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이형기

   

  

 

 거북 하나가 파란 별빛을 받으며

허공 속을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다

 

 

 

글·장경기

 

 

 

소금 개펄을 기어가는 거북

─ 거북은 시인 이형기를 상징화 한 것이다.

 

개펄 위를 한 걸음씩 힘겹게 내딛는 거북이었다.

작열하는 땡빛, 쩍쩍 갈라진 개펄의 등판에는 소금꽃이 피었다. 검붉게 피멍이 든 발은 갈가리 찢기고 갈라졌다. 타들어가는 갈증으로 고개를 쳐들면 까맣게 탄 하늘에 이글거리는 태양. 물도 불도 한줌 먼지로 풀썩거렸다.1)

지평선 저편은 말라버린 바다. 물 한 모금 없는 그곳에서는 절망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거북은 그 지평선을 향해서 어구적 어구적 발을 옮겨 놓았다. 그 누구도 발을 들여 놓지 않은 처녀지에 한 발 한 발 자신의 발자국을 새기고 있다는 기이한 매력 때문인가? 그렇게 얼마나 긴 세월을 왔던가.

갑자기 파리 떼가 잉잉거리며 얼굴에 달라 붙기 시작했다. 고개를 흔들며, 소금기에 절은 눈꺼풀을 힘겹게 올리자, 웬 시신이 한 구 보였다. 벌판을 침대 삼아 드러누운 채 썩어가고 있었다. 흉악한 구더기 떼가 시체로부터, 걸쭉한 액체모양 흘러내리고 있었다.

“보들레르, 보들레르.”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며, 그 썩어 가는 시신, 구더기들을 그윽이 경이로운 눈빛으로 들여다 보고 있는 이는 분명 보들레르였다. 죽음 속에서 탄생을 보고, 탄생 속에서 죽음을 보았던 인간. 모든 이들이 정수의 세계만을 갈 때, 마이너스의 세계로 거슬러 가며 음각화를 새겼다던 그의 깊고 음울한 눈빛이, 자신을 무표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 너머에서는 셰시토프, 셰시토프도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만인 근성을 버려라. 천재는 천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천재는 천재의 천적일 뿐이다.’

그의 뒤로는 고바야시 히데오, 에밀 시오랑이 가파른 소금 탑처럼 버티고 있었다.

‘저들은 어찌하여, 저 소금기뿐인 사막지대에 갈증의 화신이 되어, 나를 알 수 없는 굶주림으로 타들어가게 하는가. 바람이 제 뼈를 갈아서 우주 공간에 흩뿌린 먼지는 왜 하필 별이 되어 밤하늘을 채우고 있는가.’

 

슬픔이여, 애수여, 신기루여, 감미롭던 언어의 숲이여!

 

거북은 그들 옆을 지나 계속해서 지평선 쪽으로 나아갔다. 부르튼 살갗이 찢겨지는 고통에 몸을 비틀면서도, 멈추지는 않았다. 무거워지는 몸, 겨우 한 걸음 내딛는 발, 몽롱하게 가물거리는 눈, 발걸음을 멈추는 순간 죽음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무너지게 하리라.

길게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문득, 뒤를 돌아보자, 역시 등이 쩍쩍 갈라진 벌판만이 땡빛에 타들어 가며 마른 소금 먼지를 날렸다. 그 흰 소금기 위에 난 외줄기 발자국들은 비틀비틀 이어지다가는, 무너져 내린 거친 벼랑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어도 이젠 돌아갈 수도 없으리라.’

거북은 자신이 굳이 자초하여 빠져 나왔던 그 고향 숲을 신기루처럼 떠올렸다. 무성한 수풀들이 드리워 주는 그늘과, 촉촉한 이끼의 감촉이 그리움으로 확 끼쳐 왔다. 청록파, 서정주, 이용악의 숲이 보이기도 했다. 부드러움, 섬세함, 애잔함이 깃들어 있는 선배들의 손길은 꽤나 감미로웠었다. 그때가 17살 때였던가. 《문예》지를 통해서, 유난히 빨리 그 詩魂들의 숲에 깃들일 수 있었다.

그들의 섬세한 배려 속에서 자신만의 숲을 일찌감치 가꾸며 그 언어의 향기에 스스로 도취되기도 했었다.2)

그때만해도 시인들은 아름다운 정원사들이라고 생각했다. 일제시대, 6.25 등의 거친 현실 속에서도 아름다움, 애잔함, 섬세함, 슬픔 같은 것들을 따 모을 수 있는 …….

‘그러나, 그 꽃들은 모두 그게 그것이 아니었던가.

나의 시가 빚어낸 꽃 역시도……. 현실의 무게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청록파>, <귀촉도>. 이용악의 <오랑캐꽃> 등이 갖고 있는 슬픔, 그리움에서 나는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아무리 잘 써야 내가 교본으로 삼았던 청록파 3인, 서정주, 이용악의 울타리에 속에 있는 무리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흐흐흐, 거북은 아찔한 현기증 속에서도, 땡빛을 똑바로 쳐다보며, 시니컬한 웃음을 흘길 수 있었다. 셰시토프, 고바야시, 에밀 시오랑, 보들레르 등의 소금 탑들이 아득히 번득였다.

“모든 것은 철저히 버려졌다. 그 탐스런 숲을 버리고 나온 후로 나는 광야의 미아가 되었다. 그러나 보라. 나는 끝 없는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계속하여 절망을 꿈 꿀 뿐이다. 꿈은 실현되지 않기에 꿈이다. 세계와의 화해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절망을 확인할 때만이 꿈은 꿈으로써 참답게 존재한다.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한다.”

 

파란 인광, 가뭄을 관장하는 귀신의 꿈이여

 

가도 가도, 지평선은 언제나 그만큼 뒤로 물러섰다. 하얗게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함몰시키는 소실점, 거기에서 잔인한 절망은 흐느적이며, 유혹하듯 아득히 아지랑이를 피워내고 있었다. 지나온 발자국들 틈새에는 시집 《적막강산》 , 《돌배개의 시》, 한국문학가 협회상, 문교부 문예상 등이 고꾸라져 있었다. 그 자신의 허물들이었다. 서릿발처럼 돋아난 소금의 결정들은 여전히, 살갗을 후벼왔다. 그 시린 아픔은 오히려, 싸늘한 전율과 희열로 엄습해 왔다.

개펄의 쩍쩍 갈라진 틈새에서 파란 인광 하나가 번득이는 것을 발견했을 때도 그런 순간이었으리라. 쥐약 먹은 쥐를 먹은 것인가? 개는 파란 별빛을 받으며, 몸을 뒤틀고 있었다. 자신을 노려보며, 이를 갈고 있는 그 파란 인광!

“기억하라. 반드시 갚고야 말리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오직 증오만으로 타들어가는 파란 백금 불꽃.”

시퍼런 눈알에 그어지는 붉은 실핏줄, 파란 별빛이 내리는 들판에는 투명한 소금 꽃들이 일제히 돋아나며 번득이고 있었다.

독毒!

그 생명을 앗아가는 칼날의 황홀한 전율. 투명한 극치.

그는 자신의 안, 혈관 속으로 그 독 기운이 뻗쳐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시인이란 자각을 갖게 되었다. 오! 가뭄을 관장하는 귀신의 꿈이여. 내 꿈꾸는 旱魃이여.’

그의 눈은 파란 인광으로 번득였다.

그의 안에서는, 칼날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때가 1975년, 고향의 숲을 떠나 미아로 광야를 방황한지 20여년이 흐른 뒤였다.

마침내 지평선에 도달한 것인가!

 

홀연히 세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홀연히 세상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가슴에 돋은 칼 한 자루 품고, 자객으로, 테러리스트로……3)

지평선 저편, 절망의 지대는 바로, 그가 딛고 있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 즈음 세상은 딱딱한 각질처럼 단단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굳은 채 썩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불사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생명이 없는 것들로 도시를 채우고 있었다.4)

‘모든 어제를 쓰레기의 산더미로 만들면서 내일을 향해서만 달리다가 바로 그 내일이 되면 제 자신이 또한 쓰레기 속에 묻혀 버리는 그것이 우리 시대의 진보 발전이란 종교의 실상이다.’

피라미드처럼 날로 솟아오르는 쓰레기 더미들, 쇠로 된 거대한 무덤들은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공룡으로 변신하여, 고층 빌딩 사이를 어슬렁거렸다.5)

‘문명의 역사란 단 하나의 진실, 곧, 인간이란 존재가 無임을 증명하기 위한 가파른 질주였던가? 이제 다 이룰 때가 된 것인가?’

 

절망의 지대야말로 그의 진정한 무대. 시는 복수의 비수

 

“세계는 낭떠러지에 있다. 아니 인간 생활 자체가 낭떠러지다.”

그는 회생 불가능한 시신이 다 되어버린 문명에 충격기를 들이대고 심장을 다시 뛰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보들레르, 보들레르, 썩은 시체를 그윽이 바라보고 있는 보들레르의 눈빛을 그 순간 떠올린 것은 우연이었던가?6)

 

오늘 이 과수원에도

만발한 사과 꽃들 포플리스로 치장하고 나서서

소싯적 그때처럼 홀려대는 그 소리 기다리고 있건만

벌 한 마리 날아오지 않는다.

아, 활짝 열어만 놓고

아무것도 받아들일 게 없는 그녀들의 자궁

무참한 부끄러움

꽃들이 모두 石女가 되어버린 마을

─ <석녀의 마을>

 

“지구, 우주의 질서, 나아가 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해서 마침내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일종의 공포, 전율을 더하고 싶었다.”

그는 견고하게 굳어져버린, 움직일 줄 모르는, 탄탄하게 짜여진 죽음의 제국 속으로 스며든 테러리스트였다.7)

“현실은 뜯어 고쳐야 한다. 그런 의욕에 있어서는 시인과 혁명가가 뜻을 같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양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혁명가는 제가 뜯어고친 새로운 현실을 지키려고 삼엄한 경비를 배치한다. 그러나 시인은 뜯어고친 그 새로운 현실도 또 뜯어고쳐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시인과 혁명가가 동지가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차이는 이것이다.”

끊임없이 변형하며 변형을 추구해 가는 것이 존재의 본질인 때문이리라.

그러나, 인간은 정착하려하고, 고이려한다. 그리고 썩어간다. 부식되어간다. 말들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채, 다시 틀로 고정되고 만다.

 “그러한 세계의 부조리 속에 내가 살고 있다. 누가 나를 이 세계에 보냈는지 알 수 없다. 굳이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우연일 뿐이다…… 부조리한 세계 속에 부조리하게 태어난 인간의 이 겹치는 고난-여기까지 생각하면 나의 부조리 의식은 절정에 달한다. 이런 부조리를 나는 도저히 그냥 감당할 수 없다. 그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고 또 치욕적인 일이다.”

그의 시는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복수의 비수로 번득이기 시작했다. 절망의 지대야말로 그의 진정한 무대였던 것이다.

처절한 증오로 번득이는 루시의 파란 인광. 의미로 가득 포장되어 있는 현실의 이면을 드러내는 엑스레이8) 복면을 한 자객의 눈초리로 번득이는 첨예한 달. 복면의 삼손, 도광증적인 도착증에 사로잡혀 칼을 간다. 바늘, 毒!

 

다만 증오

그 일점을 향해서만 타는

파란 백금 불꽃

일순 루시는 내 혈관을 뚫고 내닫는다.

번뜩이는 칼날의

그 번뜩임처럼 황홀한 전율

─ <루시의 죽음>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복수에는, 기존의 세계에 대한 철저한 절망이 욕망의 에너지이다. 절망이라는 에너지가 바닥이 날 때, 부조리의 세계가 희망이라는 외양을 걸치고 나타나 복수보다 타협의 손을 내밀기 때문이다.”

 

황량한 사격장에서 그는 언제나 알몸으로 서 있다.

더 이상은 보여줄 게 없는 전부, 그의 맨가슴

여기다 여기 동그랗게 표를 해놓은 심장은 바로 여기 있다.

…중략…

깨끗한 명중, 온갖 고통이 선혈로 꽃피는 그 완벽한 허무의 순간

─ <과  녁>

 

그 순간은 스스로를 연소시키고 자아를 파괴함으로써 얻어지는 투명한 파멸감과 격정적 전율미였다.

 

허무. 다시 소금 벌판의 한 가운데를 기어가는 거북

 

그렇게, <꿈꾸는 旱魃>을 지나 80년대, <풍선심장>, <보물섬의 地圖> 속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그는 살얼음진 문명의 등판을 거슬러, 저 마이너스의 지대 속으로 힘겨운 걸음을 지속했다. 치열했던 광기의 살해 충동  등은 어느덧 저 밑으로 침전되었다. 그가 파악한 세계의 허망감과 절망감은 곧 자신의 자화상이요, 이미 그 자신이 절망 그 자체가 되어버린 때문이리라.

그는 저만치 네온사인들이 검은 매연 속에서 흔들리듯 불꽃으로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낮게 내려앉은 하늘에서 싸락눈이 연신 불꽃을 향해서 꽂히며 자결하고 있었다.

불꽃 속의 싸락눈! 그 끝 없는 허무와 권태의 행위를… 모든 것은 아름다운 소멸의 연속일 뿐이었다.9)

결국 이것이었던가!

존재한다는 것은?

제 스스로가 무덤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리도 가쁘게 질주해왔던 것인가? 결국 인생은 덧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화려한 낭비였던가?

그는 가슴에 돋은 칼을, 흰 달을 향해 겨누었다. 그러나……

 

거북 하나가 파란 별빛을 받으며 허공 속을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다

 

항복한 자는

두 손을 번쩍 위로 치켜든다.

그리하여 뜻밖에도

하늘을 저 혼자 차지해버린다.

─ <항복에 대하여>

 

그는 어느덧 자신이 광막한 우주 속을 홀로 떠돌고 있음을 발견했다.

혼자만의 고독한 더듬이로 블랙홀을 찾아가는 자유가 그의 몫인 것이다.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른다…중략…제목만 무슨 주문처럼 살아 있는 옛날 영화 <백색의 공포>

─ <자화상>

 

완전한 자유. 어떤 궤적으로부터도 해방되는 비상. 무한 속에 던져진 미아의 방황. 그 마지막 당도한 세계는 다시 허무였다.

 

진짜 모비딕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이렇게 만사를 허옇게 다 지워버리는, 그리하여 공백으로 완성시키는 끔찍한 정채를 드러낸다.

─ <모비딕>

 

허무의 세계에서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일이란 절망을 확인하는 일 뿐이다.10)

“존재는 모두 티끌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슬픔을 값진 보석처럼 노래하는 인간도 있다. 그는 시인이다.

시인은 영구 혁명주의자다. 영구 혁명주의자는 물론 제가 이룩한 혁명을 뒤엎고 또 새로운 혁명을 꿈꾼다. 그렇게 제 자신을 끊임없이 뒤엎기 위한 그 혁명의 다른 이름은 허무다. 시나 영구 혁명이나 허무나, 아, 모두가 한통속이구나.”

지금도 거북 하나가 파란 별빛을 받으며, 우주의 허공 속을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다.

 

이선생의 근황은?

 작년부터 이어진 긴 투병인 셈이다. 보다 첨예한 경지로 들어서는 계단이리라.

“세계 전환을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전환기에 자칫 오기 쉬운 느슨함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이제까지 견지해 왔던, 긴장을 팽팽하게 지속해야 겠다는 생각이다.

어떤 고비를 겪어도, ‘다 깨달았느니라.’ 하는 식으로는 못하겠다. 나는 깨닫지 못한 자로서, 병들어 아픔을 겪으면서 체험하는 세계를, 긴장감을 가지고 표현해 갈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세계를 열어 갈 것인가는 탐색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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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 어느새 예까지 왔노라.

가뭄이 든 랑겔한스 섬

거북 한 마리 엉금엉금 기는

갈라진 등판의 소금 꽃.

 

속을 리 없도다.

실은 만리장성으로 끌려가는

어느 짐꾼의 어깨에 허옇게

허옇게 번진 마른 버짐이니라.

 

오 박토여.

반쯤 피다 말고 시들어버린 메밀 농사와

쭉쭉 골이 패인

내 손톱 밑의 반달의 枯死여.

 

가면 가는 그만큼

길은 뒤에서 허물어지나니

한 걸음 뗄 때마다 낭떠러지 하나씩 거느리고

예까지 온 길 랑겔한스 섬,

 

꿈꾸는도다 까맣게 탄 하늘.

물도 불도 그 아래선

한줌 먼지 되어 풀석거리는 승천의 꿈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이니라.

─ <랑겔한스 섬의 가문 날의 꿈>

 

2)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낙  화>

 

3) 우리의 번영은 하늘을 찌른다.

 

모든 성좌

모든 천체를 사정없이 덮치는

우주공간의 마라푼다-

우리는 하늘마저 약탈해 버린다.

 

일상의 때가 낀

티눈만도 못한 육안은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일편의 유리 조각과

그 위에 달라붙은 한 점 얼룩을 볼 뿐이다.

 

가장 냉정한 제삼자

현미경이여 네가 말하라

밤내 폭죽이 터지는 우리의 축제

광란의 증식

그 홀연한 성운의 탄생을…

 

우리에겐 아무런 제약이 없다.

폭탄처럼 자유롭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방지축

정체불명이다.

그렇다, 우리의 그 정체불명의 침략성

 

그러나 보라

평화는 오직 우리의 것이다.

막강한 軍旗가

銘旌보다도 화려하게 나부끼는 우리의 점령지

그곳은 너의 안식을 보장한다.

─ <암세포>

4) 이 도시의 시민들은 아무도 죽지 않는다

어제 분명히 죽었는데도

오늘은 또 거뜬히 살아나서

조간을 펼쳐든 스트랄드브라그 씨의 아침 식탁

그것은 위대한 생명공학의 승리

인공합성의 디엔에이 주사 한 대가

시민들의 영생불사를 확실하게 보장하고 있다

교통사고로 머리가 깨어진 채

오토바이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대는 젊은 폭주족

온 몸에 암세포가 퍼져서

수술한 배를 그냥 덮어버린 노인이

내기 장기를 두다가 싸운다

아무도 죽지 않기 때문에

장사를 망치고 죽을 지경인 장의사 주인도

죽지 않고 살아서 계속 파리를 날린다

1년에 한 살씩 나이를 먹는다는 계산은

전설이 되어버린 도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누구도 제 나이를 아는 사람이 없다

젊어도 늙고

늙어도 늙고

태어날 때부터 이미 폭삭 늙어서

온통 노욕과 고집불통만 칡넝쿨처럼 칭칭

무성하게 뻗어난 도시

실연한 백발의 노처녀가 드디어 목을 맨다

그러나 결코 죽을 수는 없는

차가운 디엔에이의 위력

스스로 개발한 첨단의 생명공학이

죽음에의 길마저 차단해버린 문명의 막바지에서

시민들의 소망은 하나 밖에 없다

아 죽고 싶다

 

쪵 스트랄드브라그는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영생 불사하는 종족의 이름이다

─ <죽지 않는 도시>

 

5) 대량 생산 대량 소비로 흥청대는

행복한 시민들은 버리는 것도 많다.

먹고 버리고 쓰고 버리고

또는 먹지도 쓰지도 않고 그냥 버리는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의 거대한 산더미에 깔려서

폐기장은 배가 터져 죽었다

그래도 또 쌓이는 쓰레기 쓰레기

도시의 외곽에는 이제 빈 터가 없다.

어느 날 문득 둘러보니

도시는 이미 완전히 포위 되어 있었다.

한발 한발 거리를 좁혀오는 막강 쓰레기 군단.

함부로 버려진 그날의 원한을

쓰레기는 잊은 적이 없다.

냉혹한 복수의 찬 피, 무표정

고도 문명 시대의 메갈로폴리스에 되살아 난

보라 저 공룡의 무리들!

자칭 호모사피엔스는 그 앞에서

벌거벗고 떨고 있다.

떨고만 있다.    ─ <메갈로폴리스의 공룡들>

6) 꽃다운 도시 파리를

당신은 하루아침에 우울로 가득 채웠다

그로부터 일백 오십 년 동안

세계는 장마전선에 짓눌리고 있다

날씨는 언제나 진종일 흐리고 때때로 비

어느 날 그 하늘에서

항해하는 배의 갑판에 떨어진 알바트로스 한 마리

커다란 날개가 도리어 짐이 되어 뒤뚱거린다

그러나 고통이라는 영약의 힘으로

다시 일어선 당신에게는

천 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추억이 있다

 

상처요 동시에 칼

사형수요 동시에 사형집행인

복수의 여신이 제 모습을 비추는

그 불길한 거울 앞에서는

당신을 배반한 위선의 독자만이

당신의 친구였다 이중인(二重人)이여!

 

꿈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있다

태어날 때부터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 뉘우침을 안고

심연으로 몸을 던진 당신은

절망을 확인하는 자멸의 불꽃

또는 권태의 하품을 내뿜는다.

 

당신의 적이었던 시계는 이제 멈추었다

오늘은 몽파르나스의 공동묘지에서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자신의 주검을 내려다 보고 있는 당신

싸늘하게 깨어 있는 그 눈동자 속에

지구를 삼키는 세기말의 어둠이 깊다

─ <보들레르>

7) 암살은 틀림없이 감행되었다.

물증보다도 확실한 심증

심증보다도 더욱 확실한 것은

저 상현의 달이다.

 

자객이 누구냐고 묻는가

피살자가 누구냐고 묻는가

보라 저기 저 고산 만년설에 꽂혀 있는

한 자루 비수

대답은 이미 소용없는 시간이다.

 

눈물은 과거의 인류가 모두 흘리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다만 이 첨예한 겨울 나의 노래

소리없는 외마디 소리의 스타카토

 

드디어 밤은 절명한다.

그렇다 밤은

죽지 않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

往生하라 死者

너를 축복하는 一片의 이미지

자객의 눈초리는 복면 속에서 빛나고 있다.

─ <첨예한 달>

 

8) 長安有男兒

二十心己朽

───李賀

 

폐허의 풍경을 잡은

이 사진은 앵글이 기막히다.

뼈대만 남은 고층건물

앙상한 늑골 새로

죽어서 납덩이가 된 도시를 보여준다.

그 배경

曇天을 가로질러 모여든

까마귀 한 떼

무엇인가를 파먹고 있다.

사람의 가슴이

가슴 속에 흐르는 피가 붉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터지는 검은 먹물

그리고 폐허는 질척거린다.

내일이면 함몰

다시 내일이면 늪이 될 폐허

수수께끼의 광선 엑스레이는

이처럼 오직 사실만을 증명한다.    

─ <엑스레이 사진>

 

9) 그해 겨울의 눈은

언제나 한밤 중 바다에 내렸다

 

희뿌옇게 한밤 중 어둠을 밝히듯

죽은 여름의 반딧벌레들이 일제히

싸늘한 불빛으로 어지럽게 흩날렸다

 

눈송이는 바다에 녹지 않았다

녹기 전에 또 다른 송이가 떨어졌다

사라짐과 나타남

나타남과 사라짐이 함께 돌아가는

무성 영화 시대의 환상의 필름

 

덧 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드라마

클라이막스 밖에 없는 화면들이

관객 없는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 한밤 중 바다에 내린

그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 화려한 낭비였다

─ <그해 겨울의 눈>

 

10) 빈 들판이다

들판 가운데 길이 나 있다

가물가물 한 가닥

누군가 혼자 가고 있다

아 소실점!

어느새 길도 그도 없다

없는 그 저쪽은 낭떠러지

신의 함정

그리고 더 이상은 아무도 모르는

길이 나 있다 빈 들판에

 

그래도 또 누군가 가고 있다

역시 혼자다    ─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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