에는 현실과는 반대되는 순결하고 아름다운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만나게 된 것이 ‘지금, 여기’의 현실이 아닌 환상적인 공간인 ‘섬’이며, 더 나아간 지점이 ‘물 속의 푸른 방’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쉽게 실현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여기서 시인은 ‘기다림’의 이미지를 삽입시킨다. 기다림의 이미지는 현실을 뛰어넘어 보다 나은 세계로 가고 싶은 열망의 몸부림의 연장이다.     

 

네 번째 시집 《안 보이는 너의 손바닥 위에》를 관류하는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그’라는 대상을 찾아나서고 있는 ‘나’의 모습일 것이다. 여기서 화자가 기다리는 ‘그’는 실제 인물은 아니며, 우리 곁에 있어도 모를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저만큼 서 있기도 하고 어느새/내 몸을 슬슬 빠져나가거나/다시 내 몸에 들어와/ 한 차례 휘파람을 불기도 하”(〈나는 그와 만난다〉)는 것이다. 그의 시니피에는 이렇듯 나의 안과 밖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확산과 축소를 거듭한다. 존재의 내면과 외부 세계의 경계선상에서 시니피에의 파장을  펼치는 그의 외연은 “못박힌 손으로 말을 건네”(〈요즈음은 서늘해〉)는 절대자의 모습으로 확산된다. 그런가 하면 “스무 해 전의 내 모습”(〈하지만 손을 내밀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아가 흔들림없이 자기 중심을 잡았을 때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랜 흔들림 끝에

중심을 잡기 위하여

그날 저녁 나는 다시

입술 깨물며 돌아왔다

그가 불현듯 나타나

손을 내밀고 있었다

─ 〈그날 저녁 나는〉 부분

 

우리는 결국 ‘그’에 대한 탐색이 외부의 가시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자기 정체성 찾기, 혹은 자기 심화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시인의 말을 빌면, ‘인간보다는 전지전능한 쪽이면서도 신의 위치까지는 이르지 않는 존재’다. 인간적이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로서의 ‘그’를 만나고, ‘나’도 또한 ‘그’와 같은 대열에 설 수 있기를 열망하는, 다분히 종교적이면서 종교의 차원으로까지는 올라가지 않는 지점에서의 초월을 시인은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그’에 대한 탐구는 이전부터 행해지고 있었다. ‘그’에 대한 추구는 《물 속의 푸른 방》에서 시작되어 《안 보이는 손바닥 위에》에서 강도가 강해지며, 《꿈 속의 사닥다리》를 거쳐 《그의 집은 둥글다》에 이르러 본격화되었으며, 《안동시편》은 그 변주에 해당한다고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시적 주제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그’에 대한 탐구는 ‘나’를 찾아 서성거려도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감, ‘너’도 ‘너’일 뿐 깊숙이 끌어안으려 해도 저만큼 평행선으로 달리고 있을 따름이라는 인식과 하나로 만나는 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꿈 속의 사닥다리》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앞 시집들의 시에 나타나는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무화된 꿈을 다시 일으키고 상승의 의지를 다시 표출하는 ‘사닥다리 놓기’의 꿈, 즉 잃어버린 말과 길 찾기에 시적 지향이 놓여 있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면 시인에게 ‘말’ 찾기와 언어의 갱신의지는 ‘꿈의 공간 만들기’라는 시인의 일관된 시적 주제와 맞물려 있다.)  다만 이 지점에서 시인의 꿈이 ‘중심잡기’의 여유를 보이고, 안 보이던 길은 은밀하게 드러나며, 잃었던 말은 차츰 살아나면서 따스함과 부드러움을 농밀히 갖춘 시들로 무르익는다는 점은 지적해 둘 필요가 있겠다. 이것은 이를테면 아래와 같은 시에서 드러난다.

 

물을 마시다가, 물 같은 나를 물이

들이켜고 있다는 생각과 새삼 만난다.

그런 생각을 뒤집어 본다.

너는 아무래도 돌아오지 않고,

(중략)

이젠 겨드랑이마저 가렵지 않고

─ 〈물을 마시다가> 부분

 

세계의 불온성에 대한 시인의 반응은 사물을 뒤집어 보는 여유이다. 그 덤덤한 여유에서 시인은 “겨드랑이마저 가렵지 않”게 세상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시집 《그의 집은 둥글다》에 오면 시인의 보다 맑고 아름다운 꿈의 공간으로서의 마음의 집 짓기로서의 시학이 둥근 원융의 이미지의 풍성한 감각과 결합되면서 깊이를 획득한다. ‘그’에 대한 천착 역시 고양된 삶의 더듬기와 결합되면서 원숙미로서 승화된다. 그것은 우중충한 현실을 초월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의 환희와 자유로움, 훼손되지 않는 본질적인 삶 찾기의 지향으로 드러난다.

 

신과 인간의 중간 지점에서 그는 그윽하게,

먼지 풀풀 나는 여기 이 쳇바퀴에서 나는

침침하게, 눈을 뜬다. 아득하게 느껴지는

그의 집은 둥글다. 하늘과 땅 사이

그의 집 모든 방들은 둥글다.

─ 〈그의 집은 둥글다〉 부분

 

‘그’의 둥근 이미지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흡인력이 ‘나’의 열망과 참으로 싱그럽게 결합되면서 사색의 오솔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시인의 시는 “쳇바퀴” 속에 있는 존재로서의 우리를 객관화할 수 있는 풍요로운 공간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그만큼 우리의 속악하고 권태로운 일상을 뒤집어 ‘그’라는 존재의 근처로 안내하고 있는 것(유성호)이다.   

《안동시편》은 시인의 또다른 성취를 보여 준다. 시집 첫머리에 나타나 있듯이 ‘안동’은 지리적인 공간을 떠나 ‘신화’와 ‘시원’,‘자연’의 자리로서 존재한다. 안동이 거느리고 있는 고적한 정서는 그의 시가 도달한 정신의 현주소이며, 나아가 ‘그’가 거주하는, 혹은 ‘그’가 발현되는 공간이다.  

 

4.

《안동시편》 이후의 시인의 시들은 한결 편안하고 여유로워진 어법 속에서 자연과 완연한 동화를 이루는 자아의 행복한 몽상을 다루고 있다.  

 

나는 조지훈 선생을 닮은 회화나무를 좋아합니다. 회화나무를 닮은 조지훈 선생을 좋아합니다. 회화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조지훈 선생이 떠오르고, 조지훈 선생을 기리면 회화나무가 엄숙하게 걸어와 옷깃을 여미게 합니다.

─ 〈회화나무와 조지훈〉 부분

 

5월호에 발표된 근작이다. 회화나무와 조지훈 선생, 그리고 ‘나’ 사이의 간극이 사라지면서, 사물과 인간, 시간과 공간이 환유적인 체계 속에서 몸을 바꾸고, 더더욱 내 안에서 모든 대상이 무화되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무경계의 길로 들어가는 원숙한 시들이 무르익고 있는 것이다.     

 

없음을 없음으로 보지 않고 없음을 통해 있음의 가치를 창조해 내는 시인의 작업은 분명 이 땅의 시에 깊이를 더해주는 하나의 귀중한 자양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시인이 한결 같이 추구해 온 시적 전략들은 꿈꾸기를 통해 메마른 삶에 물기를 적시고, ‘그곳’을 보게 하며, 사닥다리를 놓는 일이었으며, 그것은 아울러 부황든 언어를 살려놓는 작업과 병행되면서 진행되어 왔다. 언어의 문제는 이 글에서는 좀 소략히 다루었지만, 나는 그 도정을 꿈과 말들이 합쳐져 빚어내는, ‘꿈과 말의 화육으로서의 시’라고 명명하고 싶다. 그런 점에서 시인의 시는 눈과 귀의 기능만을 맹신하는 일상적 삶의 진부함과 상투의 벽 속에서 빛나는 하나의 진주로서 남아 있다.

필자는 넉넉한 포용력과 그윽한 정취로 사물과 인간의 무경계를 열어가는 근작들이 더 빛을 발하기를 바라면서 시인이 자신의 시론에서 적어놓은 한 구절로 글을 맺을까 한다.

 

수묵의 그림에는 사색하는 사람이 길을 가지만, 그 길은 숲에 묻히고 바위 사이로 사라진다. 빼어난 수묵화는 동양인의 고매한 정신을 은밀하게 떠올린다. 이 때 사라진 길은 무경계로 불린다. 사색하는 사람은 그 무경계의 세계를 가고 있으며, 그 세계에 사색하는 사람이 발을 디디면, 그것은 이미 무경계가 아니므로 새롭게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즈음도 여전히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새 꿈을 꾸고 싶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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