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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박제천
도깨비 시인 박제천 ─ 티끌이란, 삶을 사는 동안 우리와 마주치는 諸行의 그림자이며 그 그림자의 춤추는 모습이다
김강태
혜화동 도깨비 박제천은 도깨비다. 도깨비는 박제천이다. 그 도깨비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불쑤쑥 출현하니 문제다. 그러니 약간은 돈 도깨비다. 그 도깨비야말로 매사 겁 없으니까 문제다. 실제로 그런 도깨비라면 벌써 포박했을 텐데, 朴도깨비는 현재까지의 활동에 이상 무. 오늘도 그는 애플 도깨비 상자에 몸을 싣고 금 나와라 뚝딱, 시 나와라 뚝딱, 두들기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도깨빈 지금까지 내 눈에 역시 도깨비로 비친다. 그는 도깨비 중에서도 상도깨비다. 그런데 요즘 도깨빈 대머리네. 내가 뭐라고 묻자 그는 뭐라고 툴툴거리며 답한다, 老子영감처럼. 박제천은 낮도깨비 겸 밤도깨비, 사이버 도깨비 겸 호머 도깨비. 오늘은 날씨 우중충, 늘 우중충한 박 시인이 혜화동에 있어 찾는다. 실로 대학로 부근을 배회하다 보면 그의 구부정한 허리 및 맑은 대머리와 만난다. 나는 형의 마알간 대머릴 좋아한다. 이른바 속알(소갈)머리없는…. 그는 축농 증세로 코를 자주 푼다. 밥 먹다가도 팽, 푼다. 거세게 또 팽, 푼다. 팽, 팽팽―. 그의 성깔과 똑같다. 지저분하나 형답고 프로답다. 시 <도깨비가 그리운 날>(부분)은 오히려 도깨비대장 자신(박제천)을 그린 시 같다.
도깨비가 되고 싶은 날은 도깨비가 되자 스무 살 짝사랑 찾아 이 구석 저 구석 휴대폰 거는 몽달비 도깨비도 만나보고그리운 이에게 밤새도록 삐삐를 쳐대는 반딧불 도깨비도 만나보자 박제천은 도깨비. 푸른 별 도깨비. 나는 속삭인다. ‘도깹아, 도깹아. 빨랑 오려믄, 지금부텀 니캉 내캉 노올자!’ 본디 온순한 강태랑 독한 제천이랑 보글보글 끓는 찌개 앞에 마주한다. 2차까지 간다. (억지로 간다. 형의 노랠 들으러.) 그는 노래가 하나밖에 없다. <고향의 봄>. ‘나의 살던 고향은!’ 해놓고 ‘더 하랴?’고 해서 더하라니깐 ‘꽃피는 산골!’ 해놓고는 또 ‘더 하랴?’ 끄덕이면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한 뒤, 숨이 찬 지 한 잔 쭉 들이킨다. 비자금을 국민 앞에 까놓자면 형은 음치다. 몇십 년을 읊었는데도 음정도 박자도 그냥 그대로요, 도저히 구제불능이다. 아리땁고 정숙한 김정희 부인이 어찌 이런 부실한 남자와 사는고. 주위가 하도 놀려대서 요새 새 노랠 하나 개발했다지만, 몰래 들은 바로는 별로 신통치 않다. 차라리 전자가 낫다. ‘도깨비가 된 날은 도깨비만 만나자/사람사는 어려운 일 제껴두고/도깨비 방망이나 두드리며/사람보다 어여쁜 도깨비들과/컴퓨터 노래방에 들어앉아/목이 쉬도록 그리운 이들이나 불러모으자’며 외치는 끝연의 결연한 모습을 보라. 노래는 시원찮아도 시는 어찌 이리도 좋은지. 그의 서정 미학이 화악 빛난다.
<이름>에게 부치는 편지 박제천은 편지를 쓴다, 끊임없이 쓴다. 유형 무형의 존재들에게 전하는 그의 모든 필기 행위는 죄 구애요, 하소다. 그는 말한다. ‘소인이 찍혀지지 않은 편지, 우표도 봉투도 없는 편지, 수신인의 이름조차 적혀지지 않은 편지를 1,000여 편이나 써온 셈이다. 그 많은 매체들이 소인이며 우표의 몫이라면, 시집 이름들은 우체국의 표시일 수도 있겠다. 아니, 바람의 소인, 눈길의 우표를 단 시의 엽서들이 이름 적혀진 어떤 수신인보다도 더 반가운 사람의 가슴 속에서 눈부신 개봉의 때를 기다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고. 이처럼 그의 시적 질료는 광막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의 서신은 끝없는 이름과의 만남을 시도하는 애련한 몸짓이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 하고 싶은 말이 소용돌이치는 바다의 물결, 나무마다 달려 있는 눈의 꽃, 그 모두가 누군가에게 몸으로 쓰는 편지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이 세상의 것들은 하나같이 제 깊은 뜻을 펴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는 말을 살펴 보면, 그의 진득한 편지 쓰기는 ‘몸으로 쓰는 지난한 행위’로, ‘저들에게 보내는 글월은 써도 써도 끝이 없다. 실밥을 잡아당기면 이불 호청 한 벌의 실오라기가 모두 풀려나오듯’ 술술 써진다고 고백한다. 그의 고전에 대한 지식은 상당하다. 당나라 이하로부터 한나라 사마천은 물론, 프랑스의 랭보와 보들레르와도 연애를 멈추지 않는다. 물과 불, 소리조차 본래의 물이 아니고 불이 아니며 소리가 아니라는 견해는 老壯을 애모한 소산이었다. 이어서 ‘우리가 모여 사는 이 푸른 별이 순간 한 알의 겨자씨로 숨어 들어가는가 하면, 부처의 말처럼 물방울 하나 속에 삼천대천의 우주가 떠오르는 자유로움이 곧 갇힘이고 그 갇힘 속에 열림이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저런 생각을 담은 게 바로 시집 《푸른 별의 열두 가지 지옥에서》(청하, 1992)다. 그 열두 가지 지옥에다 박제천은 가능한 한 많은 이웃들을 불러모아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한다. <지옥의 집>에서 <침묵의 지옥>까지 나타낸 일련의 시편을 보며 나는 그의 집요한 이름짓기 작업에 몰입하고 만다. <새 이름을 불러 주게>(부분)는 상당히 독특한 시다.
어느 날 나는 내 이름을 새로이 짓기로 하였네 아버지가 주신 내 이름에 얼룩이 묻어서가 아니었네 사슴과 같은, 해동청과 같은 이름이 부러워서도 아니었네금강초롱, 묘향덩굴처럼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세워 꽃을 피우고자 함도 아니었네 1500년 전 이탈리아 밀라노에 살던 백인 아마도 푸른 눈에 키가 크고 몸무게는 물론 영혼의 무게도 엄청나게 실한 사람/다만 그를 닮고자 함이었네
시인은 지금 시적 화자가 되어 사물 명명법에 사로잡혀 있다. ‘다만 그를 닮고자 함’에서. 그가 사는 자취로 여기저기 남겨진 것들에게 이름을 주고, 뜻을 붙이는 ‘업의 등신대’로 사물 이름을 제 것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깊은 사고다. 박 시인은 많고많은 것들을 추려내어 알맞은 뜻과 소리를 붙여주고 싶다.
<적막>이라는 도깨비들 박제천은 오수환을 좋아한다. 그의 그림을 몹시 좋아한다. 그림에 언제나 화두의 서기가 서려있다는 확신에서다. 그는 오 화백의 작품 화두를 ‘수많은 생각의 실오라기들을 하나로 묶고, 응어리진 마음의 덩어리를 단번에 깨뜨릴 수 있는 방편의 지표이자 상징’이라고 정의한다. 오수환 나름의 화두는 ‘곡신谷神’을 표제로 내걸었다. 곡신은 널리 알려져 있듯, 노자의 ‘골짜기의 신’이므로 보이지 않는 존재다. 그렇다면 화두로 삼은 ‘골짜기’의 정체는? 박 시인은 이를 ‘음양의 음이자 양을 만들어내는 힘이요, 비어 있음으로써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며 ‘너와 나의 분별을 잊는 일체감’이라고 풀이한다. 오씨의 그림이 그런 비의秘意를 담고 있다는 탄복성 발언이다. 그런 다음, 오수환은 ‘적막寂寞’이란 화두를 내세운다. ‘寂─’이란 말은 《역경》에 근거한다. 어느 무엇도 생각함과 행위가 없으니 움직이지 않음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는 감상자에게 《후한서》의 ‘적막을 지킴으로써 신이 머문다’를 적시摘示한다. 박제천은 오수환을 위해 처음엔 시를, 다음은 시에 산문을 입혀 발표한다. <나그네 새>(부분)를 제목으로, 어느새 나그네 마음을 시로 크로키한 것이다.
붉은 물감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채/내 눈은 백록담 발치의 차돌멩이를 꿈꾼다/푸른 물감을 한 초롱 덮어쓴 채/내 마음은 천지 언저리의 고사목에 매달린다//바람아, 이 누더기 꿈을 휘날리게 하여라/(…중략…)//술에 섞여드는 별들의 피/술로 씻어내는 무지개의 살/이제는/모두 버리고//땅 속 어드메/하늘 길 어느 갈래//참나무 숯이 되어 이글거리는 노여움/빈 오동나무 울리는 서러움/둥치도 가지도 잘린 채 장승이 된/오리나무의 서러움/모두 버리고
시인은 자기 시를 안내한다. 곡신谷神은 곡신으로 머물러 있고 적막은 또 적막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오수환의 ‘곡신’을 두고, 최근에 그는 다시 한 편의 시를 쓴다. <곡신의 얼굴>(부분)이란 작품이다. 오수환과 그림과 주제와 그들을 이루는 마티에르에 대해 시인은 황홀해진다.
눈썹 사이가 넓다 대머리에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콧줄기는 3부능선쯤이 꺼져 있다//화가 오수환이 그린 곡신의 얼굴이다 오수환은 곡신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래도 곡신만 그려댄다 나랑 술판을 벌이고 나면 곡신이 부쩍 늘어난다 그렇다면 오수환이 그린 곡신의 모델은 누구인가 오늘밤엔 모델료를 받아 챙겨야겠다고, 증거삼아 작품목록을 샅샅이 들쳐보았지만 그에게는 곡신의 얼굴이란 작품이 없다 내가 본 곡신의 얼굴은 누구의 얼굴인가 문득 거울을 보니 거기 곡신이 웃고 있다 물론 나의 생각 품으로 무와 허무는 사뭇 다르다는 판단이다. …무는 무요, 없음이다. 허무는 무가 아니요, 비어있는 무다. 따라서 허무라는 언표에는 당연히 공간이 그려진다. 알 수 없는, 질그릇(＝마음)같은 무. (나도 모르겠네. 박제천을 만나면 나도 이렇게 준도사가 된다. 그는 톤 하나 흐트리지 않고 어눌한 말을 잇는다.) 앞이 노래진다. 지끈거린다. 오수환 그림을 보면서 그는 항상 마음이 편해진다. 화가 마음이 비었기에 그림의 마음도 빈 채로다. 하나의 순수 육탈을 훔쳐보기? 이렇게 박제천은 자신이 유무형의 사물로 다가가 두들기고 때려보고 발길질하고 핥고 더듬던 도의 실체가 문득 오수환의 그림에 웅크렸음을 느낀다. 그리하곤 그림의 정체를 파악(획득), 자기 시로 만든다. 한동안은 착각이려니 했다. 그러다가 박제천은 한동안 노자에게 미친다.
너는 빈 그릇 너에게서 나는 많은 것을 퍼낼 수 있다/너는 넘치지 않는다 그저 깊고 넓다/너는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눈부신 빛의 힘을 죽이나/그 맑음은 그대로 있음이다/나는 너의 어미를 모른다 허나 너는 그 언젠가부터 있어왔다 ― <너> 1연
오수환은 그의 정신에 무수히 뿌리 내린 나무들의 숲을, 먹물과 물감으로 하나씩 불태워버린 자취를 우리에게 그림으로 보여준다. 좋은 시 <나는 너무 많은 이름을 알고 있다>(부분)를 보자. 존재론적인 시각이 깊숙이 개입되었다.
나는 너무 많은 이름을 알고 있다 신새벽의 어둠 속에서 눈을 깜박이며 태어나는 푸른 노을이 너의 이름이다 바람 속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바다의 신음소리 들끓는 소용돌이 속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해가 너의 이름이다
오수환의 그림에서 비어 있음을 새로이 바라본 것은 참으로 기막힌 발견이었다. 비어 있음은 언제고 가득참을 예비하는 법. 나의 연작시 <비어 있는 것을 위하여>에도 소개한 적이 있지만 비어 있음이란 떠돌아다니는 존재의 정립된 실상이다. 비밀을 찾는 저들 순례자에게 보일 편지를, 오수환은 그림시詩로 우리에게 정확히 발송해준다. ‘도깨비는 몸이 없으니 그리기 쉽다’는 한비자의 말은 다분히 유물론적인 시각일 것이다. 몸이 없으니 정답이 없다는 생각을 뛰어넘어 그가 새롭게 보여주는 도깨비들은 보이는 도깨비들이었다. 박제천은 거듭 찬탄한다. 그의 그림은 곡신에도 있고 적막에도 있다는 믿음에서다. 그래서 ‘사람의 삶이란, 실은 도깨비가 보여주는 우리네 마음의 형태’라고 쾌히 말한다. 박제천과 오수환은 그 형태를 지우고 지움으로써 근원적 삶의 양태가 홀연히 드러난다는 생각의 공유점에서 서로 동질성을 발견한다.
옛날, 박제천이 어렸을 적에 어렸을 적, 그의 꿈이란 대개 별과 관련지어 있었다. 박 시인의 글과 말을 그대로 인용해서 엮자면, 생 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나 영화 《E.T.》의 줄거리와 분위기가 비슷했다. 굳이 다르다면 별아이들이 그를 찾아오는 대신 그가 직접 그 곳으로 찾아가는 차이랄까. 어린 제천은 지구라는 별을 싫어했다. 가능하다면 이 별을 떠나 다른 별로 옮겨가 살고 싶어했다. 이주자는 언제나 혼자였고, 그간 전쟁 직후의 황폐성이 어린 마음의 감수성에 입힌 상처탓이었다. 연로한 아버지는 몸져 앓아 눕고, 어머니는 누이와 함께 미제 물건 장수로 나섰다. 그래도 시장터 좋은 목에 집이 있어, 가겟세를 제법 거둬낼 수 있었다. 그때문인가, 중고교에 다니는 형들은 친구들과 바깥으로만 나돌았다. 11남매 중에 살아남은 8남매의 막내둥이 제천이만 혼자 팽개쳐져 있었다.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전후의 초등학교란 기억조차 없을 만큼 혼란했다. 느닷없이 담배를 피우던 열일고여덟, 덕지덕지 여드름딱지의 흉물스러움. 몹시 수줍은 성격으로 또래의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한다. 형을 따라나설라치면 눈을 부라리는 바람에 그러지도 못했다. 혼자인 그는 하늘을 친구삼아 논다. 사금파리 조각으로 해 바라기, 구름이 토끼·여우와 삼각·사각형으로 바뀌는 걸 재미삼아 구경했다. 다행히 밤엔 별이 있었다. 어린 제천은 노상 툇마루에 주저앉아 그들을 올려다 보았다. 얼핏 잠들었다가도 아버지의 해소기침 소리에 놀라 방을 뛰쳐나가 오직 별들과 속삭였다. 그는 이렇게 어린 시절의 쓸쓸함을 사랑했다. 그 별들과 숱한 대화를 나눴던가. 오늘 밤엔 너희 별로 가고 싶다고. 어느 날 그는 한 가지 재미있는 생각을 창안한다. 밤 하늘의 별을 세어보자…. 서른을 넘기면서부터는 별의 숫자 새기기가 불가능함을 알고 종이에 별들을 옮기기 시작한다. 나중엔 요령도 생겨, 하늘을 지역별로 나누고 포개진 별은 무더기로 구분지었다. 밝기에 따라 등급을 매겨 놓고 왕별 이외의 숨박꼭질은 개의치 않았다. 천문학상 우리가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별은 약 6천 개 쯤이라던데, 그렇다면 어린 나이에 발견한 2, 3백개의 별은 굉장한 숫자였다. 지금도 그는 별들을 바라볼 적마다, 어린 시절 지어 준 곰·큰새 등의 이름을 떠올리는 추억만으로도 가슴 뿌듯해 알알한 그리움에 젖는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가장의 죽음은 가정을 큰 소용돌이로 밀어넣고 아홉 살짜리 천둥벌거숭이에 불과한 소년은 이때부터 별 연구를 까맣게 잊는다. 그때 거기서 발을 빼지 않았더라면 그는 천문학자나 행성연구가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
시인이 된 동기/특별한 만남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그에겐 조그만 유산이 할당된다. 지금 돈으로 치면 근 1억원쯤 되는 액수라고. 다만 형제 모두에게 묶인 거라 현실감은 없었다. 돈 쓸 궁리를 하지만 어린 그로서는 헌 책 사보기 외에 별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생각 끝에 맘껏 공부하리라 마음먹는다. 그는 고교 졸업 때만 해도 철학 전공을 염두에 두었는데 중고교 6년에 걸친 다독의 결과였다. 이때 그의 독서 목록 첫장을 장식한 것은 이광수·김말봉·박종화·홍명희·박태원의 소설책이었다. 그는 차분히 정독하는 편은 아닌 남독과 속독을 즐기는 편이다. 따분하거나 난해한 부분은 건너뛰며, 열병에 걸려 신들린 양 읽어나간다. 이광수·도스토예프스키·조이스에 이르는 기나긴 소설 동행, 소월을 비롯하여 랭보를 찾아가는 시로의 항해, 루소에게서 얻은 불씨를 칸트의 얼음구덩이에 묻어버린 참담한 사상의 노정을 통해 그는 무수한 친구를 만나고 헤어지는 법을 제대로 배웠다 한다. 그러는 사이, 시업에 전환점이 된 하나의 중심 빛을 만난다. 노자·장자와 한비자로, 이른바 제자백가인 그들로부터 충격적 이미지를 만난 그는 이처럼 경이롭게 탄식(?)한다. ‘그 사상의 시원으로 역류하는 외로운 나의 유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가 지느러미를 움직일 때마다 내 몸뚱어리에 붙어 있는 서구의 비늘이 일제히 뒤집히는 것 같은 아픔이 있었다.’ 그림과의 우연한 만남 박제천은 그림과도 만난다. 우연히 책방에 들려 펼쳐보게 된 한 권의 그림책이 계기였다. 처음 사 본 그림책은 고호나 샤갈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마르크 샤갈이 무엇을 그렸고 고호가 왜 귀를 자른 자화상을 그렸는지, 끌레의 저 우주 식물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단숨에 알아차릴 것만 같은 기쁨의 그물망에서, 정말 끝없는 열락을 맛보았다. 서서히 동양화가의 그림도 눈뜨게 된다. 그들의 침묵 세계는 순수한 우연이며, 그러한 우연을 위한 단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체득하기도 한다. 그러한 경지는 마치 경악과 같은 감동으로 자신을 밀어붙이는 힘 그 자체였다고 털어놓는다. 문자의 마력에 휩싸였던 그에게 그림은 여백과 풍경의 또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 이를 ‘엄청난 예술 세계의 화염에 아무런 내출혈이나 외상을 입지 않았다는 점’이 이상하며, 자신은 ‘그 태풍의 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라고 회억한다. 그런 와중에 부드러운 노자의 물에 온몸을 적신다. 그러나 가열찬 혼란이었다. 서구 철학과 동양 사상의 혼거, 예술과 문학의 혼재 또한 마찬가지였다. 학과 공부와 문학 공부는 나름대로 독학이 가능했지만 철학을 체득하기까지는 매우 버거웠다. 이 때문에 철학을 전공키로 생각을 바꾼 그는 마침내 철학과에 응시했지만 낙방이었다. 국가고시 1회인 그는 이미 받아놓은 점수로 타 대학 철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기독교 철학을 희망했기에 그만둔다. 그는 밀양의 어느 사찰에서 한 달여의 재수생활을 한 뒤에 이듬해 동대 국문학과로 진로를 정했다. 《태백산맥》《아리랑》의 저자 조정래와는 대판 싸운 뒤 친해졌고 선원빈·정의홍과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에서 뵌 고전의 김기동 선생은 그가 교수와 처음으로 나눈 술자리라 특히 인상적이었다. 김 교수님은 술값을 잘 내셨다. 그의 대학 시절은 치기만만. 20여년 전, 현대문학을 통해 밝힌 문우 홍신선의 박제천 기記는 오로지 ‘오기·대머리·술’로 요약한다. 그들은 만나자 마자 호모 비슷한 감정으로 어울려 다녔다고 묘사하고 있어 흥미롭다. 그는 당시 비평가들에게 ‘이 시대, 당대에 대해 사기 치지 말라!’고 호언했다고. 그의 특기는 바둑. 그러나 나는 그가 바둑 두는 걸 한번도 보지 못했다. 1급이라는데, 의심, 궁금.
에피소드 어린 시절부터 그는 후견인이 없었다. 아버지는 초등학생인 그를 떠났고, 어머닌 무학에 연로하여 당신의 병치레에도 힘들어 하셨다. 중고·대학 입시는 물론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해 나갔다. 그때문일까, 그는 지금도 신중하게 꼼꼼하게 일을 해나가다가도 순간의 충동을 못이겨 행동할 때가 적지 않다. 한 예로, 군복무를 우선 끝내자고 마음을 다잡은 채 4학년 1학기가 끝나는 ’66년 8월, 졸업에 한 학기를 놔두고 군대 가서는, 제대 후 복학하지 않은 사건이다. (그는 휘파람 불며 유쾌히 입영열차를 탄다, 아내와 홍신선의 배웅을 받으며. 대학신문에 <황제는 떠난다>는 요상한 글까지 게재하라고 던져놓은 채. 열차에 올라타자 마자 곧바로 의자 밑을 기는 똥개훈련에 들어가면서 조금 기가 꺾였지만, 입 속으론 <새하곡>이나 <귀거래사>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군대에서도 조그만 틈을 낭비하지 않았다. 공책에 깨알같이 시 쓰기를 3년, 공책도 3권으로 불어난다. 만 35개월 며칠 만에 그는 입대할 때의 그 유쾌한 기분과는 정반대의 괴상한 기분으로 제대한다. 그러나 군을 나온 ’69년 8월의 뜨거운 햇볕 아래, 갈 곳이 없던 그는 아내와 함께 누이 집을 찾는다. 다락방에 잠시 미래를 눕혀 놓은 채, 지난 3년간의 시들을 정리한 것이다. 그 때 일을 <스물세 살의 가을>(부분)에서 이렇게 그렸다. 처음엔 장자 <내외잡편>의 편차에 맞춰 시의 체계를 엮었지만, 나중에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를 깨닫는다. 《장자》의 33편에 편수를 맞추는 것으로 <장자시>를 매듭짓는다. 그의 책읽기는 계속된다. 동양서는 논리적이기보다는 상황적이고, 총체적이기보다는 개체적이라서 좋았다. 당연히 한자 습득은 거의 독학에 기초한다. 그렇게 해서 장자를 읽어치웠고, 《사기》와 《논어》, 《한비자》에 이르는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한 것이다. 그는 숫자에 밝다. 예컨대, 옛 고구려인들이 그들의 하늘에서 2백 83개의 별자리와 1천 4백 64개의 별을 찾아 냈다는 기록은 어린 그를 흥분시키기에 흡족했다. 그는 불교에도 기운다. 이 두번째 만남은 새로운 사물을 찾아 배회하던 (스스로) 미숙한 ‘박제천 정신’이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고 비로소 뿌리 내릴 절호의 찬스였다. 한때 발레리도 동경의 대상이었다. 헌데 발레리를 읽을수록 어딘가 마음이 허전했다. 속물 근성이랄까, 무언가 잘난 체하는 겉멋이 느껴진 것이다. 엄밀한 순수 사고, 지성의 결정체, 철인·시학자와 같은 관사들이 그를 감쌌건만 시는 사람의 정서가 미흡했고 산문은 단정적인 흠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 무렵에 박제천은 노자와 장자를 함께 만난다. 장자는 그 광풍 노도와 같은 상상력과 요설로 하여 단숨에 그를 사로잡았으나 노자는 처음엔 담담해서 별다른 매력을 갖지 못했다. 발레리가 동경의 대상이라면 장자는 그를 압도하는 힘이 있었고, 노자는 먼 발치에서 다만 그윽히 자신을 응시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단적으로 쉴 틈을 주지 않는 장자였다. 청년과 같은 객기로 심장을 쿡쿡 쑤셔오던 보들레르에게서 친구와 같은 감정을 느꼈다면 장자는 폭군에 대한 감정이었다. 박제천은 이때 최동호가 언급한 문학에 대한 ‘야심’을, 정진규의 ‘투쟁성’을 작품의 은밀한 곳에 노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때를 이렇게 말한다. ‘랭보나 이하와 같은 철부지 천재들과 어울려 뜬눈으로 밤을 새우거나 제임스 조이스나 조주와 더불어 미로를 산책하는게 오로지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시인의 삶 1945·3월 23일 서울에서 부친 朴晶崙, 모친 黃福順의 11남매 중 막내로 출생(본적：중구 주교동 15번지)/1950·방산초등교 입학/1951·1.4후퇴시 대전으로 피난. 1개월 후 상경, 복교/1955·부친 사망/1956·초등교 졸, 한양중 입학, 시 습작 시작/1959·한양중 졸, 성동고 입학. 비문예부원으로 교지 제작, 문학의 밤 등에 참여/1962·성동고 졸업 후 1년간 여행과 독서 소일. 전진호, 선원빈, 오진용, 김학철, 배길랑 등과 ‘火鳥’ 동인 결성/1963·동국대 국문학과 입학, 재학시절 ‘詩鄕’ 동인 가담. 조태일, 김학철 등과 ‘대학시회’ 결성/1964·천기철, 홍신선, 정의홍, 선원빈, 김정희, 정원모, 문윤호 등과 ‘다다’ 동인 결성. 동국문학회장/1965·현대문학 신인추천제 시부문 1, 2회 추천(申石艸 선생). 동국문학회 초대 회장(대학 내 동국문학회와 동대문학회 통합)/1966·현대문학 천료(신석초 선생：완료작 <벽시계에게>). 4학년 재학중, 8월 육군 포병 입대. 모친 사망/1969·8월 강원도 양구 UN고지 밑 방산리에서 병장으로 만기 제대. 연작시 <莊子詩> 창작. 삼천리사를 거쳐 주부생활사 입사. 4월 19일 金情姬와 결혼. 홍신선, 오규원, 유승우, 이건청, 양채영, 김석규 등과 ‘한국시’ 동인 결성. 1970·아내 김정희, 중등학교 1급 정교사(국어과) 자격 취득. 아들 진호 출생(2월 8일). <莊子詩> 발표(현대문학)/1971~79·아내, 면목·신림·영등포여중 교직생활, 종료./1971·<莊子詩>를 문학과지성 재수록. 홍신선, 김학철, 오순택, 정지하, 이만근 등과 ‘시법’ 동인 결성/1972·딸 수진 출생(12월 17일). 주부생활사에서 진학사, 동화출판공사, 국민서관를 전전/1974·신태양사 편집장/1975~76·동서문화사 편집장. 예문관에서 첫시집 《장자시》 출간(발문：강우식, 홍신선 시인). 문예진흥원 위촉 《민족문학대계》 수록용 장시 <판각사의 노래> 집필/1976·시극 <새타니>(이언호 합작) 공연.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입사/1979·제2시집 《心法》 출간(연희출판사, 해설：조정권, 발문：정진규). 제24회 현대문학상 수상. 첫시집 《장자시》 재간행(연희, 발문 추가：윤후명). 1980·아내, 성신여대 산업대학원 산업미술학과 입학(염직디자인). 홍보출판부 차장/1981·제3시집 《律》 출간(문학예술사, 해설：이승훈). 제14회 한국시협상 수상/1982·아내, 대학원 졸업. 자료관장. 동아일보 월평 대담(1∼6월, 김주연). 문인 해외시찰단원으로 파리, 츄리히, 방콕 여행(황명, 김시철, 서동훈, 이문열, 오정희 등)/1983·시선집 《세번째 별》 출간(고려원, 해설：김준오). 제2회 ‘이 달의 책’으로 선정. 제4회 녹원문학상 수상. 시론집 《영혼의 날개》 출간(민족문화사). ‘시정신’(舊名 ‘손과 손가락’) 동인. 자료관장 겸 문학미술부장/1984·문화총괄부장. I.W.P.(국제 창작프로그램：미국 아이오와대 소재) 초청시인으로 3개월간 아이오와시티 메이플라워에 체류. 이후 1개월간 미국, 캐나다 여행. 제4시집 《달은 즈믄 가람에》 출간(문학세계사, 해설：최동호).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역 등 합본 번역시집 《The Mind & Other Poems》 간행(문장사)/1985·자료관장/1986·《명심보감선》 출간(샘터 파랑새문고). 《채근담》 출간(샘터 파랑새문고)/1987·제5시집 《어둠보다 멀리》 출간(오상). 제22회 월탄문학상 수상. 시선집 《꿈꾸는 판화》 출간(문학사상사)/1988·홍보출판부장. 《시창작강의》 출간(작가정신, 강우식 공저). 제6시집 《노자시편》 출간(문학사상사). 제1시집 《장자시》를 1, 2권으로 분책 재간행(문학사상사). 시선집 《스물세살의 가을》 출간(예전사). 문학아카데미 창립/1989·제7시집 《너의 이름 나의 시》 출간(문학아카데미). 제4회 윤동주문학상 본상 수상. 《시창작방법론》 출간(작가정신, 강우식 공저). 명시 에세이 《꿈꾸는 삶의 불꽃》 출간(문학아카데미). 1990·캐나다 외무성 초청으로 5개 도시 횡단여행(뱅쿠버, 오타와, 토론토, 몬트리올 등)/1991·문화발전연구소 자료관장(덕수궁 소재). 시선집 《하늘꽃》 간행(미래사 한국대표시인 100인선 70번, 해설：조정권). 제5회 동국문학상 수상/1992·자료관장(예술의 전당 소재). 제8시집 《푸른 별의 열두 가지 지옥에서》 출간(청하). 베를린, 파리, 런던 등 유럽 3개 도시 출장 여행/1993·명상록 《마음의 샘》 발간/1994·문화발전연구소 조사연구부장. 문예진흥원 퇴사. 문학아카데미 대표로 상근.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출간(문학아카데미, 강우식 공저)/1995·딸 수진, 문화일보 사계문예 시부문 당선(심사：김광림, 박의상). 성심여대 국문과 졸업 뒤 샘터사 입사. 아들 진호, 홍익대 서양화과 졸업. 계간 문학아카데미 창간 및 폐간. 월간 문학과창작 창간. 동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추계예대 문창과 강사. 《어린이 글짓기 소프트 200》 출간(문학아카데미, 이탄 공편). 시집 《나무 舍利》 발간/1996·아내, 퀼트아트 및 김정희 인형연구소 설립. 아들, 프랑스 파리 유학(6월). 제16차 세계시인대회 참석(일본 마에다市). 김진, 송정란, 이은주 시인과 동반, 귀왕천 온천 여행. 시집 《나무 사리》 문체부 추천도서 선정. 《어린이 논술 완성 소프트 200》 출간(문학아카데미, 이탄 공편)/1997·제5회 공초문학상 수상(수상작：<달항아리>). 《Sending the Ship out to the Stars》 간행(97년, 고창수 영역본. Cornell East Asia Series 88). 《시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 간행(문학아카데미). 아들, 프랑스 세르지 퐁뚜아즈(그랑제꼴) 입학. 딸, 동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입학.
시의 특징 그는 1,000여편의 시를 근 30년여에 걸쳐 습작한다. 시란 정신의 자유로움이며 마땅히 육체는 정신의 하인이 된다. 허나 그에게 상상력과 정신에 육체를 마련하는 일은 무거운 짐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좋은 산문(시집 《너의 이름 나의 詩》 후기)을 접하면서 시작詩作의 비밀을 캔다.
이름이란 무엇인가. 이름이란 과연 내가 저를 부르고 저가 내 부름에 응답하는 약속인가. 한자로는 이름을 名이라고 한다. 명은 회의문자이다. 夕과 口의 합자다. 석은 저녁이나 밤을 가리키므로, 사람이나 소리를 뜻한다. 어둠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수가 없다. 그 때문에 소리로서 확인한다.
장자가 名을 ‘모습’이라 칭했던가. 결국 박 시인의 시 쓰기는 모습을 찾아 이름 불러주기와 같다. 지속적인 근로 속에서 우선 느낀 건 편안함이었다. 이윽고 그는 사물과 정신, 상상력과 육체 사이를 즐겁게 돌아다닌다. 일찌기 경험치 못한 정신의 자유로움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가 진실로 자유로운가는 아직도 자신할 수 없다. 그는 ‘세상의 밝고 환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내어 저들에게 육체를 주고 정신의 뼈대를 세워 따뜻한 그리움의 불빛으로 삼으려’ 한다. 그는 ‘번개처럼 나를 후려치는 저 사유의 괴물들, 때로는 절망 속으로 내던지고, 머리가 터져 나갈 정도로 비교의 잠언을 하염없이 지껄여대는 몽상가들, 상상력의 영토와 신민을 확장하고 복속시키는 창업의 제왕들, 무덤 속을 걸어다니거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인들, 이 세계의 낭떠러지에서 투신을 꿈꾸는 초인들…. 이미 저들과의 만남을 은밀하게 기록’해 왔다고 자부한다. 대단한 오만이다. 그의 시를 대표적으로 품평한 이들은 정진규·민용태·최동호·조정권 시인이다. 지난 신문을 보니, 작가 김한길과 평론가 김훈의 인터뷰 기사도 보인다. 김훈은 ’88년 7월 20일자 한국일보 지면에서 ‘관념이나 관념적 표현을 폄하하는 것이 진보적인 독특함으로 통용되는 세상에서, 박제천의 시들은 상상력 위에 올라탄 관념의 시적 질주를 보여준다’고 정리한다. 그렇다. 장자는 말을 버려야 한다고 했으나 현실적 중생은 그렇지 못하다. 그런 현실을 장자가 자연에서 읽었던 것처럼, 박제천의 관심 또한 그쪽일 수밖에 없다. 민용태는 《노자시편》 해설에서 ‘맑스시트 문학론으로 불리우는 내용주의적 문학관’으로 보면서 ‘기상천외의 시어 개혁정신’을 드높이 평가한다. 최동호는 《달은 즈믄 가람에》에서 비교적 심도있는 해설을 통해 ‘그의 시에서 넘쳐나오는 도도한 장강과 같은 우리 시단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면서 시인의 죽음고考를 통해 ‘풍물로부터 역사에의 귀환’이라고 정의한다. 물론 시인이 ‘가까운 삶의 현장으로 되돌아와 사물을 명명하고 새로운 의의를 찾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했으나, 관념적 사변에 지나치게 기울어질 위험성도 아울러 경고했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 주목한다. ‘써갈긴 시집을 벌레먹이로 내어주고, 술에 찌들어 시원치도 않은 오줌보를 흔들며 삶의 때를 가릴 꿈의 갖옷을 마르는 이 외로운 시인에게 합당한 찬사를 보내’자는 슬로건이 참 맛깔스럽기 때문이다.
첫시집 《장자시》 첫시집 《장자시》를 ’75년에 간행한다. 모두 212편이 수록했는데 ’65년 고 신석초 선생님께 추천된 이래 근 10년간의 작품 거의 대다수였다. 그러나 시집의 중심을 이루는 부분은 <장자시>< 아홉개의 환각><토끼사냥><오구대왕의 산문><허수아비가> 등 12편의 연작시들이었고 추천시를 비롯한 단일 시편은 30여 편 남짓이었다. 그로부터 10년 간, 시집으로 묶여질 때까지 그는 자기 공책 속에 잠자던 것들을 불러깨운다. 한때 민속학에 대한 관심은 <오구대왕의 산문>으로, 전쟁 직후의 폐허는 <토끼사냥>으로 상징하고 그림과 문학, 철학과 서양적인 것들은 <풍어제>로 정리한다. 연작 <장자시>를 쓴 이래 시집으로 묶이기까지의 10년은, 동양철학으로 발길을 옮겨가는 동안 동과 서의 내전 기간이었다. 처음부터 승부가 정해진 싸움에서 그는 많은 것을 얻고 다음 길목으로 돌아선다. 장자시편은 젊은 날의 박제천이 그리던 자화상이 연필자국을 덕지덕지 붙인 채 남겨져 있고, 미처 터뜨리지 못한 ‘눌함訥喊’이 여울져 있다고 한다. 고통을 업으로 삼는 일은 예나 이제나 끝이 없다. 시인의 숙명일 게다. 제대 직후, 그는 일감을 찾아 거리로 나서야 했다. 그 혹심한 궁핍은 돌이켜 생각키도 싫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맺힌 것도 아니라고 한다. 원래가 낙천적인 성격 탓이다. 종암동 셋방에서, 가까스로 구한 직장까지의 차비를 아낀 돈으로 담배를 사 태우며 산책하는 기분으로 출퇴근했다. 그러고 보니 알맞은 산책로로, 을지로 2가가 종착지였다. <壯子詩 그 하나>(부분)를 보자.
全身을滿月의활로꾸부려/음악의불붙는시위에살을메기네/배는/한몫의악기/弦과弦사이에노를넣어휘저을적마다/밤무지개를타오르다떨어지는/파도소리
무척 현란한 이미지의 충돌에 경악하고 만다. 팽팽한 정신의 미세한 신경줄기가 파지직, 타는 것만 같다. 삶이 그들 부부를 통해 <장자시>를 쓰게 했을까. 실제로 정진규는 박제천의 제2시집 《심법》 발문에서 시 <근황>을 소개하면서 ‘그의 뼈저리는 내면의 아픔과 그 싸움에 더욱 전율하고 있으며, 또 깊이 능긍凌兢하고 있다’고 접고 있는데, 이 말 또한 느낌이 묘하다. ‘능긍’이란 무엇인가. ‘전율’과 같은 말이다. ‘밤마다 배를 몇 척씩 꾸려서 떠나 보낸다/오늘 내가 만난 물빛 한 지게, 달빛 두 지게만으로도/滿船이 되는 나의 작은 배들이여/그대들 물길의 安全을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물빛 一千隻, 달빛 이천척의 배를/하염없이 떠나보낼 뿐이다’…. 찔러도, 진실로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이미지의 완벽을 지향하는 시다. 그는 곧 생활 전선에 파묻히고 만다. 출판사를 20여 군데 쯤 돌아다녔는데 스스로 ‘정신적인 막벌이꾼’으로 자처한 그였기에 마음은 편했다고. 참고사항. 정진규와 박제천은 잘 싸운다. 원래 둘은 <시정신> 동인이고 친한데 와들 저러나. 만나서 한 잔 걸치면 말이 우선 험상궂다. 朴이 더 심하다. 늘(잘) 물고 늘어진다. 鄭은 그냥 웃는다, (빙글빙글.) 웃다가 한 마디 한다. 그러면 박이 까불지 말라고 한다. (박의 나이는 조금 가짜다.) 종국에 가서는 말이 곱지 않다. ‘쨔식아’, ‘이눔아’가 나온다. 그런데 내게 보기엔 웃기는 폼들이다. 이때의 ‘쨔식아/이눔아’는 포악한(?) 애칭인 거다. 서로 귀여워서 못 살겠다는―. 징그럽다. 여걸 김여정 시인과는 철저히 누님 아우지간이다. 그것도 징그러워라. 《시비시》의 태권도 시인 민용태와는 묘하게도 너무 가찹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도…. 무언가 터질 듯한 윤후명과도 오랜 만남을 갖는다. 요즘 뜸한 듯하지만, 조정권 시인과도 진한 형·아우 사이다. 각설. 이때 가장 값진 국학과의 만남. 때마침 국학 붐이 일었다. 더우기 그에게 주어진 일은 윤문이었다. 노인네들이 싸구려로 한문 번역을 해낸 초벌 원고는 난해시보다 더 어려웠으나 즐겁기만 했다. 한 줄 한 줄 자전을 들춰가며 읽어낸 뜻의 한 자 한 자가 가슴에 각인되었다. 종내는 한문에 대한 오만한 자긍심이 그 일에 더 열중케 했다. 어쨌든 그는 그 무렵 두 권의 책을 아직도 기억한다. 《대한국사》와 《대승기신론》이다. 그 중에도 강렬한 충격이 다가온 《단재사학》과의 충돌 경험은 상당했다. 단재를 비롯, 이 땅에 횃불을 들고자 한 수많은 지성들의 집념 및 좌절을 보면서 그는 우리 것을 바로 이해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갖는다. 그러나 어려웠다. 이어서 시 <月明>을 보자.
① 한 그루 나무의 수백가지에 매달린 수만의 나뭇잎들이 모두 나무를 떠나간다//② 수만의 나뭇잎들이 떠나가는 그 길을 나도 한 줄기 바람으로 따라나선다//③ 때에 절은 말의 무게 허욕에 부풀은 마음의 무게로 뒤처져서 허둥거린다//④ 앞장서서 나뭇잎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쩌다 웅덩이에 처박힌 나뭇잎 하나 달을 싣고 있다//⑤ 에라 어차피 놓친 길 잡초더미도 기웃거리고 슬그머니 웅덩이도 흔들어 놀밖에//⑥ 죽음 또한 별것인가 서로 가는 길을 모를 밖에.(번호 첨기：글쓴이) ― <月明> 전문
<월명>이란 달빛 밝음(딴 의미일 수도 있겠으나), ‘어쩌다 웅덩이에 처박힌 나뭇잎 하나 달을 싣고 있다’는 데서 붙인 이름이리라. 달을 실은 나뭇잎 하나, 그것만이 활활 빛을 내고 나머진 모두들 떠나거나 따라나가고 허둥댄다. 여기서 이해의 포인트는 ‘길’의 이미지 캐기. 시적 화자는 ‘어차피 놓친 길’이라 했다. 그런데 ‘길’은 ‘죽음’과 만나고 있다. 한 가지 의혹은, ⑤연 ‘에라’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시적 화자인 나인가, 나뭇잎인가, 달(빛)인가. 한 장 남은 나뭇잎이다. 시인은 웅덩이에 빠져 볼품없는 나뭇잎이 되어 심술부리다가 까짓 거, ⑥연 ‘죽음 또한 별것인가’라고 자조自嘲한다. 사실 이 작품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는 나뭇가지에서 때가 되면 떠나가는 잎들의 운명을 안다. 삶과 죽음의 순환 법칙이다. 그러므로 ‘나’도 따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렇다면 ③연의 ‘때에 절은 말의 무게’나 ‘허욕에 부풀은 마음의 무게’는 곧 ‘일상적 삶의 중량’으로 읽힌다. 그런데, 보라. ⑤연이 기차다. 박제천의 심술과 초탈의식이 여유로 버무러진, 박제천만의 멋진 모습이다. 그 와중에도 ‘기웃거리고/흔들어 놓는’ 여유는 유머러스하기 짝이 없다. 심술을 밑바탕으로 웃음의 시너지 효과를 돋운다. 이것도 징글맞다. 달빛(월명)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여기서 ④연은 실상 중요한데, 달을 실은 못 생긴 나뭇잎은 시적 자아다, 박제천이다. 그 나뭇잎으로 인한 ‘月明’으로 보면 비밀스레 헌신하는 신실한 시적 자아가 엿보인다. 그의 동근 이마처럼 미지의 달빛은 오늘도 빛난다. 참고로, 다음은 최근작 <달항아리>(부분)로, 가슴·꼬리 지느러미 없이도 정신의 심해를 유영하는 박제천의 진면목을 여지없이 드러낸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월명>처럼 정신의 넉넉함은 이 작품에서도 말끔히 우러난다. 참으로 신비와 황홀한 느낌을 준다. 이 작품으로 올해 그는 공초문학상도 받았다.
그러다 문득 비를 생각하면, 항아리 또한 비가 된다/개여울 속 땅 속 어느 곳이든/내가 만든 비들은 하나같이/항아리 같은 추억, 항아리 같은 사랑, 항아리 같은 죽음을 만든다//그런 항아리 가득 볼펜 꽂아놓고/나는 문득 비의 자서전, 항아리의 자서전을 구상한다/청개구리가 된 부처를 받아들이는 비의 일생,/살도 정도 불에게 내어주고, 사리와 뼈만 남은 부처를 그 안에서 쉬게 하는/사리 항아리의 일생
요즘의 관심사 시작 30년이 지난 요즈음, 그는 영원히 늙은 사내인 노자를 자주 생각하고 있다. 도대체 그 무엇이 그로 하여금 노자를 읽게 하는가. 《노자시편》은 그러한 산고에서 비롯한다. 노자의 이름을 빌어 한걸음 더 나아가 그의 글귀도 조금 빌어서 시인의 이야기를 가닥가닥 풀어헤친 시집이다. 역사·현실·꿈·사고의 복합체란 걸 깨우치기도 하면서 만든 노자시편인데, 근 30여년에 걸친 시 작업의 중간 결산이라는 게 그의 고백이다. 그의 시란 방황하는 정신의 고요함, 부실한 절대주의자의 꿈과 같은 것들에 대한 키 재기에 다름아니다. 우리에게 박제천은 어쩔 수 없는 동양정신의 귀한 시인이다. 지금 그는 통사적인 《한국의 명시》를 총체적으로 제작코자 한다. 체험담이 실린, 일종의 ‘수필로 읽는 시문학사’가 될 전망. 또, 자작시 해설집과 청소년 교양서를 노자·장자 중심으로 꾸미고 싶다고. 아카데미를 운영하느라고 문예진흥원을 나오면서 받은 퇴직금마저 ‘다 까먹었다’며 웃는다. 실제로 지난 10월 20일에 100권째의 문효치시집을 상재했고, 무용과 마임 등의 자축행사를 샘터 파랑새 극장에서 가졌다. 지금 그는 ‘컴도’가 되었다. 컴퓨터 도사란 뜻이다. 원래 ‘도도사’ 원구식 시인에게 착실히 배웠는데, 지금은 상당한 수준급 컴·매니아이다. 회삿일을 거의 혼자서 하는, 일종의 중앙처리장치다. 시인은 작품 속에서 보수주의자가 돼야 함을 믿는다. 나름대로 시의 틀을 견고히 만든다는 생각이다. 그는 말한다. ‘시인이 되려고 시를 쓰지 말라. 전인적인 정신의 결집체가 바로 시다. 또한 시인이란 예술가가 되어야지 단순한 장인匠人이어선 안 된다. 문학은 거짓말을 통해서 진실을 보는 것. 역사는 사실을 통해 거짓말과 만나는 것.’ …말씀도 멋져라.
올림 박제천 형은 십여년 전, 나의 특집시를 읽고 전화를 주었다. 문단 동정에 대해 무지했던 나는 처음에 불려나와 어리벙벙. 혜화 지하철 역 부근에서 돼지갈비를 구워먹으며 진한 대화를 나눴다. 지금도 나는 낯선 자리에 참석하는 게 아직도 낯설다. 때로는 성깔이 약간 더럽고 차겁고 까탈스럽기 때문이다. 당시 형의 《장자시》에 푹 빠졌던 나는 그때 내 작품에 대한 진지한 평점에 다소 흥분했다. 지금도 나는 박제천 초기의 겸허함에 여전히 앵글을 맞추고 있다. 그제나 이제나 나의 원형질은 마찬가지다. 내면상으로, 형과의 관계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춥고 가난했던 초기 문학아카데미 시절, 나는 이 모임에 참여해서 강의도 했다. 회사가 거대·방만해진 지금, 나는 조금 먼 발치에서 형을 바라보고 있다. 치기에 가까운 말이지만, 가까울수록 멀리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작으나 작은 소신이다. 나는 사람 앞에서 잘 계획하지 않는다. 허나 형에게만큼은 ‘직언할 소재’를 찾는 편이다. 이유는, 형이 딴 사업도 아닌 문단 살림을 본격적으로 하는, 어느 장소든 어른이 되는 어쩔 수 없는 문단 지도급 인사(!)가 됐기 때문이다. 허기사 나의 촌평이 촌철살인까지야 할 수 있겠는가마는. 시간이 흐를수록, 형이 좀더 내면적 겸허를 유지하길 빈다. 개인적으로는, 요새 괜히 늘어지는 듯한 시의 가락에 대한 염려도 있다. 치열성의 함량에 문제가 없는 지는 비단 박 시인만의 몫은 아닐 터이다. 제천이 형. 나 비밀스런 고민이 하나 생겼는데, 형이 진짜 장자나 노자할배가 될까봐 걱정이우. 노회한 노시老詩님(＝노스님?)이 될까 걱정이란 말이외다, 혹시나 치쟁이들처럼. (199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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