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오규원
모래는
하나이고
장경기
일찍이 말이 있어, 세상을 낳았다. 꽤 우유부단한 편에 속하는 ‘죽음’은 그날도 버스를 타러 가다가 걷기가 귀찮다고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잔 하고 한잔 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잔 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1)
‘죽음’이 이렇듯 현대아파트 1169호에서 티브이를 켜놓고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달’은 ‘죽음’의 거실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검은 산 위를 거닐고 있었다.
달이 나무 잎사귀를 툭툭 치며 간다 달이 빈 가지에 걸터 앉아 몸을 흔들다가 간다 아무도 잠깨어 마주 오지 않는다 무덤 위에 앉아 담배 한 대 피우며 空山의 물소리 속에 모래들만 몸 푸는 아득한 소리를 듣는다 팔짱을 끼고 산길에 버티어 서서 사라지고 없는 산의 길을 불러모은다 높은 곳에서 불러도 깊은 길만 오는구나 부르는 소리에 송장메뚜기가 풀 속으로 숨고 기댈 곳 없는 풀이 달 속에 누울 때 空山의 달은 잠깨지 않는 길을 혼자 간다 터벅터벅 간다 잎을 치며 간다 가지를 흔들며 간다 나무들은 잠속에서 발소리를 듣는다 잠깨라 잠깨라 하는 空山 깊은 계곡의 물소리2)
‘죽음’과 ‘달’의 이런 행각은 ‘언어들’이 곧 백성인 나라의 한 풍속도인 셈이었다. ‘언어들’이 백성인 나라! ‘언어들’이 대를 이어가며 나름대로의 삶을 꾸려가는 나라. “抽象의 나뭇가지에 살고 있는 言語들 중의 몇몇은 위험한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다 떨어져 죽고, 고장난 수도꼭지에서도 뚜욱 뚜욱 言語들이 죽는다. 건강한 言語의 아이들은 어미의 둥지에서 알을 까고, 고요한 幻想의 出張所 뜰에 새가 되어 내려와 쉰다. 의식의 고장난 수도꼭지에서 쉰다.”3)동화 속처럼 신비로운 이 나라의 온갖 것들은 바로 언어들이 낳고 빚어낸 것이었다. 바람이라 말하니, 바람이 불어왔고, 책상이라 말하니, 책상이 있게 되었고, 사람이라 말하니 사람이 있게 되었고, 돌이라 말하니 돌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을 위해서 언어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언어를 위해서 세상이 생겨나고 존재하는 나라인 셈이었다. 백성인 ‘언어들’의 자유분망함에 걸맞게 王 또한 관대한 분이었다.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 집 개의 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 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다. 자 봐라, 꽃피고 싶은 놈 꽃피고, 잎 달고 싶은 놈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랭이고 싶은 놈은 아지랭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던가. 내 말이 옳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4) 그러나, 이렇듯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삶을 꾸려나가던 ‘언어들’에게 비극은 서서히 엄습해 왔다. 최초의 발단은 온갖 말을 낳고 빚어내던 王이 드디어 ‘법’이라는 말까지 낳았던 때부터였으리라. 언제인가부터 범람하던 ‘법’들은 다시 수없이 많은 ‘법’을 낳았으며, 이제까지 자유분망하기만 했던 언어들에게 제복을 입히고, 언어의 절도, 언어의 규율 등을 만들었다. 언어들은 격식에 따라서 행위를 하게 되었고, 법에 절대 순종할 것을 강요받았다. ‘죽음’은 더 이상 버스를 타거나 티브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달’은 더이상 밤 거리를 배회하며 담배를 피우거나 하는 행위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언어의 법에 순종하지 않는 언어들은 언어로조차 인정받지 못하게 되자, 많은 ‘언어’들이 사물 속으로 깊숙이 숨어들거나, 혹은 시들시들 신경쇠약으로 말라 죽기도 했다. 王이 낳았던 그 투명하고 싱싱하며 자유분망했던 말들은 마침내 세상 어디에도 보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로도 여전히 바람이 王의 뺨을 부벼왔으나, 바람의 속삭임을 들을 수 없었고, 돌의 말을, 새의 말, 꽃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철면피와 같은 낯설음을 겹겹이 두른 사물, 혹은 현상들 속에, 王은 외로된 존재로 남아 있어야 했던 것이다.
말해보라. 무엇으로 장미와 닿을 수 있는가를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여전히 지상에 생존해 있는 언어들, 곧 제복을 입고 법에 순종하는 규격화된 ‘언어들’은 사물의, 혹은 현상의 충실한 시녀가 되어 갔다. 더이상, ‘언어가 사물을 혹은 현상을 낳는다. 세상을 낳는다’는 표현은 있을 수 없었다. 오히려 ‘언어가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며, 사물이 혹은 현상이 언어를 낳는다’는 표현이 당연시 되었다. 어느덧 이 세상에서 낯선 이방인이나 다름없이 되어버린 王은, 한때 주변의 온갖 것들과, 언어를 통해서 온전히 교감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며 장미를 지그시 들여다 보았다.
“개봉동 入口의 길은 한 송이 薔薇 때문에 왼쪽으로 굽고,굽은 길 어디에선가 빠져나와 薔薇는 길을 제 혼자 가게 하고 아직 흔들리는 가지 그대로 길 밖에 선다.
보라 가끔 몸을 흔들며 잎들이 제 마음대로 시간의 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薔薇는 이곳 주민이 아니어서 시간 밖의 서울의 일부이고,그대와 나는 四寸들 얘기 속의 한 토막으로 비 오는 地上의 어느 발자국에나 고인다.
말해 보라 무엇으로 薔薇와 닿을 수 있는가를. 저 불편한 의문, 저 불편한 비밀의 꽃 薔薇와 닿을 수 없을 때,두드려 보라 개봉동 집들의 문은 어느 곳이나 열리지 않는다.5)
의문의, 비밀의 꽃이 되어버린 薔薇. 무엇으로 薔薇와 다시 닿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물음을 화두로 삼은 王은 결국 詩人이 되었다. 시 <겨울나그네>로 시인 김현승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얼굴을 내민 때가 65년의 일, 71년도에는 《분명한 사건》이라는 첫시집을 내기도 했다. 이렇듯 시인이 된 王은 사물들과의 교감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해 나갔다. 그것은 곧 한때 자신의 백성이었던 ‘잃어버린 언어들’을 찾는 길이기도 했으며, 자연스럽게 현재의 외로움에서 풀려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사물이라든지 관념이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보면 잘 보이지가 않아요. 그럴 경우에는 뒤집어 보거나 비틀어 보거나 까발려 보거나, 어떤 형태로건 낯설게 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고정되어 있는 관념, 사물, 이런 모든 것들을 제 나름대로 보기 위해서는 시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언어적인 방법을 동원해 보는 겁니다. 사물의 불투명성을 파헤치는 방법으로는 이 방법도 저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6) 왕은 ‘언어들’이 백성이었던, 언어들이 사물과 현상들의 주인이었던 세상의 풍경을 그려봄으로써, 사물들과의 교감의 길을 모색해보기도 했다. “안경 밖으로 뿌리를 죽죽 뻗어나간 나무들이 西山에서 한쪽 다리를 헛짚고 넘어진 노을 속에 허둥거리고 있다. 키가 큰 산오리나무의 두 귀가 불타고 있다. 시간의 둔탁한 大門을 소란스럽게 열고 들어선 밤이, 으스름과 부딪쳐 기둥을 끌어안고, 누우런 밀밭을 밟고 온 그 밤의 신발 밑에서 향긋한 보리 냄새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골목에서 작년과 재작년의 죽음이 서로 다른 표정으로 만나고 그해 죽은 사람의 헛기침 소리 하나가 느닷없이 행인의 뒷덜미를 후려치고 간다.”7)그러나, 사물 혹은 현상들과의 잃어버린 교감을 회복하려는, 이러한 여러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파고드는 것은 오히려 절망감 같은 것임을 부인할 수 없었다. 王은 스스로에게 되뇌이듯 말했다.
“나를 확신하기 위하여 나의 말을 믿는다. 모든 것을 확신하기 위하여 나는 말을 믿는다.
확신의 그늘에서 우는 풀벌레 확신의 울안에서 서성이는 소 확신과 확신 사이로 내리는 어둠 꿈꾸지 않고 나는 꿈꾸는 대신 꿈을 씹는다.
나의 말이 지금 이 순간까지 한 번도 확실하게 나의 형체를 드러내지 못했고 미래까지 이 순간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나의 믿음은 내가 믿음으로 믿음, 허위의 믿음이라도 믿음으로 믿음이다.
꽃을, 꿈을, 한국을, 인간을 하나의 명사로 믿을 때, 꽃도 꿈도 한국도, 물론 인간인 그대도 행복하다.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믿으라. 이 말은 예수의 말이 아니므로 믿으라.”8) 하지만 이러한 외침조차, 언어에 대한 신뢰가 없어지는 자신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것임을 그 자신 깊게 절감해야 했다. 王이 교감의 방법으로 택한 詩는 한결같이 장미에, 사물에 닿도록 하기는 커녕, 오히려 멀어지게만 하였던 것이다.
언어. 그것은 음흉함이 드러나는 의미의 迷妄, 무의미한 純潔의 몸뚱이왜! 그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언어들’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 원인을 찾기 위한 한 방법으로 ‘언어들’의 실상을 탐색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마주친 ‘언어들’은 대부분, 바로 이 시대의 자본주의적 질서 안에서 도구화, 사물화되어버린 것들이었다.
1. <양쪽 모서리를 함께 눌러주세요>
나는 극좌와 극우의 양쪽 모서리를 함께 꾸욱 누른다 2. 따르는 곳 쭾
극좌와 극우의 흰 고름이 쭈르르 쏟아진다9)
지금은 말의 순결성이 훼손된 시대임을 왕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그 실천에 앞장서고 있는 기만적인 언어들, 처참할 정도로 함부로 부림을 받는 언어들을 보아야 했던 것이다. “젊은 여자를 강간하고 국부를 담뱃불로 지지며 배 밑에 대검을 꽂아놓고, 발가벗긴 여자에게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육체에 깃든다며 팔굽혀펴기를 시키며, 즐거워한 그때처럼 손자에게 같은 말로, 운동을 가르치고 있다 라즐로氏”10)언어들이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의 잔인한 폭력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는 실상이리라. ‘도구화되어 있거나 상품화된 언어들, 이런 언어들이야말로 능욕당하고 있는 언어들이 아닌가.’한때 ‘언어들이 백성인 나라’의 王이었던 그에게, 이러한 언어들의 풍경은 참담한 것이었다.
“우리들 陰毛만큼이나 어둡고 따스한 곳에 송수관을 묻고 우리가 사는 이 대지의 수도꼭지인 나무들 내장의 고름을 가을이라는 핑계로 마음놓고 누렇게 지는 잎의 형상으로 뱉어내는구나 南北이 일시에 뱉어내니 누런 고름의 통일이다.”11)
도구화, 사물화되어버린 언어들에서 그는 불길한 죽음의 징후를 보았다. 말의 순결성 자체가 허위의식으로 작용하는 시대, 말의 진실이 교란당하는 시대, 그것은 곧 언어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純粹詩! 純粹詩라고 일컬어지는 것에서 오히려 그는 음흉한 음모 같은 것을 보아야 했다. 이 언어가 타락한 시대에 타락한 언어로 순결을 꿈꾼다는 것이 모순으로 불순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世上에는 사랑스런 自由가 참 많습니다. 당신도 혹 自由를 사랑하신다면 좀 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밖에는 비가 옵니다. 이 시대의 純粹詩가 음흉하게 不純해지듯 우리의 장난, 우리의 언어가 음흉하게 不純해지듯 저 음흉함이 드러나는 의미의 迷妄, 무의미한 純潔의 몸뚱이, 비의 몸뚱이들…… 조심하시기를 무식하지도 못한 저 수많은 純潔의 몸뚱이들.”12)
자유라는 말이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니듯, 순수시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순수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 시대가 낳은 불순한 자식들이었던 것이다. 왕은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詩에는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 낡은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詩에는 아무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生밖에. 믿고 싶어 못 버리는 사람들의 무슨 근사한 이야기의 幻想밖에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意志와 理想 속에 자라며 흔들리듯 그대의 사랑도 믿음도 나의 詐欺도 詐欺의 확실함도, 확실한 그만큼 확실하지 않고, 근사한 풀밭에는 잡초가 자란다.”13)詩, 그것이 말하는 진실이라는 것은 믿고 싶어 못 버리는 믿음에의 욕망 때문에 겨우 존재하는 근사한 환상 같은 것이었다. 말의 논리와 질서란 자본 또는 상품, 자본화된 나와 너의 유통경로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두 번째 시집 《巡禮》(73)는 바로 이러한 언어와의 불화, 세계와의 불화를 드러내려는 아픈 족적인 셈이었다. 그리고 《王子가 아닌 한 아이에게》(78),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81) 또한 언어에 겹겹이 씌워진 철면피의 관념과 현실에 대한 집요한 해체와 재조명을 시도했던 과정의 산물이리라.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진리란, 하고 누가 점잖게 말한다 믿음이란, 하고 또 누가 점잖게 말한다 진리가, 믿음이 그렇게 점잖게 말해질 수 있다면 아, 나는 하품을 하겠다 世上엔 어차피 별일 없을 테니까
16세기나 17세기 또는 그런 세기에 내가 살았다면 나는 그 말에 얼마나 감동했을 것인가
淸進洞도, 그래 밤 사이 안녕하구나 안녕한 건 안녕하지만 아무래도 이 안녕은 냄새가 이상하고나는 나의 옷이 무겁다 나는 나의 옷에 묻은 먼지까지 무게를 느낀다. 점잖게 말하는 점잖은 사람이 입 속의 냄새와 아침마다 하는 양치질의 무게와 양치질한 치약의 양의 무게까지 무게를 느낀다
이 무게는 안녕의 무게이다 그리고 이 무게는 안녕이 독점한 시간의 무게 미래가 이 地上에 있었다면 미래 또한 어느 친구가 독점했을 것을 이 무게는 미래가 이 地上에 없음을 말하는 무게 그러니까 이건 괜찮은 일-- 어차피 이곳에 없으니 내가 또는 당신이 미래인들 모두 모순이 아니다
그대 잠깐 발을 멈추고, 그대 잠깐 사전을 찾아보라 保守主義란 현상을 그대로 보전하여 지키려는 主義 그대 잠깐 발을 멈추고, 그대 잠깐 사전을 찾아보라 아침의 무덤이 무슨 말 속에 누워 있는지 말이 되든 안 되든 노래가 되든 안 되든 중요한 것은 진리라든지 믿음이라는 말의 옷을 벗기는 일 벗긴 옷까지 다시 벗기는 일 나는 나의 믿음이 무겁다 정말이다 우리는 아직도 敗北를 승리로 굳게 읽는 방법을믿음이라 부른다 왜 敗北를 敗北로 읽으면 안 되는지 누가 나에게 이야기 좀 해주었으면 그 믿음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여,나에게 화를 내시라 불쌍한 내가 혹 당신을 위로하게 될 터이니까14)
한때 ‘언어들’의 王이었던 그가 현실 속에서 제 본 모습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언어들에 대해서 한탄하듯 참담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믿음’이니 ‘진리’니 하는 말들조차, 그 본래와는 전혀 다른 몰골로,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흔해빠진 장식품처럼 나딩굴고 있는 실상이, 차라리 분노로 떨게 했던 것이다. 현실 속에서 패잔병처럼 비굴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위선의 모습으로, 사물들에 기생해서 목숨을 연명해가고 있는 ‘언어들’을 그는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언어에 대한 깊은 불신감과 배신감이 엄습해왔다. “개울가에서 한 여자가 피 묻은 자신의 옷을 헹구고 있다. 물살에 더운 바람이 겹겹 낀다. 옷을 다 헹구고 난 여자가 이번에는 두 손으로 물을 가르며 달의 물떼를 벗긴다. 몸을 씻긴다.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그 손으로 돼지 죽을 쑤고 장독 뚜껑을 연다. 손가락을 쪽쪽 빨며 장맛을 보고 이불 밑으로 들어가서는 사내의 그것을 만진다. 그 손은, 그렇다 - 언어이리라.”15)그는 어느덧 현실 속의 언어에 대한 애증의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이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손처럼 갖가지 노릇을 다해낼 수 있는 언어이기에, 자신의 모습을 일신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제 안에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그는 이런 언어에 대한 마지막 신뢰를 붙들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언어의 패배, 패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해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실천책으로 택한 것이 바로 ‘말의 옷을 벗기는 일’이었던 것이다. 말의 순결성을 위장한 껍질들을 끊임없이 벗겨내는 작업 혹은 과정을 통해 그 순결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시작된 것이었다. 언어의 관념성과 도구성을 부단히 지워나가면서 언어의 순결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광고의 비유적 수사와 감각적 이미지들이 교묘하게 우리의 욕망을 조정하고 있음을 파해치는 작업도 그 중에 하나였다.
여자가 간다 비유는 낡아도 낡을 수 없는 生처럼 원피스를 입고 여자가 간다 옷 사이로 간다 밑에도 입고 TV 광고에 나오는 논노가 간다 가고 난 자리는 한 物物이 지워지고 혼자 남은 땅이 온몸으로 부푼다 뱅뱅이 간다 뿅뿅이 간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르는 땅을 제자리로 내리며 길표양말이 간다 아랫도리가 아랫도리가 같이 간다 윗도리가 흔들 간다 차가 식식대며 간다 빈혈성 오후가 말갛게 깔리고 여자가 간다 그 사이를 헤집고 원피스를 입고 낡은 비유처럼16)
모래는 하나이고 관념은 너무 많다. 그런데, 말의 옷을 벗겨내고 언어의 순결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가 정면으로 부딪쳐야 했던 문제는 바로,- 그가 일찍부터 회의를 가져왔던- 전통시 자체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한계였다. “노래가 끝나고 난 뒤에는 노래를 따라나온 한자락 따스한 마음이 이 地上의 기온을 데운다. 우리의 노래는 언제나 노래로 끝나지 못하고 노래가 끝난 다음의 무거운 침묵의 그림자가 된다. 그것이 노래의 사랑, 노래의 죽음이다.”17)노래와 시를 비교해 본 것이리라. ‘노래는 일종의 주술과도 같아서 심리적인 치유로서의 기능을 해왔다. 그러나 ‘우리의 노래’인 詩는 끝남도 분명치 못하고, 끝난 다음에는 무서운 침묵의 그림자로 남을 뿐인 것이었다. 이러한 詩는 곧 노래의 죽음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의 시는 노래와 산문의 중간에서 헤매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소리인 셈이었다.’“전통적인 서정시를 가지고 자본주의라는 이 거대한 체제와 싸우기는 너무 힘든 것이다. 현실세계는 산문의 세계다. 노래가 갖는 확실한 교감 대신, 끊임없이 묘사해도 설명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불통의 세계인 것이다.”“시는 추상的이니 구상的은 오해 마라. 시인은 病身이니 안病身은 오해 마라. 지금 한국은 散文이다. 정치도 散文 사회도 散文 시인도 散文이다. 散文的이기 위한 전쟁시대, 시인들이 전쟁터로 끌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끌려가는 시인의 빛나는 制服, 끌려가지 못하는 病身들만 남아 制服도 없이 아, 시를 쓴다.”18)그는 이렇듯 시의 산문화에 대해서 깊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현실세계와 확실히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실마리를 산문에서 발견한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이제까지의 전통시가 주로 취해왔던 유사성의 은유양식에서, 산문에 우세한 인접성의 환유양식으로 관심이 옮겨갔다.
환유양식! 그의 시세계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는 환유양식이란 무엇을 말하는가?“은유란 A=B라는 식의 의미 정하기, 즉 끝없는 대체 관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의미적 정황으로서의 현상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여기에서의 현상이 의미 정하기(은유)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의미하기는 하되 무엇무엇이라고 한정적으로 정하지 않아서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의미’라는 것에 주목하게 되었지요.”바로 이런 인식의 산물인 시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을 보면, ‘환유양식’이라는 말의 실체에 좀더 다가설 수 있으리라.
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는 플라타너스가 쉰일곱 그루, 빌딩의 창문이 칠백열아홉, 여관이 넷, 여인숙이 둘, 햇빛에는 모두 반짝입니다.19) ‘시에는 사실적 정황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 시인의 주관이 개입됨이 없이 반소설의 카메라 시점에 의해 냉담한 어조로 도시공간을 공간이동에 따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시의 한 가능성으로서 이런 환유시는 비유기적인 개방형식이다. 이것은 해체시에서 시도되었듯이 시간적 공간적 인접성도, 인과관계의 논리적 인접성도 없이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시적 자아의 통제 없이 자유롭게 병치되는 무매개시다. 인접성의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가장 자유로운 연상형식인 것이다. 이것은 우연에 종속된 순간의 경험들, 삶의 파편들을 환기하는 데 상응하는 본질적인 양식이다. 인접성의 혼란으로서 환유는 총체적 담론이 붕괴된, 그래서 모든 것이 부분적으로밖에는 결정되지 않는다는 국부주의적 세계관의 산물이며 혼돈, 무질서, 삶의 무의미가 바로 우리 삶의 리얼리티임을 시사한다.’그는 환유를 사실주의적 지향성과 인식의 틀로서 수용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강변의 간이주점 근처에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주점 근처에는 사람들이 서서 각각 있었다. 한 사내의 머리로 해가 지고 있었다. 두 손으로 가방을 움켜쥔 여학생이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젊은 남녀 한 쌍이 지는 해를 손을 잡고 보고 있었다. 주점의 뒷문으로도 지는 해가 보였다 한 사내가 지는 해를 보다가 무엇이라고 중얼거렸다 가방을 고쳐쥐며 여학생이 몸을 한 번 비틀었다 젊은 남녀가 잠깐 서로 쳐다보며 아득하게 웃었다 나는 옷 밖으로 쑥 나와 있는 내 목덜미를 만졌다 한 사내가 좌측에서 주춤주춤 시야 밖으로 나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20)
무엇보다 그의 이런 <현상주의>는 김춘수의 무의미시론처럼 철저한 관념의 거부였다. 관념은 존재를 훼손시키고 실종시키기 때문이다. “실존의 문제를 그 바닥으로부터 다시 생각해 보는 사람들은, 언어라는, 이 피할 수 없는, 이 미끈거리는 존재와 부닥친다. 인간이 세계를 의미화하고 조직화하는 존재가 언어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명명하는 것이, 즉 定하는 것이 세계를 끊임없이 개념화시키는 것이라면, 명명하는 사고의 근본인 은유적 사고의 축을 버리고, 그리고 그 언어도 이차적으로 두고, 세계를 그 세계의 현상으로 파악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라는 것이 지금의 나, 나의 세계이다.”일곱번 째로 발표한 시집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95)는 이렇듯 현상적 의미를 재발견하려는 가열찬 노력의 발자취였다.
내 시는 투명한 현상을 나타내는 정황의 세계입니다. 환유에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물론 은유 중심의 시 전통에 대한 반성이고 도전이다. 그러나 이 도전은 결코 은유의 폐기는 아니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온 환유의 재발견이며 환유를 은유에 등가적인 지위로 끌어올리는 작업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지금까지도 누군가가 정해준 의미가 없으면 눈 앞의 세계까지도 전혀 볼 수 없는 형편인 것입니다. 내 시는 이러한 투명한 현상을 나타내는 정황의 세계이지요. 모든 존재는 존재의 현상으로 스스로 말하지요. 그 스스로 말하는 것을 관념이나 사변으로 왜곡하지 않고 옮겨놓을수록 진실에 접근한다고 보아야지요.”관념을 거부하는 현상주의!
뜰 앞의 잣나무가 밝은 쪽에서 어두운 쪽으로 비에 젖는다서쪽 강변의 아카시아가 강에서 채전 방향으로 비에 젖는다아카시아 뒤의 은사시나무는 앞은 아카시아가 가져가 없어지고 옆구리로 비에 젖는다뜰 밖 언덕에 한 그루 남은 달맞이가 꽃에서 잎으로 비에 젖는다젖을 일이 없는 강의 물소리가 비의 줄기와 줄기 사이에 가득 찬다21) “현상은 굳어 있는 개념도 아니며, 추상적인 관념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살아 있는 의미망─즉, 날(生) 이미지가 아닌가”날(生) 이미지! 결국 ‘날 이미지’로 현상 읽기가 바로 그가 현재 거닐고 있는 세계인 셈이다. “내가 쓰는 모든 시라는 것은 해방의 이미지입니다. 해방의 이미지라는 것은 인간이 해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그 속에 있다는 것이죠. 그 해방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내 스스로 찾아가는 것이죠. 그 해방의 이미지 하나가 이루어지면 그만큼 이 세상에는 꽃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고 그 꽃이 하나 더 생긴다면 그만큼 세상은 더 풍부해지겠지요. 그와 같은 인위의 꽃을 피우고 그걸 봄으로써 삶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얻게 되고 사회 변혁도 그 속에서 읽어야 되겠지요.” 그는 시어에 자유를 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육체를 되찾아주고자 노력했다. 언어가 곧 백성이었던 나라, 그런 나라의 언어를 오늘도 찾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꽃이 잎과 줄기와 향기로 꽃밭의 몸 안으로 잡아당기듯 꽃이 꽃밭의 육체를 잡아당겨 젖가슴을 내놓고 가랑이를 벌리듯 꽃밭의 꽃이라는 꽃은 모두 손에 잡히는 세계를 몸 속으로 몸 속으로 밀어넣듯
욕망의 성기며 육체의 현실인 말은 오늘도22)
오선생 근황은? “강원도 영월의 수주에서 넓은 길이 갑자기 턱 끊어져 없어진 武陵에 한 趙州의 집이 있다 당연히 趙州의 집이라 뜰 앞에는 잣나무가 있고 자주 아니 가끔 끊어진 길을 보고도 돌아서지 못하고 곧장 이어지는 길을 묻는 자들이 잣나무의 그늘을 찾기도 한다 오늘 이 趙州의 집 잣나무에는 가슴이 붉은 딱새 한 마리가 왔다 갔다 밑에서부터 네 번째에 있는 가지 동쪽에서 서쪽으로 하늘을 파고 있는 그 가지에 앉았다가 갔다 인간의 시간으로는 약 5분쯤 두 다리로 온몸을 들고 한동안 앉았다가 앞뒤로 몸을 흔들며 동쪽을 보다가 주섬주섬 두 다리를 챙겨 서쪽으로 갔다”23)(1995년 12월호)
주1) 詩<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중에서 주2) 詩<空山明月>에서 주3) 詩<몇개의 現象>중에서 주4) 詩<봄>에서 주5) 詩<개봉洞과 薔薇>에서 주6) 詩<한 잎의 女子 1>에서 주7) 詩<분명한 사건>에서 주8) 詩<巡禮20 ─別章 3篇>중에서 주9) 詩<빙그레 우유 200ml 패키지>중에서 주10) 詩<그는 아직도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다.>중에서주11) 詩<詩人 久甫氏의 一日 2--南山>중에서 주12) 詩<이 시대의 純粹詩> 중에서 주13) 詩<龍山에서>에서 주14) 詩<우리 시대의 純粹詩>중에서 주15) 詩<손>에서 주16) 詩<원피스>에서 주17) 詩<詩>중에서 주18) 詩<詩人들>중에서 주19) 詩<대방동 조흥은행과 주택은행 사이>에서 주20) 詩<지는 해>에서 주21) 詩<우주 2>에서 주22) 詩<말>에서 주23) 詩<趙州의 집1>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